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場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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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장시 |
한글표제 | 장시 |
한자표제 | 場市 |
하위어 | 상장(上場), 성내장(城內場), 성외장(城外場), 하장(下場) |
동의어 | 장문(場門), 향시(鄕市), 허시(墟市) |
관련어 | 보부상(褓負商), 시전(市廛), 점막(店幕), 장세(場稅), 포자(鋪子) |
분야 | 경제/산업/상업·무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장시(場市) |
상인과 각 지방의 농민, 수공업자들이 상품을 서로 직접 교역했던 농촌의 정기시장.
개설
지방의 상인과 농민, 수공업자들이 각자의 상품을 서로 직접 교역하는 장소로써 장시는 출발하였다. 보통 5일 간격으로 개설되었으며 도로가 만나는 지점이나 백성들이 많이 운집하는 장소에 들어섰다. 조선초기 조정에서는 장시의 개설을 금지하고자 하였으나 지방에서는 장시가 흉년시 백성을 진휼하고 농민들이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금지하지 않았다. 장시는 조선후기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더욱 발전하였으며 본래의 물화를 교환하는 기능과 역할을 넘어서 정보의 교환, 오락, 유희, 백성 안집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장시는 15세기 후반부터 개설되기 시작했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장문(場門)으로 불렀다. 장시는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개설되었다. 1473년(성종 4) 신숙주의 발언에 따르면 연이은 흉년으로 전라도 지방의 백성들이 스스로 모여서 시포(市鋪)를 열고 장문이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보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호조는 전에 없던 일이라 금지하기를 요청했으나, 지방관은 금지하지 말기를 청하여 장시가 증가했다. 전라도는 대부분 평야지대로 농산물을 비롯한 해산물도 풍부하여 장시가 성립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성립 초기에는 1달에 2회씩 개설되어 15일장으로 운영되었다.
15세기 후반 장시의 출현은 이 시기 사회경제적 발달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농업 기술의 혁신으로 농업경제력이 크게 신장되었고 지방의 소상품생산의 출현과 그 진전에 수반하여 성립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과 화폐를 유통하고 교역을 촉진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장시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장시는 성립 초기에는 1달에 2회 또는 3회 개시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대개 1달에 6번 개시하는 5일장으로 발달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8세기 말에 5일장은 전체 1,062개의 장시 중 968개의 장시로 90% 이상이었다. 19세기 초반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전체의 장시는 1,052개였다. 장시는 규모가 커지면 성내장(城內場)과 성외장(城外場), 신장(新場)과 구장(舊場), 상장(上場)과 하장(下場)으로 나뉘어 설치되기도 하였다. 장시가 활발해지자 점차 장시들 사이에 긴밀한 연계 관계를 맺어 각 지역마다 장시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장시권 형성 과정에서 장시들 사이에 설장일의 변경이나 이설, 신설 등의 변화가 나타났다. 장시권의 확대는 상품 유통의 확대로 이어져 포구가 상업중심지로 대두하면서부터는 유통권과 장시권도 변화했다. 장시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다양하였는데 특히 각 지방의 특산물이 상품성이 높아 먼 지역까지 운반되어 교역하였다. 대표적인 장시의 거래물품은 곡식류, 무명, 소금 및 소 등의 축산물이 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곡물류, 직물류, 연초, 채소 등이 상품화되어 거래되었다. 장시의 기능과 역할을 보면 물화를 교역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장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수집하며 홍보하는 장으로, 오락과 유희를 즐기는 공간으로, 백성들을 모집하고 안집시키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변천
15세기 장시가 출현하면서 전국적으로 개설이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장시에 대한 폐단론과 유용론이 대두하였다. 폐단론은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함으로써 도적이 증가한다는 것이고, 반대로 유용론은 장시가 백성들의 자생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면서 흉년 때에 진휼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일부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장시의 개설은 점점 확대되었다.
16세기 들어 조정의 금압책(禁壓策)이 차츰 이완되면서 전라도를 넘어 충청도와 경상도로 확산되어 각 군현마다 장시가 개설되었다. 16세기 말 지방 양반들의 일기자료에 따르면 장시에서의 상품 유통은 농업 생산을 보완하고 거래되는 물품은 농민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동법의 실시, 금속화폐의 유통과 조세의 금납화, 통공발매의 실시와 같은 외적 요인과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 상인의 증가와 같은 내적 요인으로 인하여 장시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장시 중 일부는 경제적 중심지를 형성하여 『만기요람』에 따르면 전국 15대 장시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상설화(常設化)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대길, 『조선후기 장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
- 이경식, 「16세기 장시의 성립과 그 기반」, 『한국사연구』57, 1987.
- 한상권, 「18세기말~19세기초의 장시발달에 대한 기초연구」, 『한국사론』7,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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