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태실지

SeosamneungWiki.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메인 화면으로 돌아가기


태조 태실(太祖 胎室)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의 태조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01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태조 태실
한자명 太祖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Taejo
피안자 명칭 태조(太祖)
피안자 이칭 이성계(李成桂)·이단(李旦)·초자(初字) 중결(仲潔)·자(字) 군진(君晉)·호(號) 송헌(松軒)·강헌대왕(康獻大王)·고황제(高皇帝)·건원릉(建元陵)
피안자 부 환조(桓祖)
피안자 모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崔氏)
피안자 생년월일 1335.10.11
피안자 몰년월일 1408.05.24
안태 연월일 1393.01.07 『태조실록』
안태지 기록 완산부 진동현 가봉 후 진주로 승격
안태지 기록1 영흥(永興) 준원전(濬源殿) 『임하필기』
안태지 기록2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 『정조실록』
안태지 기록3 전북 금산군 추부면 『서삼릉 태조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6°19'47.38"N
안태지 좌표(경도) 127°45'26.68"E
안태지 주소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4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高麗忠肅王後四年乙亥十月十一日生,太祖高皇帝胎,康熙二十八年 己巳三月二十九日藏于太田郡山內面,昭和四年,月,日,移葬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태조 가봉태실 복원
태항아리 태조 태지석 및 외항아리 몸체와 뚜껑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편집]

조선 제1대 국왕 태조의 태실이다. 함경도 영흥에 있었던 안태지는 조성시점이 명확하지 않다. 태조는 1392년 7월 17일 국왕으로 즉위 한 뒤 정당 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아 안태(安胎) 할 땅을 잡게 하였다. 권중화는 이듬해 전라도 진동현으로 안태지로 선정하고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를 올렸고, 1월 7일 태조의 태실을 안치한 뒤 진동현을 진주부(珍州府)로 승격하였다.

1413년(태종 13) 9월 온행을 하던 태종은 진주(珍州) 원산(猿山)에서 태조의 태실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태실에서는 3년에 한 번 태실안위제(胎室安慰祭)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실에서 이루어진 제사는 이후 세종의 명령으로 구례(舊例)를 상고하게 하여 폐지되었다.

태실에서 지내는 제사는 폐지되었지만 관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봉심을 통해 수리가 필요한 부분이 발견되면 해당 도의 감사(監司)와 관상감, 선공감의 제조가 함께 수리를 했다. 다만 경제사정으로 보수 시점을 미루기도 하였다. 태조 태실의 경우 1687년(숙종 13) 태조 태실의 석물에 문제가 발견되었으나 호남지역 기근으로 이듬해 가을로 보수 시점이 미루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에도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국상이 발생하여 다시 다음해 봄에 개수를 하였다. 이후 1725년(영조 1) 태조태실의 보수 사실이 확인된다.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이후 관리를 용이하게 한다는 이유를 들어 1929년부터 각지에 흩어져있던 조선의 국왕과 세자, 대군과 군, 공주와 옹주 등 왕실의 태를 일괄로 서삼릉 능역 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태조 가봉 태실의 초안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이나 원 위치에는 분묘가 조성되어 있고, 석물들은 추부터널 옆으로 자리를 옮겨 보존되고 있다. 태조 태실 석물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태실 터 현황[편집]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서삼릉으로 이장되기 이전 태조 태실 터 초안지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 4

금산군 관광문화체육과 문화예술부 김성수 주무관의 제보에 의하면 해당 태실 터는 현재 개인 소유의 토지가 되어 태조 태실이 문화재로 지정되는데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상술한 주소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바로 인접한 한일산업 금산공장이 위치한 부근에서 올라가야 한다. 흙이 굉장히 미끄러워 올라가고 내려옴에 다소 어려움이 있으며, 태실 터로 올라가는 도중에 개인이 경작한 밭이 눈에 띈다. 태조 태실의 초안지에 들어서면 제보와 같이 상석, 망주석 등을 갖춘 민묘 1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해당 민묘가 바로 옛 태조 태실의 초안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다만 해당 민묘로 인해 태실 터의 경관 자체가 크게 훼손되어 태실이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으리라고 추정하기에는 다소 힘들어보인다.

