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유수부(江都留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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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수도 방어 체제를 갖추고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광주·수원과 함께 강화도에 설치했던 관서.

개설

유수부 제도는 당·송대 이래 수도의 기능을 강화하고 군사 방어 체제를 갖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이 제도를 원용해 유수부를 옛 도읍에 설치했다. 먼저 고려에서는 옛 도읍지인 서경·동경·남경 등지에 유수부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전조의 도읍지였던 개성과 태조의 어향(御鄕)이었던 전주에 유수부를 설치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설치의 목적이 수도 방어 체제에 집중되면서 강화와 광주 그리고 수원에 유수부를 설치하게 되었고 이곳들은 군사 행정이 주임무로 부여되었다.

설립경위 및 목적

당(唐)대에는 수도가 위치한 주(州)에 중심지인 부도(部都)를 설치하고, 그 주를 부(府)로 승격시켰다. 부도를 설치한 곳 중에 더욱 중요한 곳은 부경(部京)이라 칭했고 부경의 장관이었던 지부(知府)는 유수사(留守使)의 관직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후 송대에는 국왕을 위해 부경의 지부가 유수사(留守事)를 총괄하도록 조치했다. 아울러 송대에는 수도의 행정적 능력을 강화시키면서 유수부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다.

조선 역시 건국 후 당송과 같이 왕도의 부도로서 유수제를 마련했다. 최초의 대상 지역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태조이성계의 어향이었던 전주였다. 건국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이나 수도 방위의 목적보다는 행정적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수도 방어라는 목적이 보다 부각되면서 군사적 행정 능력을 강화해서 유수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따라서 강화를 비롯해 개성·수원·광주 등 소위 ‘사도(四都)’를 설치하고 운영했다.

강도는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현(江華縣)으로 옮겼을 때 부여된 명칭이다. 이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조직 및 역할

유수부의 조직은 행정 조직과 군사 조직의 이원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 설치 당시에는 유후사의 조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1438년(세종 20)에 유수제가 완성되면서 유수와 부유수 등으로 책임자의 명칭을 변경했다. 세조대 유수제가 잠시 폐지되었으나 예종대 다시 회복하면서 유수, 부유수와 함께 종4품의 경력(經歷), 종5품의 도사(都事)를 각각 1인씩 두었다. 아울러 부 소속 백성의 교육과 향촌의 교화를 위하여 교수(敎授) 1인을 두었다. 그리고 이 밑에 경아전(京衙前)으로 서리(胥吏) 40인을 배속시켰다.

유수부의 현실적 군사·행정 기능이 강화되었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은 뒤였다. 양란을 통해 큰 피해를 경험했던 조선은 군사력 약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행정력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결과가 바로 비변사의 기능 강화와 군사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조선은 도성 방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부도 경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첫 번째 후보지가 된 것이 강화도였다. 강화도는 서울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좁은 해협을 끼고 있어 천연의 요새를 이루는 곳이었다. 더욱이 수로를 통해 서울로 직접 통할 수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변천

강화의 유수부 승격이 제안된 것은 광해군대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 비변사에서 결정하도록 지시했다(『광해군일기』 10년 6월 8일). 다음 해 우의정조정(趙挺)은 강화도가 군사 요새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지역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유수제 실시를 주장했지만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광해군일기』 11년 7월 3일).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한 이후 강화를 맺고 환도하기 직전에 행재소였던 이곳을 유수부로 승격시켰다(『인조실록』 5년 4월 2일). 강화의 유수부 승격에 따라 갑곶[甲串]에 창고를 짓고 읍성 서쪽에 화약고를 설치했으며, 남문 밖에 훈련청(訓練廳)을 건립했다(『인조실록』 5년 8월 18일).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성이 함락되고 피난하고 있던 세자와 빈궁 등이 포로로 잡히게 된 사건을 계기로 우의정이성구(李聖求)의 건의에 따라 강화유수를 부사로 강등시켰다(『인조실록』 15년 2월 17일). 그러다 효종대를 전후하여 군비 강화 문제가 크게 제기되자 다시 유수부로 승격하여 운영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배우성, 「正祖의 留守府 경영과 華城 인식」, 『韓國史硏究』 127, 한국사연구회, 2004.
  • 이존희, 「朝鮮王朝의 留守府 經營」, 『韓國史硏究』 47, 한국사연구회, 1984.
  • 조낙영, 「19세기 강화 유수부의 재정 운영」, 『조선후기~대한제국기 인천지역 재정사 연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