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풍각(觀豐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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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동궐의 후원에 농사짓는 장소를 마련해두고 왕이 친히 나아가 모를 심거나 추수하는 것을 관람하던 집.

개설

궁궐 안 왕가의 생활에는 백성들의 삶을 왕실이 함께하며 힘써 권장해야 할 덕목을 솔선수범해서 보여주려 한 상징적 의례들이 있었다. 왕을 필두로 하여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을 행하였고, 왕비를 필두로 한 내명부에서는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을 실행하였다. 이것은 민심을 살피고, 자신들 스스로 근면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이며 백성들의 모범이 되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었다.

관풍각(觀豐閣)은 왕이 농사의 진행과 풍년을 기원하며 이를 둘러보기 위해, 궁궐 안의 농사짓는 땅에 작은 집을 조성해놓고 관람하던 장소였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하나로 묶어 동궐이라 부르는데, 관풍각은 이 동궐의 후원 동쪽 끝자락에 있었다. 서북쪽으로는 춘당대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초가를 이은 전사(田舍)가 조성되었으며, 관풍각과 지근거리의 동쪽 궁장에는 경모궁으로 거둥하기 위해 설치한 월근문이 있었다.

내농포의 농사 과정과 추수 때 벼 베는 광경을 왕이 친히 임하여 직접 지켜보는 일을 ‘관예(觀刈)’라고 하는데 관풍각은 이를 수행하는 집이었다. 동궐 후원에 속하였고 춘당대와 영화당이 가까이 있어, 내농포의 부속 건물로서만이 아니라 관리들의 인사행정을 하여 면직시키거나 승진시키는 ‘도목정’을 행하고 술을 하사하는 장소로, 또한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로 종종 관풍각과 그 주변 지역을 이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관풍각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일득록」에서 숙종 때 지은 질박한 집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연경재전집』 외집 56권에는 숙종 때 청양문의 왼쪽에 관풍각이 있어 임전을 베풀었는데 여기서 비롯한 집이라고 했다. 그러나 『궁궐지』,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는 1647년(인조 25)에 지어진 집이라 기록하는 등 건립 시기가 서로 달라 언제 처음 조성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관풍각에 관해 1782년(정조 6)에 벼 베는 것을 관람하였다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지만 『승정원일기』 1817년(순조 17) 3월 29일의 기록에는 관풍각과 관혁고(貫革庫)를 개건하는 길일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때 이후로 관풍각을 새로 건설하였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종 때 간행된 『궁궐지』에는 관풍각이 들어 있지 않아 순조와 고종 사이에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

관풍각은 「동궐도」를 비롯한 여러 도상에서 확인된다. 춘당대에서의 각종 행사를 그려놓은 그림 자료들에는 대부분 관풍각이 포함되어 대강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으나, 각각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도 관풍각을 묘사하는 기록이 있는데 “관풍각은 숙종 때에 지어졌으며 구조가 기둥 하나에 지나지 않아 질박하고 볼품이 없지만 그곳에서 당시 장령이던 김호가 글을 올려 온 힘을 다해 간언했고 숙종이 그를 우대하였으니 옛날 대각(臺閣)의 풍모가 이러했다.”라는 내용이다.

도상에서 파악해보면 「동궐도」에 보이는 관풍각의 모습은 내농포를 관통해 흐르는 개울에 정자 형태의 집이 가로질러 놓여 있고 물살이 집의 아래로 흘러간다. 키가 큰 장초석이 돌기둥처럼 각 귀퉁이에 4개 놓여 누마루처럼 집을 들어 올렸고, 벽체 없이 창호로 사방을 둘렀으며, 지붕은 사모 모임지붕이다. 그러나 『어제준천제명첩』에 보이는 관풍각은 아래에 기둥 형태의 장초석을 놓아 집을 들어 올린 형태를 취한 것은 동일하지만 도상에서는 집 아래에 놓인 구조물 때문에 2개의 초석만 보인다. 측면은 1칸, 벽체로 되어 있으나 정면은 가운데에 기둥이 있고 창호가 달린 2칸의 직사각형 집으로 보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동궐도」와 『어제준천제명첩』의 제작 연대가 달라 관풍각이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궁궐 안 내농포에서 이루어지는 농사의 광경을 보는 것은 왕의 의무이자 백성의 삶을 예측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가을이 되면 관풍각에서 추수하는 광경을 관람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에게 거두어들인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 일에 대해 정조는 내농포의 농사를 지어 추수하는 일을 친히 보는 것은 선조들이 해왔던 고사라고 명백히 말하면서 자신이 거행하지 못해 이번에는 관경하려 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 관경이 매년 이루어졌던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날, 추수가 끝나고 왕이 여러 신하에게 내농포에서 벤 벼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 나누어준 쌀을 ‘춘당도’라 불렀다(『정조실록』 1년 9월 3일). 또한 이곳의 경치가 아름다워 「상림십경」, 「규장각 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데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관풍각 춘경」과 「관풍각 추사」가 있다. 또한 관풍각의 상징성 때문에 시험의 시제로도 자주 등장하였고, 추수를 감상하며 관풍각을 소재로 해 왕이 지은 아름다운 어제시가 다수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어제준천제명첩(御製濬川題名帖)』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궁궐지(宮闕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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