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拷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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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중죄를 범한 자에게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행해진 법률상의 고문. 형추(刑推)·신추(訊推) 또는 고략(拷掠)이라고도 함.

개설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에 피의자에 대한 고신(拷訊)은 법으로 허용이 되었다. 당시 범죄의 처벌에는 피의자의 자백이 필요하였고, 사실 입증의 과학적 수단과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제도적이고 기술적인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고신이 행해졌다. 즉, 『경국대전』에는 중죄(重罪)를 범한 자가 증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자백하지 않는 경우에 신장(訊杖)이라는 매로 고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정치범뿐만 아니라 일반 형사범에 대해서도 중죄인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고신이 허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고신이 합법화되었다 하더라도 고신의 대상과 방법, 고신에 사용하는 신장(訊杖)의 규격과 절차 등에 일정한 규정과 제한이 있었다. 먼저, 조선에서는 『대명률』에서 규정한 신장의 규격, 타격 방법과 차이가 있었다.

『대명률』에 규정된 신장은 태장(笞杖)과 같이 회초리 모양이며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의하면 조선의 신장은 손잡이 부분은 둥글고, 타격 부분은 넓적하게 만들었다. 조선에서 신장을 사용하는 방법은 죄수의 무릎 아랫부분 중에서 정강이(膁肕)를 제외한 뒷부분과 옆부분을 치도록 하였으며, 1차에 30대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데 때로는 ‘동틀’이라는 형틀 의자에 앉혀놓고 피의자의 두 다리를 의자에 고정시킨 후 정강이 부위를 치기도 하였다.

한편 『대명률』에서는 신장의 재료로 ‘형장(荊杖)’을 들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696년(숙종 22) 국왕의 전교를 통해 볼 때 버드나무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장의 종류도 일반신장(一般訊杖)과 추국신장(推鞫訊杖), 삼성신장(三省訊杖)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이중 추국신장과 삼성신장은 역모와 강상에 관계되는 옥사 때 의금부에서 사용하는 신장을 말한다. 신장의 길이는 세 가지 모두 3척 5촌(109㎝)이다. 이 가운데 일반신장은 손잡이의 길이 1척 5촌(47㎝)·지름(圓徑) 7분(2.18㎝)이며, 타격부의 길이 2척(62㎝)·너비 8분(2.49㎝)·두께 2분(0.62㎝)이다. 추국신장은 타격부의 너비 9분(2.80㎝)·두께 4분(1.24㎝), 삼성신장은 타격부의 너비 8분(2.49㎝)·두께 3분(0.93㎝)으로 일반신장보다 타격부가 조금 두껍다. 신장의 규격과 집행 방법을 볼 때 전체적으로 중국과 비교해서 고신의 강도가 다소 엄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고신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왕실과 혈연상, 의리상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팔의(八議)에 해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70세 이상 15세 이하의 노약자와 폐질자는 고신에 적합하지 않거나 고신을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고신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울러 잉태한 부녀자에게도 고신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명률』에는 잉태한 부녀의 경우 고신을 출산 후 100일까지 연기하도록 하였는데, 『속대전』에서는 고신을 면제하고 속전(贖錢)을 거둔다고 규정하였다. 『속대전』에는 신장(訊杖) 30대에 대한 속전(贖錢)은 장일백(杖一百)에 준하여 면포(綿布) 2필[대전문(代錢文) 7량(兩)]을 징수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고신을 행할 수 있는 주체는 원칙적으로 중앙의 형조, 지방의 관찰사였으며, 이들은 고신의 실행 여부에 대한 지휘, 감독을 행했다. 따라서 태형(笞刑)만을 직단(直斷)할 수 있는 지방 수령은 피의자에게 마음대로 신장으로 고문할 수 없었으며, 수령이 고신을 해야 할 경우는 반드시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야 집행할 수 있었다.

또한 국왕은 법 집행의 최고 책임자로서 최종적인 지휘·통제권을 행사하였으며, 일정한 경우에는 고신을 행하기 전에 사전에 왕의 재가를 얻어야 할 때가 있었다. 특히 지방의 문무관(文武官)·내시부(內侍府)·사족부녀(士族婦女)·승인(僧人) 등은 고신할 때 관찰사가 반드시 국왕에 계문하도록 하였으며, 공신(功臣)·의친(議親)의 경우에는 국왕에 계문할 때 공신·의친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기록하여야 하는 등 양반 관리를 비롯한 일부의 경우 고신을 가능한 면제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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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신장을 이용한 고신 외에도 중앙 조정에서는 역모 사건 등이 발생할 경우 법외적, 혹은 불법적 고문을 행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사기 조각이나 자갈을 널 위에 깔고 죄인의 무릎을 꿇게 한 뒤 자갈을 다지고, 그 위에 널을 올려놓고 무릎을 짓밟는 고문인 압슬형(壓膝刑), 숯불에 달군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낙형(烙刑), 양쪽 엄지발가락을 한데 묶어 모아놓고 발바닥을 치는 난장형(亂杖刑), 붉은 몽둥이로 몸을 찌르는 주장당문(朱杖撞問) 등이 그 한 예이다. 이들 가혹한 고문은 영조 때 대부분 금지되었다.

한편, 고신 제도는 한말까지 계속 그 합법성을 유지하다가 1906년의 『형법대전(刑法大全)』에 의하여 고신 도구의 규격 및 타격처의 개정이 있었다. 『형법대전』 제 100조에 의하면, 고신 도구는 과거의 신장 대신에 추(箠: 작은 회초리)와 혁편(革鞭: 가죽으로 된 회초리)으로 바꾸고, 타격처도 추를 사용할 때는 엉덩이를 가격하고 혁편을 사용할 때는 정강이를 가격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1907년(광무 11) 6월 27일 법률 제2호로 공포된 ‘신문형(訊問刑)에 관(關) 건(件)’에 의해서 일체의 고신이 불법화되었다. 그 후 1908년(융희 2) 법률 제19호로써 『형법대전』이 두 번째로 대폭 개정되었을 때 고신에 대한 근거 규정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의의

현재 고문은 법률상 불법이지만, 불법적인 고문은 아직도 계속 행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신은 조선시대 합법적인 형사 재판 절차의 하나로서 고신에 대한 규정은 당시 형사 절차 법규의 성격과 법률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흠휼전칙(欽恤典則)』
  • 서일교, 『朝鮮王朝 刑事制度의 硏究』, 韓國法令編纂會, 1968.
  • 조지만, 『조선시대의 형사법-대명률과 국전』, 景仁文化社, 2007.
  • 심재우, 「정조대 『欽恤典則』의 반포와 刑具 정비」, 『奎章閣』22, 1999.
  • 심재우, 「조선후기 형벌제도의 변화와 국가권력」, 『國史館論叢』102, 2003.
  • 심희기, 「朝鮮時代의 拷訊」, 『社會科學硏究』5-1,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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