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교직(檢校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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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에 작호(爵號)만 있고 직무상의 일은 없던 벼슬인 훈관(勳官).

개설

훈관으로서의 검교직(檢校職)은 고려초에 관직 체계를 정비하여 관인층을 편제하면서 채용되었다. 고려후기에는 관제가 문란하자 서반(西班)에까지 확대하여 검교직을 함부로 주었다. 여말선초에는 내시부(內侍府)로 확대되었다. 조선초, 맡은 일이 있는 관원에게만 녹(祿)을 주어 재정 수요를 줄이는 과정에서 검교직은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고유한 맡은 일[職事]은 없었다.

변천

1) 훈관의 성립

우리나라의 검교직은 당(唐)나라에서 신라 왕을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책봉한 데서 비롯하였다. 이후 고려초까지 여러 왕이 중국 왕조로부터 훈관을 제수받았다.

고려초에 관제를 정비하면서 훈관으로서 검교직이 성립하였다. 고려는 관인층을 관직으로 편제하였는데, 실직(實職)정직(正職)과 함께 산직(散職)인 검교직·동정직(同正職)이 하나의 틀로 짜였다. 관직으로 관인층을 편제하면서 6품 이상의 관인을 모두 실직에 제수할 수 없게 되자, 훈관으로서 검교직을 마련하여 7품 이하의 동정직과 함께 산직 체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2) 확대 시행과 변화

검교직은 고려중기에 문벌이 발달하며 관인층의 규모가 확대하자 성행하였다. 무신 집권기를 거쳐 원 간섭기에는 관제가 문란하면서도 관직으로 관인층을 편제하는 틀은 유지되어 검교직은 더욱 무분별하게 제수되었다. 그리하여 중국과는 달리 검교직이 서반에까지 확대되었고, 그 규모가 더욱 크게 늘어났다. 여말선초에는 내시부에 검교가 100명이 넘을 정도였다.

고려후기에는 향리나 백성이 역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검교직을 이용하였고, 향리 등이 검교직을 받은 것으로 사칭(詐稱)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3) 조선초의 폐지

검교직은 조선초에 녹봉의 재정 수요를 줄이려는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고려후기에 관인층 내지 지배층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면서 이들을 관직으로 모두 편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초에는 점차 산계(散階)가 지배층을 편제하는 기준이 되어갔다.

개국 초의 불안정한 정국에서는 공신을 예우하는 검교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관제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재정의 곤란을 명분으로, 맡은 일 없이 녹을 받는 검교직을 없애게 되었다. 그리하여 1416년(태종 16)에 동·서반 유록검교직(有祿檢校職)을 폐지하고, 1443년(세종 25)에는 내시부의 검교직을 폐지하였다.

왕위를 빼앗은 세조가 공신을 예우하기 위해 검교직을 다시 두기도 하였으나, 세조 말에 공신 예우가 봉조하(奉朝賀)로 바뀌면서 검교직은 다시 폐지되었다.

조선후기인 1781년(정조 5) 2월에 규장각을 확대 개편하면서 겸직으로 검교직을 두었다. 전·현직 관원으로 임명하였으며, 본직과 함께 검교직을 겸하면서 실직 관원들과 마찬가지로 입직하거나 어진의 관리 등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김동수, 「조선초기의 검교직」, 『진단학보』 51, 1981.
  • 한우근, 「훈관 「검교」고(考): 그 연원에서 기론하여 선초 정비과정에 미침」, 『진단학보』 29·30, 1966.
  • 한우근, 「조선초기 이후의 검직과 영직: 「훈관 검교고」보유」, 『진단학보』 71·72,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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