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공신회맹제 |
한글표제 | 공신회맹제 |
한자표제 | 功臣會盟祭 |
상위어 | 정치의례(政治儀禮) |
하위어 | 공신연(功臣宴), 삽혈동맹(歃血同盟), 혈맹(血盟), 원훈(元勳), 감훈단자(勘勳單子), 구공신(舊功臣), 신공신(新功臣), 찬만(饌幔), 혈반안(血盤案), 혈반(血盤), 독서문관(讀誓文官) |
동의어 | 회맹제(會盟祭), 삽혈동맹의식(歃血同盟儀式), 혈맹의식(血盟儀式) |
관련어 | 회맹록(會盟錄), 맹단(盟壇), 북단(北壇), 회맹단(會盟壇), 회맹일(會盟日), 사맹(司盟), 정공신(正功臣), 원종공신(原從功臣), 공신적장(功臣嫡長), 녹훈도감(錄勳都監),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 충훈부(忠勳府), 공신교서(功臣敎書), 공신녹권(功臣錄券), 공신초상화(功臣肖像畫), 맹족(盟簇), 맹서문(盟書文),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 공신도감의궤(功臣都監儀軌), 공신호(功臣號) |
분야 | 정치/인사/녹훈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한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시행시기 | 공신 책봉 직후 |
시행장소 | 왕륜동(王輪洞), 경복궁 북단(北壇)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 |
조선시대 공신을 책봉한 후 구리 쟁반의 피를 마시며 맹세하는 의식.
개설
공신회맹제는 공신들 상호 간에 배신하지 않겠다고 천지신명 앞에서 맹서하는 의식으로서, 왕이 공신들을 거느리고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왕세자가 대신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왕이 직접 참여하였다. 공신회맹제를 거행하기 위한 첫 단계는 날짜 및 장소의 결정이었다. 특히 공신회맹제의 날짜는 조선시대의 여타 국가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길일을 골라서 잡았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의 공신회맹제는 중국의 삽혈동맹의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정비되어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의 공신회맹제는 영조대의 분무공신(奮武功臣)을 끝으로 더 이상 시행되지 않음으로써 영조 이후에 공신회맹제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시대 공신회맹제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여러 부서들로부터 협조를 받아 필요한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것은 공신회맹제가 중요한 국가전례로서 공신교서 및 공신초상화 등을 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전례에 관련되는 부서 자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조선시대 국가전례를 거행할 때는 예조를 위시하여 관상감·통례원·봉상시 등 전례 자체와 관련된 부서뿐만 아니라 경비 지출과 관련하여 호조·병조 등의 협조도 받아야 했다. 공신회맹제에는 새로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전의 공신들 그리고 공신들의 적장자들까지도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공신회맹제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공신(新功臣)들을 관장하는 공신도감과 함께 구공신(舊功臣)들을 관장하는 충훈부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공신회맹제의 날짜 결정은 공신도감이 왕에게 요청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즉, 공신회맹제에 필요한 준비가 완료된 후 공신도감이 회맹제의 날짜를 왕에게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왕은 몇 월에 거행하라는 정도만 결정하고 구체적인 날짜는 관상감의 일관(日官)이 길일을 2일 정도 골라 보고하였다. 이 중에서 왕이 최종 날짜를 결정하였다. 그런데 날짜는 길일을 고르기 위하여 복잡한 과정을 거쳤는데 장소는 간단하였다. 이유는 조선시대의 공신회맹제가 거행되는 장소가 경복궁 북쪽의 북단(北壇)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신회맹제는 근본적으로 천지신명 앞에서 공신들이 맹서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공신회맹제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천지신명을 모신 제단을 쌓아야 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회맹단(會盟壇)이었다. 회맹단은 터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에 정사각형의 단을 쌓은 제단이었다. 경복궁 북쪽에 있던 북단이 바로 회맹단이었다. 이 회맹단 위에 천지신명을 상징하는 신주를 모셨다.