태조 태실이 복원되어 옮겨진 주소는 다음과 같다.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 1-86

해당 주소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추부터널을 지나 만인산 휴게소 인근의 주차장 쪽에서 이동해야 한다. 추부터널을 지나기 이전 「태조대왕태실」이라는 주차장 안내 표지판이 존재하나 이는 「태실 자생식물원」의 주차장이며 복원된 태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만인산 주차장 쪽에서 만인산으로 진입하면 태실로 향하는 표지판이 존재해 이를 따라 이동해 복원 태실에 도착할 수 있다. 복원 태실에는 숙종 15년(1689)에 태실을 정비하면서 새로이 건립한 「태조대왕태실비(太祖大王胎室碑)」와 태조 재위기 영흥에서 진동현으로 태실을 이안할 때 사용했던 개첨석(蓋簷石)과 중동석(中童石)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난간주석 및 동자석, 판석과 상석(裳石) 등은 최근 들어 복원한 것으로 과연 이것이 태조 재위기 건립한 가봉 태실의 양식과 동일한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태조실록』2권, 태조 1년(1392) 11월 27일 갑진(甲辰) 3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정당 문학 권중화를 보내 안태할 땅을 살피게 하다》

정당 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에서 안태(安胎) 할 땅을 잡게 하였다.

遣政堂文學權仲和于楊廣、慶尙、全羅道, 相安胎之地

Quote-right blue.png
출처: 『태조실록』2권, 태조 1년(1392) 11월 27일 갑진(甲辰) 3번째 기사



『태조실록』3권, 태조 2년(1393) 1월 2일 무신(戊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태실 증고사 권중화가 태실의 길지와 신도 후보지의 지도를 바치다》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돌아와서 상언(上言)하기를,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찾았습니다."

하면서, 이에 산수 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

胎室證考使權仲和還, 上言: "全羅道 珍同縣, 相得吉地。" 乃獻山水形勢圖, 兼獻楊廣道 雞龍山都邑地圖。

Quote-right blue.png
출처: 『태조실록』3권, 태조 2년(1393) 1월 2일 무신(戊申) 1번째 기사



『태조실록』3권, 태조 2년(1393) 1월 7일 계축(癸丑) 4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태실을 완산부 진동현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진주로 삼다. 신도 후보지 계룡산 행차에 대간과 의흥 친군위가 수종하도록 준비케 하다》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태실(胎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珍同縣)에 안치(安置)하고, 그 현(縣)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고, 명령하였다.

"이달 18일에 계룡산(鷄龍山)으로 거둥할 것이니 대성(臺省)에서 각기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義興親軍)이 시종(侍從)하도록 하라."

遣三司左僕射權仲和, 安胎室于完山府 珍同縣, 陞其縣爲珍州。 敎: "將以今月十八日, 幸雞龍山, 其令臺省各一員, 義興親軍侍從。"

Quote-right blue.png
출처: 『태조실록』3권, 태조 2년(1393) 1월 7일 계축(癸丑) 4번째 기사



『태종실록』26권, 태종 13년(1413) 9월 22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유성을 떠나 임금이 전라도 진주 원산의 들에 머물다》

어가(御駕)가 온정(溫井)을 출발하여 전라도 진주(珍州) 원산(猿山)의 들에 머물렀다. 임금이 태조(太祖)의 태산(胎山)을 보고 말하였다.

"태실(胎室)에 봉사(奉祀)하는 것은 비록 옛 의례(儀禮)가 없다고 하나, 의당 지나가는 산천(山川)에 예로 제사지내는 것을 의방(依倣)해야 할 것이다."

