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원절(坤元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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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의 탄신일.

개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황제의 탄신경절(皇帝陛下誕辰慶節)을 건원절(乾元節)로 개칭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황후의 탄신일을 곤원절(坤元節)로 하였다. 곤원절의 날짜는 음력 8월 20일이던 것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9월 19일로 정하여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순정효황후는 1906년(광무 10) 황태자비인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따라서 황태자의 탄신일이었던 천추경절(千秋慶節)의 명칭을 바꾸어 황제의 탄신일인 건원절로 하는 한편, 궁내부(宮內府) 대신(大臣)민병석(閔丙奭)이 황후의 탄신경절의 칭호를 곤원절로 하자고 상주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절차 및 내용

첫 해인 1908년(융희 2) 곤원절의 의식은 건원절에 견주어 소략하게 진행되었다. 황제의 탄신일인 건원절 행사는 황제에 대한 폐현(陛見) 행사와 황제의 덕수궁 문안, 고종의 함녕전(咸寧殿) 사찬과 저녁에 돈덕전(惇德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거리에서는 제등행렬까지 벌이는 등 매우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른 반면, 곤원절 행사는 창덕궁 내에서만 진행되었다. 장례원(掌禮院)에서는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는 폐현도 거행하지 않았으며, 곤원절 진하 행사로는 서명(署名)을 거행한 뒤 정오에 희정당(熙政堂)으로 종친과 총리대신(總理大臣) 이하 문무백관을 초청하여 사찬(賜饌)을 베푸는 것으로 행사를 치렀다. 곤원절 행사의 일환인 희정당 사찬에 참여하는 각부 대신들은 대례복(大禮服)을 착용하여 예를 갖추도록 하였다. 둘째 해인 1909년(융희 3)에는 종친과 문무백관은 인정전(仁政殿) 동행각에서 서명하고 문안하도록 하고 황족 부인과 대관의 부인들을 불러 사찬(賜饌)을 내리도록 하였으나 당시 전염병인 호열자(虎列刺) 즉 콜레라가 유행하여 중지되었다. 이에 이를 대신하여 10월 30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원유회를 베풀기로 계획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저격당하여 죽음으로써 행사가 중지되었다. 따라서 곤원절 행사는 실제로 1회밖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문안 행사와 내연(內宴)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은 일본 유학중이었으므로 곤원절 행사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대신 전보로 경축의 뜻을 나타내었다. 학부(學部)에서는 곤원절을 기념하여 당일을 각급 학교의 휴업일로 제정하였다. 각 학교에서는 곤원절 당일 오전 9시에 돈화문 앞에 모여 대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만세를 외쳐 곤원절을 기념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 『황성신문(皇城新聞)』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