조선시대의 회맹단 및 천지신명의 신주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공신회맹제가 중요한 국가전례임에도 불구하고 정규적인 국가전례에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비롯한 국가전례서나 실록에는 회맹제의 규정이 명문화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회맹단과 천지신명의 신주는 『주례(周禮)』의 내용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주요 국가전례가 『주례』를 참조하였으므로 회맹의식 및 그 준비물들도 그에 준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례』에 의하면 맹서의식을 관장하는 사람은 추관(秋官)의 사맹(司盟)이었다. 사맹이 관장하는 회맹의식도 기본적으로 천지신명 앞에서 맹서하는 의식이었다. 즉, 『주례』의 ‘사맹은 무릇 나라에 의심이 있어서 회동하게 되면 맹약의 글 및 그 의례를 관장한다. 북면(北面)하여 명신(明神)에게 아뢴다.’는 내용 중에서, 명신이 바로 천지신명이며 이 명신은 단에 모셨다. 사맹이 관장하는 회맹의 단은 사방 12심(尋), 즉 약 20m인 96척, 높이 약 1m인 4척의 크기였다. 또한 조선시대의 회맹의식에 의하면 회맹단의 앞쪽에는 동쪽 계단과 서쪽 계단 그리고 가운데 계단 등 3개의 계단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북단은 공신회맹이 있을 때에만 사용되었으므로 평상시에는 그냥 빈터로 있었다. 다만 북단은 왕이 참여하여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으므로 평상시에도 사람들의 접근을 금하였다.
조선시대 북단에 모시는 신주는 나무로 만들었다. 『주례』에 의하면 천지신명을 상징하는 신주는 나무로 만든 주사위 모양으로서 사방 4척의 크기였다. 신주의 위아래는 천지를 상징하는 검은색과 황색을 칠하고, 사방에는 방향에 따라 동쪽에는 청색, 서쪽에는 흰색, 남쪽에는 붉은색, 북쪽에는 검은색을 칠하였다. 이 색깔은 천지사방의 상징 색으로서 해당 방향의 신령들을 상징하였다. 이외에 맹서문·공신교서·공신초상화 등도 미리 준비되었다.
맹서문은 회맹제에 참여하는 왕과 공신들이 천지신명 앞에 맹서하는 글이었다. 그러므로 맹서문의 내용은 공신회맹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맹서문은 참여자들을 대표하여 왕이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맹서문 뒤에는 참여자 모두가 자신의 관직명 아래에 직접 서명을 하였다. 조선시대 회맹제의 맹서문은 홍문관에서 지어 올렸다. 이 맹서문에는 왕이 직접 서압(署押)을 하였다. 회맹제 때에 이용되는 맹서문은 회맹제 이후 곧바로 희생물과 함께 땅에 묻었다. 공신들에게는 회맹제가 끝난 후 동일한 필사본을 작성하여 배부하였다. 맹서문은 공신들의 공훈 내용에 더하여 공신들이 서로 협력하여 국가에 충성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공신회맹제를 거행하기 전에 회맹단 및 천지신명의 신주 그리고 맹서문 등이 준비되면 이어서 회맹단 주변에 천막이나 자리 등의 준비물을 미리 설치하였다. 한편 공신회맹제에 참여할 사람들은 7일 전부터 재계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는 4일을 산재(散齋)하고 3일을 치재(致齋)하였다. 회맹일 2일 전에는 전설사에서 회맹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회맹제 중에 대기할 천막 및 제사음식을 보관할 찬만(饌幔)을 설치하였다. 왕세자의 천막은 회맹단의 남쪽에서 동쪽에 가까운 곳에 만들었는데, 서향하도록 하였다. 이에 비하여 공신들의 천막은 회맹단의 동남쪽에 북향하도록 설치하였다. 음식을 보관할 찬만은 회맹단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회맹일 1일 전에는 회맹제 참여자들의 위치에 따라 각각의 자리를 설치하였다. 왕의 자리는 회맹단의 아랫길 동쪽으로 남쪽 가까이 설치하였는데 북향이었다. 공신들의 자리는 회맹단 남쪽에 겹줄로 북향하도록 설치하였다. 이때 서쪽이 상위가 되도록 하였다. 회맹일 1일 전에는 제사의 고기로 사용할 희생물과 혈맹에 사용할 피를 취할 희생물을 회맹단으로 끌고 왔다. 이날 제사의 고기에 쓸 짐승을 잡았다. 제사의 고기로 사용할 희생물은 소·양·돼지인데 재인(宰人)이 잡았다. 피를 취할 희생물은 소·닭·돼지였다. 아울러 희생제물을 묻을 구덩이를 팠는데 회맹단의 북서쪽에 네모 형태로 팠다. 회맹단의 앞 서쪽에는 희생제물의 피를 담을 그릇을 얹어 놓을 혈반안(血盤案)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공신회맹제는 밤 12시가 지난 이후에 거행되었다. 실록에서는 회맹제가 거행된 시각으로 5경 1점, 밤 4경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왕은 3경쯤 궁궐을 출발하여 회맹단이 있는 곳으로 갔다. 따라서 실제 회맹제는 새벽 1시에서 새벽 5시 사이에 거행되었다.
