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이(檄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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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성토하는 내용의 군용 문서.

개설

격이(檄移)는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가 주(周)나라 천자의 윤허 없이 군사를 내면서, 자기 위신을 높이고 적을 성토하기 위해 사용했다. 본래 격(檄)과 이(移)는 모두 군용 문서인데, ‘격’은 적에게 보내는 글이고 ‘이’는 내부의 신민에게 보이는 글이다. 중국 양(梁)나라의 문학가 유협의 문학평론서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격과 이를 함께 거론하면서 한 단어로 쓰이게 되었다. 한편 『문심조룡』「격이」에는 "격이란 교(皦)이다."라고 되어 있다. 격, 즉 격문은 원래 목판에 써서 선포하기 때문에, 명백히 한다는 뜻의 ‘교’라고 풀이한 듯하다.

내용 및 특징

격문은 노포(露布)라고도 하는데, ‘덮개를 씌우지 않아서 금방 알게 한다’는 뜻이다. 1척 2촌 크기의 목판 위에 닭의 깃을 꽂아 긴급함을 표시했으므로 우격(羽檄)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이전의 격문은 대개 여러 꾸밈말이 있는 사륙문(四六文)을 사용하지 않아, 표현이 직접적이고 의미가 분명했다. 원소(袁紹)가 조조를 토벌하려 할 때 진림(陳琳)이 그를 위해 지은 격문인 「위원소격예주문(爲袁紹檄豫州文)」은 문장이 강건하고 힘이 있다. 당나라 이후의 격문은 정해진 형식에서 벗어나는 변체(變體)가 많이 사용되었다. 서경업(徐敬業)이 측천무후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낙빈왕(駱賓王)이 그를 위해 지은 「위서경업토무조격(爲徐敬業討武曌檄)」은 격문의 명편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격이체 산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다. 이것은 당나라 중엽 이후 변려문으로 지어진 격문으로, 문체가 유려하고 전고(典故) 사용이 많다. 「토황소격문」을 두고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만일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이 정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如非泣鬼驚風之手 何能至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왜에게 격문을 보내는 문제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자주 의논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내용이 종종 언급되었다(『선조실록』 26년 2월 11일).

흔히 홍경래의 난이라고 불리는 1812년(순조 12)의 평안도 농민 봉기에서는 홍경래 측이 한문과 한글로 각각 격문을 선포하였다. 이 격문은 점령 지역 내 군수 등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한글로 된 격문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한문으로 된 격문만 남아 있는데, 사료에 따라 글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이나 구성은 거의 같다. 한문 격문에는 기의군(起義軍)이 점령한 곳을 다스리던 지방관의 죄악을 폭로하는 현록(懸錄)이 붙어 있다.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개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