괘서(掛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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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반역을 도모하거나 타인을 모함할 때 궁문·성문·관청의 문 같은 곳에 이름을 숨기고 게시하는 글.

개설

괘서(掛書)는 조선시대 후기 양반 사대부에서 최하층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의사표현의 한 수단이다. 괘서를 하는 목적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다양하였으나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괘서 장소 또한 이러한 성격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궁궐이나 관청의 문, 장시(場市) 등에 주로 걸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괘서는 약 43건이 남아 있다. 이를 지역별로 보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이 22건으로 전체의 52%, 전라도와 경상도가 각각 7건으로 32%, 충청도가 6건으로 14%, 경기도가 1건으로 2%의 분포를 보인다. 왕조별로는 영조대가 15건으로 가장 많은 괘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전체의 35%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순조대가 12건으로 28%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시기별로는 18세기 전반기와 19세기 전반기에 각각 15건씩으로 전체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괘서사건의 주모자 검거는 43건 가운데 29건으로 약 67%의 검거율을 보이며,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10건, 주모자를 체포하여 형을 집행하였으나 진범 여부가 불분명한 것이 4건이다.

괘서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정부 관리의 비리나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전체의 42%를 차지하고, 둘째는 예언서 등의 비밀스런 기록을 주로 이용하여 조선멸망설,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鄭眞人說), 홍경래는 죽지 않았다는 홍경래불사설 등을 기록한 내용이 전체의 37%이며, 셋째는 외부의 침략 또는 난의 발생을 예언하거나 난을 선동하는 내용이 전체의 20%이다.

괘서를 이용하는 신분 계층도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화한다. 숙종대는 양반 신분이 주를 이루었으며, 영조대는 지식인들과 함께 평민이 괘서에 가담하였다. 이어 순조 대는 유학(幼學)·훈장(訓長) 등 지식인과 함께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유랑인과 노비·관노와 같은 최하 계층의 신분층까지 확대되었고, 헌종·철종대는 옥에 갇혀 있는 죄수까지도 괘서를 이용하였다.

괘서는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약간씩 변하였다. 숙종대는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서 주로 이용하였고, 영조대는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정치적 여론 조성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는가 하면, 개인간의 원한 관계와 지방 관리의 비리를 폭로하는 형태의 사회적 성격도 동시에 나타난다. 순조대에는 개인의 정치적 불만이나 생활고에 지쳐 정부를 비방하는 등의 내용이 많이 등장하여 조선후기로 갈수록 사회적 성격이 강해졌다.

조선후기에 괘서는 당시 일반 백성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심지어 당시의 백성 중에는 괘서가 무(無)를 유(有)로, 허(虛)를 실(實)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매개체로 인식한 사람도 있었다.

괘서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조선후기 백성에게 각종 정보를 제공해 주는 언론 매체이자 여론 형성의 장으로서 기능했다. 둘째, 난을 일으키기 위한 사전 준비 단계로서의 기능이 있었다. 셋째, 비합법적이지만 정부와 일반 관리들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아 백성들이 사회 비판의식을 형성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후기 백성들은 괘서를 통해 불합리한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 의사를 표출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괘서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공간 확대와 함께 참여층도 다양화되었다. 이는 곧 백성들의 저항의식과 비판의식이 점차 성장해 갔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백성들의 의식 성장은 19세기 진주농민항쟁 등 대대적인 농민항쟁을 불러일으키는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괘서는 민의 저항의식과 사회 비판의식을 표출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고, 나아가 민의 주요한 저항수단으로 자리잡아 조선후기 사회 변동을 가속화시키는 한 축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변천

괘서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후기 1679년(숙종 5) 도성의 파자교동괘서사건(把子橋洞掛書事件)이다(『숙종실록』 5년 4월 8일). 그러나 이와 유사한 성격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왕 2년(888)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시정(時政), 즉 나라 정책을 비난하는 글을 써서 조정 관리가 지나다니는 길에 게시하였다. 왕명으로 사람들을 수색하였으나 범인을 체포하지는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정 관리가 지나다니는 길에 게시하였다’는 의미를 갖는 ‘방어조로(榜於朝路)’에서, 방(榜)은 ‘게시한다’는 뜻으로서 괘(掛)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여러 건의 익명서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주로 무신정권기에 권력자들의 비리를 규탄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이때는 방서(榜書) 혹은 벽서(壁書)라고 불렀으며, 조선전기에도 같은 형태의 용어가 쓰였다. 이러한 성격의 글들을 익명서(匿名書)라고 한다. 대부분의 글이 이름을 숨기고 게시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시대 숙종 때부터 괘서라는 용어가 일원화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이상배, 『조선후기 정치와 괘서』, 국학자료원, 1999.
  • 이상배, 『한국 중근세 정치사회사』, 경인문화사, 2003.
  • 이상배, 「조선시대 정치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익명서」, 『문화와 소통의 사회사』, 한국사회사학회, 2005.
  • 한명기, 「19세기 전반 괘서사건의 추이와 그 특성-1801년 하동·의령 괘서사건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43,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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