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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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성도서관 |
한글표제 | 경성도서관 |
한자표제 | 京城圖書館 |
상위어 | 도서관(圖書館) |
동의어 | 경성문고(京城文庫), 종로도서관(鐘路圖書館), 취운정도서관(翠雲亭圖書館) |
관련어 | 김윤식(金允植), 민영휘(閔泳徽), 야마구치 세이[山口精], 윤익선(尹益善), 이범승(李範昇) |
분야 | 문화/예술/건축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일제강점기 |
왕대 | 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종실록부록』 4년 7월 5일, 『순종실록부록』 4년 7월 13일 |
1908년에 설립한 경성문고(京城文庫)를 모체로 탄생하여 1926년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이 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서울시립 종로도서관으로 이어진 도서관.
개설
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은 일본인상업회의소 서기장 야마구치 세이[山口精]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도서관으로 1908년 9월 ‘경성문고’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다. 경성문고는 서울 수정(壽町)에 있던 일본인상업회의소 내에 설립되었는데, 1909년 2월 개관하여 일반에 무료로 공개되었다. 이용객이 늘어나면서 서고와 열람실이 좁아져 1911년 8월 남미창정(南米倉町: 현 남창동)으로 이전·신축하여 ‘경성도서관’으로 개칭하였다. 야마구치의 경성도서관은 1919년 경영난으로 폐관했는데, 그때까지 야마구치 개인의 사재로 운영된 사립도서관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최대 규모였다.
내용 및 특징
경성도서관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한국 도서관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도서관은 창립 당초부터 참고도서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구치 자신도 『경성도서관개황(京城圖書館槪況)』에서 “산업 및 상공업 조사의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창설했다.”고 서술하였다. 실제로 야마구치 세이는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의 저자이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 한국의 농업·상업·공업·산림·광업·어업·통화·금융·교통·운수에 관한 각지의 사정을 조사하여 실은 것인데, 상·중·하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 야마구치 세이는 1911년 7월 5일에 이 책 10부를 경성도서관 이름으로 순종황제에게 바쳤다(『순종실록부록』 4년 7월 5일). 이에 대해 순종황제는 7월 13일 경성도서관에 기부금 150원을 하사하였다(『순종실록부록』 4년 7월 13일).
둘째, 실제의 도서관 활동도 상당히 활발했다. 『경성도서관개황』의 1915년도 통계에 의하면, 개관 일수는 연 303일, 입관자 수 5,420인, 열람 책 수 2만 637책에 달했다. 이용자 중 8할이 일본인, 2할이 한국인이었다. 또한 이 도서관은 1912년에 『경성도서관도서월보』라는 홍보지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최초의 도서관보이기도 했다.
셋째, 이 도서관은 당시 최대의 장서 수를 보유하였고, 장서 내용도 충실했다. 1919년 폐관 당시, 장서 수가 1만 6,000권에 달하였고, 참고 도서류, 관청 자료 등 비시판(非市販) 자료를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그 장서의 대부분이 1921년 봄에 김윤식(金允植)·윤익선(尹益善)·윤양구(尹亮求) 등에 의해 설립된 경성도서관, 즉 취운정도서관(翠雲亭圖書館)으로 계승되었다. 취운정도서관에 대한 일반의 기부금은 1921년 2월 당시 약 5,300원에 달했고, 각계에서의 도서 기증도 계속되었다. 1921년 2월 조선도서주식회사도 경성도서관에 자사 발행 도서 300권을 기부하였다. 당시 장서 수는 약 3만 5,000권에 달했다고 한다. 부인독서실을 따로 설치했으며 종람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그 장서의 일부가 현재 서울특별시립 종로도서관 장서로 승계되었다.
변천
1922년 1월 6일에는 교토[京都]제국대학을 졸업한 이범승(李範昇)이 탑골공원 뒤에 있는 전 양악대(洋樂隊) 자리에 경성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개관에 앞서 1921년 9월 10일에는 신문잡지 종람소(縱覽所)를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40여 종의 신문과 150종의 잡지를 비치했다. 매일 수백 명의 관람자가 이용하여 9월 10일 개관 이후 12월 초까지 그 수가 총 9,000여 명에 달했다. 이범승은 1921년 봄에 개관한 취운정도서관을 인수하여 경성도서관 분실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한문 서적을 주로 비치했다. 본관에는 신간 서적으로만 5,000여 권을 비치했다. 1922년 1월 6일 개관 당일에는 무료입장이었으나 1월 7일부터는 입관료로 1인당 2전을 받았다. 한달 표는 40전이었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부터 오후 5시까지였다. 1922년부터 야간개관도 계획하였으며, 경성도서관 주최로 시민 강좌나 전문 학술 강연, 그리고 순회문고 제도도 실시할 예정이었다. 1923년 4월 1일부터는 개관 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로 변경되었고, 수요일은 정기 휴관일로 지정하였다.
1922년 6월 24일 휘문고등학교 총장 민영휘(閔泳徽)가 기부한 1만 원과 관민의 기부금을 받아 이해 겨울부터 신관 건축에 착수하여 1923년 7월 28일 낙성식을 가졌다.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신관은 건평 130여 평으로 1층 오른쪽에는 백여 종의 신문 잡지를 갖추어놓은 신문실(新聞室)이 있었고, 왼쪽에는 9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열람실이 있었다. 1층과 3층의 일부, 그리고 2층 전부는 7,200권의 신간서와 2,300권의 고서적을 보기 쉽게 진열해놓았다. 그 밖에 특별실과 사무실이 있었다. 구관은 아동관으로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경성도서관은 연 9,000원에서 1만여 원에 달하는 유지 경비와 그동안 도서관 운영을 위해 은행에서 차입한 부채 3만 원을 감당하지 못하여 1924년 10월 1일부터 수차례에 걸쳐 무기 휴관에 들어갔다. 일시적으로 건축비와 도서구입비를 지원했던 민영휘가 유지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에 경성부에서 매입하여 부영도서관으로 운영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1925년 2월부터 일시적으로 경성부의 보조로 개관하기도 했다. 결국 1926년 3월 25일에 경성부에 양도되어 4월 1일부터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이 되었다. 후임 관장으로는 이범승의 친척인 이긍종(李肯鍾)이 부임하였고, 직원들이 한국인들만으로 이루어져 민족 도서관으로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945년 9월 18일에는 서울시립 종로도서관이 되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1921년 2월 25일자; 1921년 3월 1일자; 1921년 12월 6일자; 1921년 12월 12일자;1921년 12월 31일자; 1922년 1월 7일자; 1922년 1월 17일자; 1922년 3월 17일자; 1922년 6월 26일자;1922년 12월 31일자; 1923년 4월 1일자;1923년 6월 11일자;1923년 7월 29일자;1924년 1월 27일자;1924년 4월 7일자;1924년 10월 1일자; 1925년 1월 30일자;1925년 3월 19일자;1926년 4월 24일자
- 山口精, 『朝鮮産業誌』 上·中·下卷, 寶文館, 1910-1911(복간 民俗苑, 1992).
- 山口精, 『京城圖書館槪況』, 京城圖書館, 1916.
- 宇治鄕毅, 「近代韓國公共圖書館史の硏究ー開花期から1920年代までー」, 『參考書誌硏究』 第30號, 1985.
- 서울시립 종로도서관 홈페이지, http://jnlib.sen.go.kr
- “이긍종(李肯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