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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태실에 비석이 세 기(基)인 것이 특징이다. 안태비는 명종이 태어난 직후 세워진 것이며, 명종 즉위 후 세운 가봉비가 풍화로 인해 부식되자 1711년(숙종 37) 새로이 비석을 마련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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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 때 비석을 마련하는 과정은 《승정원일기》에 자세하다. 이 때 비석만 새로 새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석물도 수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선조 태실과 현종 태실도 함께 개수(改修)하였는데 예조 당상과 낭청 각 1인과 감역관을 파견해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비석의 글씨는 승문원 관원을 차출하여 보냈다. 이 때 감역으로 참여했던 오수현(吳遂顯)은 태실 수개가 끝난 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승륙(陞六)이 이루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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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종 태실은 지난 2018년 보물 제1976호로 지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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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乙亥瑞山奸民欲害其宰, 打破明宗胎封石欄。|출처=『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 宣祖乙亥瑞山奸民欲害其宰, 打破明宗胎封石欄。|출처=『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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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산록(湖山錄)』<ref>1619년(광해군 11)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충청도 서산군(현재의 서산시) 읍지. 2권 2책. 필사본. 개인소장. 고경명(高敬命)이 서산군수로 부임하여 편찬하게 하여 뒤에 완성된 사찬읍지(私撰邑誌)로서 충청도 지역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지방 사회의 모습을 충실히 전해 주는 읍지로서 의의가 크다. 17세기 초 지방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정치 질서의 문란, 향촌의 미풍양속(鄕風)의 붕괴와 좌목(座目) 다툼 등 향촌 사회의 동요, 소금굽기·목장·해상물의 진상 등에서 심각하게 나타났던 관리들의 민폐, 국방의 허술함 등을 지방 사족(士族)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였다.</ref>「산천(山川)」==== | ||
+ | {{Blockquote| 태봉은 문수사(文殊寺) 좌쪽 어깨 편에 있으니 명종대왕(明宗大王)의 태를 묻은 곳이다. 봉우리 위에다 또 태사(胎寺) 세 칸(三間)을 지었으며 봉우리 아래에는 태지기(胎直) 10여 호가 살면서 벌목도 금지하고 산불도 금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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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胎峰在文殊寺在肩, 明宗大王胎入藏, 峰頂又作胎寺三間, 峰之下胎直十餘家, 禁伐禁火。|출처=『호산록(湖山錄)』「산천(山川)」}} |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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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Myeongjong_Dagunbi_side.JPG|서산 태봉산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 후면 | File:OGPC_Myeongjong_Dagunbi_side.JPG|서산 태봉산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 후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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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 ||
+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명종대왕 태실 및 비 정밀실측 및 심화연구』, 서산시, 2015. | ||
3.논문 | 3.논문 |
2022년 1월 4일 (화) 14:36 기준 최신판
명종 태실(明宗 胎室) | |
식별자 | PC011 |
---|---|
분류 | 국왕 태실 |
한글명 | 명종 태실 |
한자명 | 明宗 胎室 |
영문명 | Placenta Chamber of King Myeongjong |
피안자 명칭 | 명종(明宗) |
피안자 이칭 | 춘령(椿齡)·이환(李峘)·자(字) 대양(對陽)·경원대군(慶原大君)·강릉(康陵) |
피안자 부 | 중종(中宗) |
피안자 모 |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 |
피안자 생년월일 | 1534.05.22 |
피안자 몰년월일 | 1567.06.28 |
안태 연월일 | 1538.02.21 |
안태지 기록1 | 서산(瑞山) 태봉(胎峯) 『선조실록』 |
안태지 좌표(위도) | 36°77'92.00"N |
안태지 좌표(경도) | 126°57'87.03"E |
안태지 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1 |
문화재 지정여부 | 보물 제1976호 |
이안 연월일 | 1929.05 추정 |
이안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
이안지 좌표(위도) | 37°66'45.61"N, |
이안지 좌표(경도) | 126°86'06.29"E |
지문 | 皇明嘉靖十三年,五月二十二日,寅時生,王男大君椿齡阿只氏胎,嘉靖十七年,二月二十日,卯時藏 |
지문 찬자 | 조선 예조(禮曹) |
지문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석물 | 태실 원형 복원 완료 |
태항아리 | 명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
태항아리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목차
- 1 내용
- 2 관련 기록
- 2.1 조선왕조실록
- 2.1.1 『명종실록』2권, 명종 1년(1545) 11월 2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 2.1.2 『선조실록』7권, 선조 6년(1573) 2월 17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
- 2.1.3 『선조실록』7권, 선조 6년(1573) 2월 21일 임신(壬申) 1번째 기사
- 2.1.4 『선조수정실록』9권, 선조 8년(1575) 11월 1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
- 2.1.5 『선조실록』9권, 선조 8년(1575) 11월 28일 임술(壬戌) 2번째 기사
- 2.1.6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
- 2.2 연려실기술
- 2.3 호산록
- 2.1 조선왕조실록
- 3 지식 관계망
- 4 시각자료
- 5 전자지도
- 6 참고 자료
- 7 주석
내용[편집]
조선 제13대 국왕 명종의 태실이다.