내시(內侍)를 보내어 태조의 태실에 제사지냈다. 시종(侍從)한 여러 신하와 군사들에게 4일 식량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3도(三道)의 구군(驅軍)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駕發溫井, 次于全羅道 珍州 猿山坪。 上望見太祖胎山曰: "奉祀胎室, 雖無舊儀, 宜倣所過山川之禮祀之。" 遣內侍, 祭太祖胎室。 賜侍從諸臣軍士四日糧有差, 三道驅軍, 咸會于此。

Quote-right blue.png
출처: 『태종실록』26권, 태종 13년(1413) 9월 22일 무술(戊戌) 1번째 기사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태실에 안위하는 제사를 없애라고 명하다》

태실(胎室)에 안위(安慰)하는 제사를 없애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왕자의 태(胎)를 묻은 뒤에 3년만에 한 차례씩 제사지내는 것을 태실 안위제(胎室安慰祭)라 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예조에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옛날 규례를 상고하라 하였더니, 태조와 공정왕은 안태(安胎)한 뒤에 다 안위제(安慰祭)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므로, 인하여 없애라고 명하게 되었다.

命除胎室安慰祭。 前此, 安胎後, 每三年一次行祭, 謂之胎室安慰祭。 至是, 禮曹令書雲觀稽舊例, 太祖、恭靖王安胎後, 竝不行安慰祭, 乃命罷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전라도》〈전주부 - 진산군〉[편집]

Quote-left blue.png 《전라도》〈전주부 - 진산군〉

본조 태조(太祖) 2년 계유에 태조의 태실(胎室)을 봉안하였으므로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하였으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진산군으로 고쳤다.

本朝太祖二年癸酉, 以安太祖胎室, 陞知珍州事。 太宗十三年癸巳, 例改珍山郡, 別號玉溪。

Quote-right blue.png
출처: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전라도》〈전주부 - 진산군〉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1684) 8월 29일 임술(任戌) 4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진산군 태조 태실의 경작과 벌목을 금하다》

진산군(珍山郡)의 태조(太祖)의 태실(胎室)이 공주(公州) 경계에 있는데, 간사한 백성이 함부로 이 땅을 경작하고 나무를 베었으므로, 양호(兩湖)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이를 중하게 다스려서 금단(禁斷)하게 하였다.

珍山郡太祖胎室, 有公州境, 奸民冒耕伐樹, 令兩湖道臣, 重究禁斷。

Quote-right blue.png
출처: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1684) 8월 29일 임술(任戌) 4번째 기사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1월 4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함경도 영흥 유학 조동빈의 상서에 따라 태조 탄생지에 비석을 세우다》

함경도 영흥(永興)의 유학(幼學) 조동빈(趙東彬)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신 등이 삼가 건원릉(健元陵)의 지문(誌文)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지원(至元) 원년(元年) 을해(乙亥) 10월 11일 기미(己未)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셨다.’고 하였으며,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부(府)의 동남(東南) 13리(里)에 흑석리가 있으니 바로 우리 환조(桓祖)의 옛날 저택으로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탄생한 곳이다. 정통(正統) 계해년에 고 상신 정인지(鄭麟趾)가 태조의 수용(晬容)을 준원전(濬源殿) 터의 서쪽 수백 보 지점에 봉안(奉安)하였다.’고 하였는데,

어태(御胎)를 처음 봉(封)한 곳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다 전(殿)을 세워서 어진(御眞)을 봉안하였으니, 이는 그 당시 경창 옹주(慶昌翁主)가 본 바입니다.