왕이나 공신들이 회맹단에 도착하기 전에 회맹제를 거행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였다. 그것은 천지신명의 신주 및 맹서문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아울러 제물과 제기 등을 배치하는 등의 일이었다. 천지신명의 신주는 제단 위에 남쪽 방향으로 설치하는데 왕골자리를 깔았다. 맹서문은 받침대에 올려서 천지신명의 신주 오른쪽에 설치하였다. 천지신명의 신주 앞에는 향로·향합 및 촛불을 설치하였다. 그 앞에는 하루 전에 도살한 제사용 고기를 담은 그릇들을 설치하였다. 또한 제단 위의 동남쪽 모퉁이에는 북향으로 술통 하나를 설치하였다.
회맹제가 시작되기 3각전, 즉 약 45분 전에 희생물인 소·닭·돼지를 잡아서 모래가 담긴 그릇에 피를 받았다. 피가 담긴 그릇 즉 혈반은 하루 전에 회맹단의 앞 서쪽에 설치한 혈반안의 위에 두었다.
회맹 시작 1각, 즉 15분쯤 전에 행사 진행자들이 먼저 회맹단의 남쪽으로 가서 네 번의 절을 4번 올리고 각자의 자리로 갔다. 이어서 천막에서 대기하던 공신들도 회맹단 앞에 설치한 각자의 자리로 갔다. 행사 진행자는 왕이 머무는 천막으로 가서 밖의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회맹제를 거행할 것을 아뢰었다. 왕은 최고의 예복인 면류관에 구장복(九章服)의 차림을 하고 회맹단 앞으로 갔다.
시각이 되면 곧바로 회맹의식을 거행하는데, 절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진행자의 구령에 따라 왕과 공신들은 회맹단 위 천지신명의 신주를 향하여 4번의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왕은 회맹단의 동쪽 계단 아래에 배치한 세숫대로 가서 손을 씻고 동쪽 계단을 통하여 회맹단 위로 올라갔다. 왕은 회맹단의 동남쪽에 배치한 술통 쪽으로 가서 서쪽의 천지신명의 신주를 향해 섰다.
진행자가 술통에서 술 한 잔을 따라서 받으면 왕은 천지신명의 신주 앞으로 가서 꿇어앉았다. 왕은 진행자의 도움을 받아 천지신명의 신주에 3번 향불을 피워 올렸다. 이어서 술잔을 천지신명의 신주 앞에 올리고 절을 (1번) 올린 후에 다시 회맹단 아래의 자리로 갔다. 진행자의 구령에 따라 왕과 공신들이 모두 꿇어앉으면 희생물의 피를 담은 혈반을 가져왔다. 이어 왕을 필두로 공신들은 차례로 피를 마시는 의식, 즉 삽혈(歃血)의식을 행하였다. 이때 삽혈은 실제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입 주위에 피를 발라 마시는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삽혈을 마치면 독서문관(讀誓文官)이 맹서문을 읽었다. 맹서문을 읽고 나면 왕과 공신들은 천지신명의 신주를 향하여 절을 1번 올렸다. 이어서 왕과 공신들은 마지막으로 천지신명의 신주를 향하여 네 번의 절을 4번 올리고 퇴장하였다.
공신회맹제의 진행자들은 퇴장에 앞서 맹서문을 회맹단 북쪽에 파 놓았던 구덩이에 희생물과 함께 묻었다. 이어서 진행자들도 4번의 절을 하고 퇴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회맹제에 사용된 제물·제기 등을 거두면 공신회맹제는 완전히 끝났다. 모든 의식이 끝나면 왕은 천막을 나와 환궁하였다. 공신회맹제 이후 왕은 다시 날을 정하여 공신들을 만나 잔치를 하였다. 이때 공신들에게 공신교서 및 공신초상화 등을 나누어 주었다. 공신들이 공신교서와 공신초상화까지 받음으로써 공신회맹제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왕과 공신들의 삽혈동맹의식은 민간에도 영향을 끼쳐 일반인들이 비밀결사 또는 공식적인 조직을 만들 때 상호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마치 회맹제처럼 삽혈의식과 맹서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장서각 도서분류 2-2857)
- 신명호,『조선의 공신들』, 가람기획, 2003.
- 신명호, 「조선시대 공신회맹제」,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 집문당, 2003.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