한 태실에 비석이 세 기(基)인 것이 특징이다. 안태비는 명종이 태어난 직후 세워진 것이며, 명종 즉위 후 세운 가봉비가 풍화로 인해 부식되자 1711년(숙종 37) 새로이 비석을 마련한 것이다.
숙종 때 비석을 마련하는 과정은 《승정원일기》에 자세하다. 이 때 비석만 새로 새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석물도 수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선조 태실과 현종 태실도 함께 개수(改修)하였는데 예조 당상과 낭청 각 1인과 감역관을 파견해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비석의 글씨는 승문원 관원을 차출하여 보냈다. 이 때 감역으로 참여했던 오수현(吳遂顯)은 태실 수개가 끝난 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승륙(陞六)이 이루어졌다.
명종 태실은 지난 2018년 보물 제1976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명종실록』2권, 명종 1년(1545) 11월 2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편집]
『선조실록』7권, 선조 6년(1573) 2월 17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편집]
『선조실록』7권, 선조 6년(1573) 2월 21일 임신(壬申) 1번째 기사[편집]
『선조수정실록』9권, 선조 8년(1575) 11월 1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편집]
《도적이 명종의 태봉을 허물다》
도적이 명종의 태봉(胎封)을 허물었다. 이 태봉은 서산(瑞山)에 있는데 간악한 백성이 군수를 해치려고 하여 태실(胎室)의 돌난간을 깨뜨렸다. 盜毁明廟胎封。 胎封在瑞山, 姦民欲害郡守, 打破胎室石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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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조수정실록』9권, 선조 8년(1575) 11월 1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 |
『선조실록』9권, 선조 8년(1575) 11월 28일 임술(壬戌) 2번째 기사[편집]
『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1711) 10월 22일 정축(丁丑) 2번째 기사[편집]
연려실기술[편집]
『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편집]
선조 을해년에 서산(瑞山)의 간사한 백성이 그 고을 원을 해하려고 명종(明宗)의 태봉(胎峯) 석란(石欄)을 쳐부셨다.
宣祖乙亥瑞山奸民欲害其宰, 打破明宗胎封石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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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별집(別集) 2권, 「사전전고(祀典典故)」장태조(藏胎條) |
호산록[편집]
『호산록(湖山錄)』[1]「산천(山川)」[편집]
태봉은 문수사(文殊寺) 좌쪽 어깨 편에 있으니 명종대왕(明宗大王)의 태를 묻은 곳이다. 봉우리 위에다 또 태사(胎寺) 세 칸(三間)을 지었으며 봉우리 아래에는 태지기(胎直) 10여 호가 살면서 벌목도 금지하고 산불도 금지한다.
胎峰在文殊寺在肩, 明宗大王胎入藏, 峰頂又作胎寺三間, 峰之下胎直十餘家, 禁伐禁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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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산록(湖山錄)』「산천(山川)」 |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전자지도[편집]
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명종대왕 태실 및 비 정밀실측 및 심화연구』, 서산시, 2015.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
- ↑ 1619년(광해군 11) 한여현(韓汝賢)이 편찬한 충청도 서산군(현재의 서산시) 읍지. 2권 2책. 필사본. 개인소장. 고경명(高敬命)이 서산군수로 부임하여 편찬하게 하여 뒤에 완성된 사찬읍지(私撰邑誌)로서 충청도 지역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지방 사회의 모습을 충실히 전해 주는 읍지로서 의의가 크다. 17세기 초 지방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정치 질서의 문란, 향촌의 미풍양속(鄕風)의 붕괴와 좌목(座目) 다툼 등 향촌 사회의 동요, 소금굽기·목장·해상물의 진상 등에서 심각하게 나타났던 관리들의 민폐, 국방의 허술함 등을 지방 사족(士族)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