咸鏡道 永興幼學趙東彬等上書言 : 臣等謹按健元陵誌文曰, ‘至元元年乙亥十月十一日己未, 誕降于永興 黑石里私第,’ 又按《輿地勝覽》曰, ‘府東南十三里, 有黑石里, 卽我桓祖舊邸, 太祖大王誕生之地。 至于正統癸亥, 故相鄭麟趾奉安太祖晬容於濬源殿基之西數百步’ 云, 有御胎初封處, 故於斯焉建殿而奉御眞, 此則其時慶昌翁主之所見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1755) 1월 4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열성조(列聖朝)의 태봉(胎峰)을 써서 바쳤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태봉(胎封)은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에,

정종 대왕(定宗大王)의 태봉은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태봉은 성산(星山) 조곡산(祖谷山)에,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에,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세조 대왕(世祖大王)의 태봉은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뒤에,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주(全州) 태실산(胎室山)에,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태봉은 광주(廣州) 경안역(慶安驛) 뒤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태봉은 가평(加平) 서면(西面)에,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태봉은 영천(永川) 공산(公山)에,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태봉은 서산(瑞山) 동면(東面)에,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태봉은 임천(林川) 서면(西面)에 있었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대흥(大興) 원동면(遠東面)에 있는데, 신유년 10월에 돌 난간을 배설(排設)한 뒤에 대흥현(大興縣)을 승호(陞號)하여 군수(郡守)를 두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태봉은 공주(公州) 남면(南面) 오곡(吳谷) 무수산(無愁山) 동구(洞口)에,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봉은 충주(忠州) 엄정립비(嚴政立碑)의 북쪽 이삼리 쯤에,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태봉은 청주(淸州) 산내(山內) 일동면(一東面) 무쌍리(無雙里)에 있었다.

禮曹書進列聖朝胎(峰)〔封〕 。 太祖大王胎封珍山 萬仞山, 定宗大王胎封金山 直持寺後, 太宗大王胎封星山 祖谷山, 世宗大王胎封昆陽 所公山, 文宗大王胎封豐基 鳴鳳寺後, 端宗大王胎封昆陽 所谷山, 世祖大王胎封星州 禪石寺後, 睿宗大王胎封全州 胎室山,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 仁宗大王胎封永川 公山, 明宗大王胎封瑞山東面, 宣祖大王胎封林川西面。 顯宗大王胎封大興遠東面, 辛酉年十月, 石欄干排設後, 大興縣陞號爲郡守。 肅宗大王胎封公州南面吳谷 無愁山洞口, 景宗大王胎封忠州嚴政立碑北數里許, 英宗大王胎封淸州山內一東面 無雙里。

Quote-right blue.png
출처: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323책 (탈초본 17책) 숙종 13년(1687) 7월 24일 경자(庚子) 8/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南龍翼 등이 입시하여 文廟에 謁聖할 때 取人하는 일, 珍山郡의 太祖大王胎峰의 石物 拆傷에 대한 修改 문제 등을 논의함》

南龍翼所啓, 文廟謁聖, 待秋更稟事, 親承傳敎於榻前矣。… (중략) … 左承旨申懹曰, 視學盛禮, 以取人之故, 退行於來年, 似未妥當矣。

上曰, 取人則不可不爲, 以九月定行, 仍爲取人, 宜當, 而知委一款, 則謁聖時知委, 已成近例, 士子多少, 不係於知委與否, 循例知委, 可也。

又所啓, 上年冬, 本曹參判沈梓, 珍山郡太祖大王胎峰石物拆傷處奉審書啓回啓內, 觀象監·繕工監提調下去, 與本道監司, 眼同修改, 擇日排立事判府內, 姑待明秋擧行事, 判下矣。卽當擇日擧行, 而湖南飢荒, 比他尤甚, 今年西成, 亦不可必, 何以爲之?

