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공주 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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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왕녀 묘지명(王女墓誌銘)에 말하기를, "영락 22년 갑진 2월 경자에 우리 주상 전하의 맏딸이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연령이 겨우 13세이다. 특히 공주(公主)의 칭호를 주시고, 올해 4월 신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다 장사한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범인과 달랐으며,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자애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으며, 궁액(宮掖) 가운데에서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을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나이가 계(筓)할 때도 미치지 못하고 급거히 양궁(兩宮)의 슬픔을 끼치었으니, 진실로 천도(天道)란 앎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하고, 명(銘)에 말하기를,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능히 삼가하며 효도하였는데,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였도다. 국인(國人)들의 슬픔을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한 것이었다(王女墓誌銘曰: 永樂二十二年甲辰二月庚子, 今我主上殿下之長女, 以疾卒, 年甫十有三歲矣。 特贈公主, 以是年四月辛酉, 葬于高陽縣北酸梨洞之原。 公主生而淑婉, 姿容端潔, 聰慧異常。 稍長, 莊重寡言, 喜慍不見于色, 兩宮慈愛尤篤。 宮掖之中, 咸致敬慕, 期以肅雍之治, 永爲戚畹之儀, 不幸年未及䈂, 遽貽兩宮之慟悼, 信乎天道之無知也。 嗚呼悲夫! 銘曰: 嗟嗟淑媛, 夙承胎敎。 有德有容, 克愼克孝。 天道蒼茫, 奄爾不淑。 國人之哀, 曷其有極? 卜地之吉, 揆日之良, 旣固且密, 萬世之藏。藝文提學尹淮所撰也).|출처=『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 | {{Blockquote|왕녀 묘지명(王女墓誌銘)에 말하기를, "영락 22년 갑진 2월 경자에 우리 주상 전하의 맏딸이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연령이 겨우 13세이다. 특히 공주(公主)의 칭호를 주시고, 올해 4월 신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다 장사한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범인과 달랐으며,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자애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으며, 궁액(宮掖) 가운데에서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을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나이가 계(筓)할 때도 미치지 못하고 급거히 양궁(兩宮)의 슬픔을 끼치었으니, 진실로 천도(天道)란 앎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하고, 명(銘)에 말하기를,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능히 삼가하며 효도하였는데,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였도다. 국인(國人)들의 슬픔을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한 것이었다(王女墓誌銘曰: 永樂二十二年甲辰二月庚子, 今我主上殿下之長女, 以疾卒, 年甫十有三歲矣。 特贈公主, 以是年四月辛酉, 葬于高陽縣北酸梨洞之原。 公主生而淑婉, 姿容端潔, 聰慧異常。 稍長, 莊重寡言, 喜慍不見于色, 兩宮慈愛尤篤。 宮掖之中, 咸致敬慕, 期以肅雍之治, 永爲戚畹之儀, 不幸年未及䈂, 遽貽兩宮之慟悼, 信乎天道之無知也。 嗚呼悲夫! 銘曰: 嗟嗟淑媛, 夙承胎敎。 有德有容, 克愼克孝。 天道蒼茫, 奄爾不淑。 國人之哀, 曷其有極? 卜地之吉, 揆日之良, 旣固且密, 萬世之藏。藝文提學尹淮所撰也).|출처=『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 | ||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6번째 기사==== |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6번째 기사==== | ||
+ | {{Blockquote|예조에서 계하기를, "아이로 성인(成人) 전에 죽은 왕녀(王女)에 대한 추증(追贈)은 옛날 법제를 참고하여 보건대, 송나라 공복제희(恭福帝姬)가 나이 다섯 살에 훙서(薨逝)하였는데 수국 공주(隋國公主)를 봉하였으니, 이제 왕녀의 추증도 이 제도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였다(禮曹啓: "殤內王女追贈, 參考古制, 宋 恭福帝姬年五歲薨, 封隋國公主, 今王女追贈, 乞依此制施行").|출처=『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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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7일 계묘(癸卯) 2번째 기사==== |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7일 계묘(癸卯) 2번째 기사==== | ||
