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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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태실(英祖 胎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의 영조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15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영조 태실
한자명 英祖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Yeongjo
피안자 명칭 영조(英祖)
피안자 이칭 이금(李昑)·자(字) 광숙(光叔)·현효대왕(顯孝大王)·원릉(元陵)
피안자 부 숙종(肅宗)
피안자 모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
피안자 생년월일 1694.10.31
피안자 몰년월일 1776.04.22
안태 연월일 1695.01.28 『영조 태지석』
안태지 기록 청주(淸州) 『승정원일기』
안태지 기록1 청주(淸州) 산내(山內) 일동면(一東面) 무쌍리(無雙里) 『정조실록』
안태지 기록2 충북 청주군 낭성면 『서삼릉 영조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6°65'30.4"N
안태지 좌표(경도) 127°58'2.6"E
안태지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5
문화재 지정여부 충북 유형문화재 제69호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康熙三十三年,九月,十三日,寅時,誕生王子阿只氏胎,康熙三十四年,正月,二十八日,辰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朝鮮 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영조 가봉태실 안태지 산 중턱에 복원
태항아리 영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편집]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태실이다.

영조 즉위 직후부터 태실을 가봉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경종의 태실을 먼저 가봉하고 영조 태실의 가봉은 풍년을 기다려 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던 차에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태실 가봉은 더욱 미루어졌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뒤인 1729년(영조 5) 청주의 영조 태실이 가봉되었다. 이 때 영조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태실의 범위를 축소하고 석물의 크기를 줄이는 등 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여러 조치를 한다. 그리고 이 일련의 논의 내용과 가봉 과정을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로 정리하였다. 이 의궤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70호로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태실 석물은 원래 위치보다 낮은 봉우리에 옮겨져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 태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옮긴 뒤 여러 석물들이 방치되었고 그 자리에는 분묘가 들어섰었으나 이내 파묘하고 현재는 공지(空地)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후 1982년 흩어진 석재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영조실록』23권, 영조 5년(1729) 8월 29일 신미(辛未) 4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나주의 여러 섬에 고을 설치하는 일과 신축년 사화의 진상을 이야기하다》

… (전략) … 예조 판서 김시환(金始煥)이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있는 태봉(胎封)의 석물(石物)은 조금 체제(體制)를 감해서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감하기가 미안(未安)합니다."

하고, 이태좌와 이집도 모두 감해서는 안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 후릉(厚陵)의 석물 제도(制度)가 참으로 좋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를 모방(模倣)하여 법제로 삼도록 명하였으나, 석물의 체중(體重)도 오히려 감하여 작게 하였다. 하물며 태실(胎室)을 표시하는 것이겠는가? 석물의 체중이 크거나 작은 것이 어찌 사체에 관계가 있겠는가? 만일 3분의 1을 감한다면 운반해 가기도 조금 나을 것이다. 또한 이번에 이미 감한다면, 뒷날에 마땅히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아 준행할 것이니, 오늘날의 민폐(民弊)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뒷날의 폐해를 제거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태좌·이집·김시환이 감하지 말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禮曹判書金始煥陳淸州胎封石物, 稍減體制事有命, 而損削未安。 台佐、㙫皆言不可減, 上曰: "先朝以厚陵石物制度之儘好, 特命倣此爲制, 石物體重, 猶減而少之。 況胎室所標乎? 石體大小, 何關事體? 若減三分一, 則運致差勝。 且今旣減損, 則日後當以此定式遵行, 非但除今日民弊, 亦可爲後日除弊之道矣。" 台佐、㙫、始煥, 力請勿減, 終不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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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23권, 영조 5년(1729) 8월 29일 신미(辛未) 4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379책 (탈초본 20책) 숙종 24년(1698) 7월 10일 임오(壬午) 15/1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癸酉年의 前例에 따라 왕자의 胎를 葬事하는 곳에 함께 埋安할 것인지를 묻는 禮曹의 계》

又啓曰, 癸酉年, 王子阿只氏, 未及葬胎, 故一時埋安於葬處矣。所當依此例, 竝埋於葬處, 敢此仰稟。傳曰, 依爲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79책 (탈초본 20책) 숙종 24년(1698) 7월 10일 임오(壬午) 15/15 기사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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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조선 선공감(朝鮮 繕工監), 『영조대왕태실석난간조배의궤(英祖大王胎室石欄干造排儀軌)』,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