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번(匣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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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자기를 제작하기 위해 그릇을 갑발(匣鉢)에 넣고 번조하는 것.

개설

조선시대에는 진상 자기, 왕실 자기 등 특별한 용도로 제작된 갑기(匣器)들이 있었다. 관요 분원에서는 이러한 자기들을 여러 형식과 의미, 성격 등에 따라 갑번(匣燔), 예번(例燔), 별번(別燔)으로 구분하여 제작하였다. 특히 궁중에서 가례, 사신의 접대 등과 같은 주요 왕실 행사가 있을 때에는 특별한 백자를 번조하기 위해 이러한 번조법을 활용하였다. 기록상으로는 왕실에서 사용할 어용자기(御用磁器)들이 언젠가부터 사번(私燔)으로 행해져 그 폐단을 막고자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사사로운 갑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후기로 접어들어서는 갑번을 통해 고급 백자들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이 무렵에는 관료와 종친 이외에 하층민들까지 반상기 일체를 갑기로 사용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정조는 사치스러운 사회 풍조를 근절하고자 엄한 금령을 내려 일시적으로 갑번을 금지시켰다.

내용 및 특징

갑번은 갑발을 사용하므로 일반 백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 좋은 백자인 갑기를 다양하게 제작할 수 있다. 갑번 자기는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이른바 사치품으로 인식되었다. 대부분이 왕실과 관료, 상류층이 사용했지만 관료와 종친들이 진상용을 빙자하여 사번을 행함에 따라 이들 수요처 외에 여러 계층으로 확산되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칙령을 내려 사사로운 용도로 많은 양의 갑기를 사기장들에게 제작하도록 한 것은 갑기 제작량과 수요량이 줄어들지 못한 근본 원인이었다.

변천

갑번은 이미 고려시대에 청자를 번조할 때부터 채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요 분원에서 고급 백자들을 번조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관요 분원에서 최상급 백자를 번조하기 위해 갑번을 보편화하였다. 갑번은 고급 자기를 일컫는 갑기를 굽기 위한 소성법이다. 이 때문에 갑번에서 구워진 그릇 일체를 갑기 혹은 갑번기(匣燔器)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갑기, 갑발, 갑번 등의 용어가 동시에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승정원일기』 숙종 3년 11월 21일의 기록에는 사헌부에서 어용 자기인 갑번 자기를 사번한 사옹원 제조 화창군(花昌君)이연(李沇)을 파직하도록 청한 내용이 있다. 이후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사로이 갑번이 늘어나자 급기야 정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폐단을 근절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정조는 갑번 자기를 사치품으로 지정하여 제작을 중지시키고 국가적으로 검소함을 실천하였다(『정조실록』 17년 11월 27일). 당시 갑기 사용이 중단되어 일시적으로나마 백자 가격이 하락하고 문양 장식이 단조로운 백자들이 제작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종친과 관료들의 지속적인 구매 욕구가 이어져 갑번 자기는 다시 제작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김영원, 『朝鮮前期 陶磁의 硏究―分院의 設置를 中心으로』, 학연문화사, 1995.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방병선, 『조선 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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