2019년 8월 17일 (토) 09:22 판
정소공주 묘(貞昭公主 墓) | |
식별자 | T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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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분묘 |
한글명 | 정소공주 묘 |
한자명 | 貞昭公主 墓 |
영문명 | Tomb of Princess Chŏngso |
피장자 명칭 | 정소공주(貞昭公主) |
피장자 이칭 | 정혜공주(貞惠公主) |
피장자 부 | 세종(世宗) |
피장자 모 | 소헌왕후(昭憲王后) |
피장자 생년월일 | 1412.XX.XX |
피장자 몰년월일 | 1424.02.05 |
초장 연월일 | 1424.04.15 |
초장지 기록1 | 고양현 북 산리동(酸梨洞) 세종실록 |
초장지 기록2 | 고양 사리대면(沙里大面) 경기도감영 장계등록 |
이장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
지문 | 貞昭公主墓誌銘 |
지문 찬자 | 윤회(尹淮) |
지문 소장처 | 고려대 박물관 |
석물 | 석인(石人) 2, 석양(石羊) 2, 석호(石虎) 2 |
정의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장녀이며 문종(文宗)과 세조(世祖)의 누나인 정소공주(貞昭公主)의 묘.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
왕녀(王女)가 궁중에서 졸(卒)하였으니, 나이 13세였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육선(肉膳)도 철수하였다. 예장(禮葬)·조묘(造墓) 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부정윤(副正尹) 이석(李碩)이 상례를 주장하게 하였다(王女卒于宮內, 年十三。 停朝市三日, 輟肉膳, 設禮葬、造墓兩都監, 命副正尹碩主喪). | ||
출처: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 |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4번째 기사
왕녀(王女)의 습(襲)과 대·소렴(大小斂)과 전(奠)의 품수(品數)를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예에 의하도록 명하였다(命王女襲大小斂奠品, 依貞善公主例). | ||
출처: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 |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3일 기묘(己卯) 4번째 기사
왕녀에게도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초상과 같이 칠곽(漆槨)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命王女與貞善公主喪, 皆用漆槨). | ||
출처: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3일 기묘 |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왕녀 묘지명(王女墓誌銘)에 말하기를, "영락 22년 갑진 2월 경자에 우리 주상 전하의 맏딸이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연령이 겨우 13세이다. 특히 공주(公主)의 칭호를 주시고, 올해 4월 신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다 장사한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범인과 달랐으며,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자애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으며, 궁액(宮掖) 가운데에서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을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나이가 계(筓)할 때도 미치지 못하고 급거히 양궁(兩宮)의 슬픔을 끼치었으니, 진실로 천도(天道)란 앎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하고, 명(銘)에 말하기를,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능히 삼가하며 효도하였는데,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였도다. 국인(國人)들의 슬픔을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한 것이었다(王女墓誌銘曰: 永樂二十二年甲辰二月庚子, 今我主上殿下之長女, 以疾卒, 年甫十有三歲矣。 特贈公主, 以是年四月辛酉, 葬于高陽縣北酸梨洞之原。 公主生而淑婉, 姿容端潔, 聰慧異常。 稍長, 莊重寡言, 喜慍不見于色, 兩宮慈愛尤篤。 宮掖之中, 咸致敬慕, 期以肅雍之治, 永爲戚畹之儀, 不幸年未及䈂, 遽貽兩宮之慟悼, 信乎天道之無知也。 嗚呼悲夫! 銘曰: 嗟嗟淑媛, 夙承胎敎。 有德有容, 克愼克孝。 天道蒼茫, 奄爾不淑。 國人之哀, 曷其有極? 卜地之吉, 揆日之良, 旣固且密, 萬世之藏。藝文提學尹淮所撰也). | ||
출처: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 |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6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