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開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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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 내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행된 수리(水利) 공사를 일컫는 말.

개설

개천(開川)은 한양 도성 주변의 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시가를 지나면서 생활하수와 같이 도성 외부로 잘 빠져나가게 하는 배수 기능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천은 하천의 물이 잘 빠지게 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도성의 중앙을 가로지르던 청계천이 주요 개천 대상이었다.

내용 및 특징

영조대에 준천(濬川)을 시행하기 전까지는 한성부와 공조에서 개천을 담당하였다. 한성부와 공조는 도성 내의 모든 도로와 교량의 수치 및 정비를 담당하였는데, 천변에 거주하는 방민들에게 개천을 유지하고 감시하게 하였다. 도성 내 천변의 방민들은 조선초기부터 부역으로 개천을 담당하였다. 한성부 오부(五部)의 구획에 따라 천변의 방민들을 동원하였으며, 숙종대인 1710년(숙종 36)까지 한성부 오부에 명령을 내려 관원들이 방민들을 동원해서 개천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36년 9월 5일).

개천을 유지하기 위해 1760년(영조 36)에 시행한 이른바 경진년 준천에서는 하천의 양안(兩岸)에 석축을 수축하고 버드나무를 식목하였다. 양안의 석축은 1773년(영조 49)부터 본격적으로 거행하였다. 영조는 광통교(廣通橋)와 수표교(水標橋)에 행행하여 작업의 진행을 파악하였다(『영조실록』 49년 6월 10일) (『영조실록』 49년 8월 6일). 석축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문에서 구역을 나누어 거행하였다.

영조대에 이르러 개천 작업에 투입할 인력 동원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선 정부가 인민에게 부과하던 부역은 후기로 갈수록 임금 노동으로 바뀌었다.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의 노동 의지가 임금 노동보다 불성실하고 일의 성공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또한 천변의 방민이 담당한 개천은 일정한 구역의 사람들이 담당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하천 전체의 배수가 한계 상황이었다. 하천이 막혀서 하상이 높아지고 호우가 내리면 천변 가옥과 도로까지 침수되는 실정이었다(『영조실록』 29년 9월 15일). 영조대의 준천 결과 일시적으로 도성 내 개천은 유지되었으나 지속적인 준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777년(정조 1)에 재차 준천을 하게 된 것은 영조대의 준천이 무위로 돌아가고 하천이 다시 막혔기 때문이다. 영조가 준천을 마친 뒤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고 세운 비각(碑刻)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토사가 쌓였다(『정조실록』 1년 7월 12일). 도성의 인구가 늘어나고 난방과 취사를 위한 땔나무의 채취가 주변 산을 헐벗게 했고, 그 결과 산의 토사가 하천으로 대량 흘러내려서 천거(川渠)가 막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매년 지속적으로 준천을 하지 않으면 개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순조대에는 고립군(雇立軍)이라는 고용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준천을 하였다. 대한제국기에는 내부 관할의 한성부에서 전담하였고(『고종실록』 31년 9월 9일),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에서 개천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경도잡지(京都雜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한경지략(漢京識略)』
  • 서울학연구소,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 신병주, 『영조 때의 청계천 공사와 그 기록들-준천사실과 준천시사열무도』, 책과함께, 2007.
  • 염정섭, 「조선후기 한성부(漢城府) 준천(濬川)의 시행」, 『서울학연구』11, 1998.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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