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궁(慶壽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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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정조 4) 정조의 후궁으로 책봉된 화빈윤씨(和嬪尹氏)의 궁가(宮家).

개설

화빈윤씨는 윤창윤(尹昌胤)의 딸로 1780년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가례를 올리고 후궁에 책봉되었으며 궁호를 경수(慶壽)라고 했다. 경수궁은 화빈윤씨를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경수궁에 소속된 궁방전(宮房田) 및 재산을 관리하고, 화빈윤씨 사후에 제사를 맡아 거행하던 궁가를 의미한다. 경수궁의 토지들은 다른 궁가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면세지였으며, 왕실의 내탕(內帑)을 담당하기도 하여 자체적인 경제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순조실록』 26년 7월 5일). 조선후기에는 전기와 달리 왕자를 낳지 않은 후궁에게도 궁가를 하사하여 왕이 승하한 후에 나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후궁들 사후에는 해당 궁가에서 후궁들의 제사도 담당하였다. 따라서 자체적인 경제력을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특히 영조가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과 능묘인 소령원(昭寧園)을 왕비급으로 격상시키면서 후궁의 지위를 높인 것에서 후궁의 궁가가 확대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것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08년(융희 2) 대한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던 통감부 시기에 경수궁도 다른 사묘나 궁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제사의 개선과 정비라는 미명하에 폐궁시킨 이후 신위를 매안(埋安)하고 국유로 이속하였다.

위치 및 용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향동경수궁(鄕洞慶壽宮)』 도형(圖形)에 따르면, 화빈윤씨의 궁가였던 경수궁은 창덕궁 앞쪽 향동에 위치했다.

형태

경수궁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향동경수궁』 도면을 통하여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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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서향하고 있는 경수궁은 중심 생활 영역을 6칸 이상의 대청과 침실로 구성하였다. 침실에 연이어 이를 보조해 주는 반빗간과 내고들이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며 폐쇄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또 대청과 침실 앞쪽으로도 궁궐 행각과 유사한 공간들로 폐쇄되어 있다.

남동쪽으로는 연못을 파고 주변에 화계(花階)를 꾸몄으며, 궁방의 업무를 담당하는 서제소(書題所)를 설치하였다. 궁방 재정의 기반이 되는 쌀과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많은 곳간이 담장의 외곽을 두르며 배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 정정남, 「조선후기 궁가의 공간구성 및 배치」, 『2009년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9.
  • 조영준,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제31권 제3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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