敢稟。上曰, 待明秋爲之,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23책 (탈초본 17책) 숙종 13년(1687) 7월 24일 경자(庚子) 8/8 기사



『승정원일기』 331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9월 8일 정축(丁丑) 11/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國恤로 인해 파손된 太祖大王 胎峯의 石物을 내년 봄에 보수하겠다는 南龍翼의 계》

禮曹判書南龍翼所啓, 咸鏡道四陵殿奉審, 今年當次, 故曾以待秋奉審之意, 有所啓達。且珍山太祖大王胎峯, 石物傷破, 故待秋修改之意, 亦爲啓稟矣。値此國恤, 皆不可擧行, 待明春擧行之意, 敢達。

上曰, 依爲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31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9월 8일 정축(丁丑) 11/19 기사



『승정원일기』 334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윤 3월 5일 임인(壬寅) 8/3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太祖 胎室의 石物을 修改할 때 堂上 이하를 書啓하라는 전교》

傳于權瑍曰, 今此太祖大王胎室石物修改時, 堂上以下, 依例書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34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윤 3월 5일 임인(壬寅) 8/36 기사



『승정원일기』 334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윤 3월 7일 갑진(甲辰) 8/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太祖 胎室의 石物을 修改한 李觀徵 등에게 半熟馬 등을 하사하라는 비망기》

備忘記, 傳于睦昌明曰, 太祖大王胎室石物修改時, 繕工監提調判書李觀徵, 觀象監提調參判兪夏益, 各半熟馬一匹, 書標官副正字趙大壽, 都差使員縣監權聖矩, 浮石差使員縣監李栽, 各兒馬一匹賜給, 監役官直長李仁倜, 六品遷轉, 監役官副奉事金正華, 相當職除授, 奏時官前主簿洪得榮, 上弦弓一張賜給, 其餘員役工匠, 令該曹米布分等磨鍊題給。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34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윤 3월 7일 갑진(甲辰) 8/24 기사



『승정원일기』 334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윤 3월 10일 정미(丁未) 30/3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觀徵이 입시하여 太祖 胎峯의 胎室 近處 나무들이 넘어질 듯하므로 베어버릴 것, 太祖 胎峰主山의 內外邊 행정 구역의 조정, 珍山까지의 沿路 각 읍에 대해 도로 등을 보수한 공로로 蠲賦할 것에 대해 논의함》

李觀徵啓曰, 珍山, 太祖大王胎峯, 今番石物修改時, 胎室近處古木, 旣已斫伐, 而卽今又有大木七八株, 不但枝葉陰密, 莎草被傷, 或因大風, 若有顚拔之患, 則石物亦難免被傷, 事甚可慮, 令本道方伯, 分付本官, 剪伐, 何如?

上曰, 分付本道, 剪伐, 可也。 出擧條

又啓曰, 珍山, 太祖大王胎峰主山, 內邊則爲珍山地, 外邊則爲公州地, 而胎峯內外, 或有生事之患, 則珍山民, 每每當之, 外邊居民, 則以居在公州, 晏然無憂, 故看護胎峯, 大不如珍山之民, 且距本州甚遠, 故本州號令, 猶有所不及, 況珍山, 則以他道他官, 何能威制乎?

若以胎峯主山外邊, 限七八里地及居民, 割屬珍山, 則胎峯看護之道, 自無虛疎之患矣。主山內邊居民, 無不號訴, 故敢達。

上曰, 經界事重, 似難輕許, 而問于兩道監司, 從其便否而處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334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윤 3월 10일 정미(丁未) 30/33 기사



『승정원일기』 587책 (탈초본 31책) 영조 1년(1725) 2월 25일 계사(癸巳) 38/3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閔鎭遠 등이 입시하여 世子 책봉은 大臣이 올라오면 稟旨하여 擧行할 것, 李重煥 등은 睦時龍과 함께 추문할 것, 柳重茂에 대해서는 결말을 기다릴 것 등에 대해 논의함》

今二月二十五日巳時, 上御進修堂。

禮曹判書閔鎭遠, 參判許玧, 請對入侍時, 承旨金相玉, 假注書金廷鳳, 記注官崔道文, 記事官李台徵。

… (중략) … 鎭遠啓曰, 全羅監司狀啓, 珍山地, 太祖大王胎峯, 石物動退, 塗灰剝落, 令該曹稟處事, 上年八月十六日, 啓下本曹, 而有稟定擧行事, 未及回啓。丁巳年加平地, 中宗大王胎峯石物等, 中折破碎等處修改時, 只令觀象監官員, 與本道眼同修改。壬戌年林川地, 宣祖大王胎峯, 碑石磨治時, 本曹郞廳及繕工監役, 下去董役。辛卯年瑞山地, 明宗大王胎室, 石物折傷處, 大興地, 顯宗大王胎室, 碑石動退處, 林川地, 宣祖大王胎室, 碑石削磨改刻等, 三處修改時, 本曹堂上, 進去董役矣。動退處合縫塗灰之役, 不至大段, 而前例不一, 何以爲之?

