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정문(光政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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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광정문 |
한글표제 | 광정문 |
한자표제 | 光政門 |
상위어 | 문(門), 창경궁(昌慶宮) |
관련어 | 명정문(明政門), 영청문(永淸門) |
분야 | 문화/예술/건축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서울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조옥연 |
장소 | 창경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1칸 |
양식 | 행각 사이 평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광정문(光政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39년 9월 10일, 『정조실록』 19년 6월 18일 |
조선시대 궁궐인 창경궁의 명정전 남쪽 월랑에 있는 협문.
개설
광정문(光政門)은 명정전 권역의 남쪽 월랑에 있는 문이다. 월랑이라는 용어는 행각·천랑 등의 용어와 혼용하여 쓰는데, 월랑과 천랑을 말할 때는 대개 칸과 칸 사이가 빈 공간으로 연결되어 열주가 늘어선 구조이고, 행각은 칸과 칸 사이의 공간을 벽체로 막아 방이나 마루, 아궁이를 포함한 주방 등의 부속실이 마련된 공간을 말한다. 명정전의 마당을 둘러싼 이곳은 2칸 규모로 안쪽 마당에서는 열려 있는 열주 공간이고 문을 나가 바깥쪽에서 보면 벽체로 조성되었다. 각 궁궐의 정전 마당을 두른 행각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부속실이 있는 행각과 월랑이 혼용되어 놓여 있기도 하다. 광정(光政)이라는 말은 ‘정치를 빛내다’라는 뜻으로 조정의 마당을 구획하는 문이라는 상징성에 적합한 액호이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정전 마당을 둘러싼 행각으로 그 권역을 이룬다. 명정전을 중심으로 여러 문이 조성되었는데 명정문, 영청문과 더불어 광정문이 그것이다. 광정문은 권역의 남쪽 월랑 중간에 놓여 있다. 남쪽 월랑이란 명정전을 중심으로 마당의 우측에 배치된 공간을 말한다. 광정문은 정전의 협문이었기 때문에 명정문·영청문과 더불어 국가의 여러 가지 행례·연회·시험 등이 있을 때에 중요한 동선으로 구실하였다. 행사에서 공간과 장소의 영역 구분이 필요할 때 기준이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창경궁은 성종 때 3명의 대비(大妃)를 위해 조성된 궁이었기 때문에 왕의 공간과는 활용 방식에서 차이가 났다. 무릇 왕의 공간은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 바른 제도이고 궁궐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창경궁은 정전 영역이 동쪽을 바라보는 형태이다. 때문에 정전 뜰의 남쪽 월랑에 있는 문인 광정문을 협문이라 하는 것이다. 이 영역의 주된 문은 동쪽에 놓인 명정문이며, 광정문과 마주 보는 또 하나의 협문은 북쪽의 영청문이다.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대에 복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동물원·식물원·유원지 등을 조성하며 궁궐의 정체성이 말살되고 홍화문·명정문·명정전을 제외한 궁궐 전역이 심하게 훼손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하였다. 이때 명정전 뜰을 두르고 있는 행각을 비롯하여 광정문도 정비되었지만 원래의 행각으로 조성되지 않고 월랑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광정문이 들어 있는 명정전의 남쪽 행각은 방과 마루, 주방 등의 부속실과 월랑이 혼합되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모두 열린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형태
궁궐을 조성하는 법칙은 정전의 후방에 편전을 배치하고 그 뒤에 침전을 놓았다. 창경궁의 정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나 편전에 해당하는 전각인 문정전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 정전과 편전의 영역 간에 축이 명쾌하지 않고 공간이 복잡하다. 정전 뜰로부터 광정문을 통과하여 나오면 문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천랑과 승화문, 문정문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광정문은 행각 사이에 평문으로 조성되었다. 구조적으로는 일각문에 주칠을 한 2짝의 판장문을 달았고, 문의 위쪽에는 안상의 문양대로 구멍을 낸 풍혈을 갖춘 궁판 3칸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홍살을 세워 문의 형태를 구성하였다. 거기에 광정문이라는 액호를 각자한, 아름답게 장식된 편액이 걸려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44년(중종 39)에 명정전 마당에서 과거 시험이 있었다. 이날 시험을 보려는 유생의 수가 6천여 명이나 되었다. 과장이던 정전 뜰로 들어가야 하는데 명정문은 열리지 않았고 광정문은 늦게야 열렸다. 시간 안에 과장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밟혀 죽거나 다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중종실록』 39년 9월 10일).
1795년(정조 19)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있는 해였다. 그해 윤달 2월에 화성에서 회갑연을 치렀지만 홍씨의 탄생일은 6월 18일이었다. 때문에 내전인 연희당에서 또 한 번의 연회를 치렀다. 내명부는 연희당의 권역 내에서 연회를 치렀지만 외정의 신하들은 명정전 일곽에서 위계에 따라 영역을 나누어 음식상을 받았다. 여기서 북월랑보다는 남월랑 영역이 위계가 높은 신하들의 자리로 배정된 것을 볼 수 있다(『정조실록』 19년 6월 18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문화재청,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정밀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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