上曰, 頃年堂上進去者, 蓋兼三處董役, 而雖其一處, 事體重大, 堂上可去矣。

鎭遠曰, 小臣, 本曹擧行之繁劇, 似難捨去, 參判許玧老病, 參議洪禹傳在外, 俱無可去之人, 何以爲之?

上曰, 參議今姑改差, 其代口傳差出, 送之, 可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587책 (탈초본 31책) 영조 1년(1725) 2월 25일 계사(癸巳) 38/37 기사



『승정원일기』 589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1725) 3월 21일 기미(己未) 47/5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太祖大王의 胎室을 修補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병든 모친을 문안하고 싶다고 말미를 청하는 沈宅賢의 계》

禮曹判書沈宅賢疏曰,

… (중략) … 今臣以太祖大王胎室修補事, 方將下去珍山地, 而去臣母所住之處, 不甚相遠, 儻於竣事之後, 許臣由暇, 俾得歷省病母, 則不獨臣私情之感幸, 其於聖朝孝理之政, 亦有光矣。王程有限, 不敢私自少淹, 敢將血懇, 臨發拜章, 臣無任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

答曰, 省疏具悉。卿其依疏辭往省焉。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589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1725) 3월 21일 기미(己未) 47/51 기사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辛亥四月初五日午時, 上御進修堂。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議政李㙫, 兼禮曹判書申思喆, 戶曹判書金東弼, 行副司直張鵬翼, 刑曹參判洪鉉輔, 行大司成宋眞明, 左副承旨李匡輔, 掌令李台徵, 校理尹彙貞, 假注書趙明履, 事變假注書安后奭, 記注官趙昌來, 記事官洪昌漢同爲入侍。

… (중략) … 㙫曰, 天啓甲子仁祖初年, 胎峯始爲定式, 大王胎峯, 則三百步矣。世宗大王胎室, 自上峯至峯底, 爲一百四五十步, 犯民田處四面各一百五六十步, 民田斗數七石十一斗零落只。端宗大王胎室, 自上峯至峯底, 爲四十餘步, 犯民田處四面各二百五十餘步, 民田斗數十七石九斗零落只, 人家撤毁, 亦三四處矣。民田若欲仍存, 則違式, 不欲仍存, 則當給其代, 而給其代亦難矣。

上曰, 仁廟以後, 則定以三百步, 而仁廟以前步數幾何?

眞明曰, 故[古]則無定步數之事, 天啓六年, 始限以三百步矣。

㙫曰, 此事令道臣奉審, 方便處置, 何如?

上曰, 道臣諉廟堂, 廟堂諉道臣, 如是遷就, 豈有了期? 太祖以後, 自太宗, 已有胎峯, 天啓後, 若不皆定步數, 則仍之, 若皆定焉, 則給代土, 此二者中決之, 可也。

眞明曰, 列聖胎峯步數, 使之一一尺量上聞似好。

上曰, 退出詳知後, 更稟處之, 可也。

上又曰, 太祖胎峯, 亦封之乎? 在於何處?

匡輔曰, 在於高山。臣曾任南平時, 僧徒數人, 持勸緣文來言, 太祖胎峯, 在高山, 而無守護之事, 請令百姓, 各出物, 以爲守護之地。臣以爲如此, 則事甚猥越, 宜自監營狀達, 經禮曹奉審後, 定式爲之, 而臣適遞歸, 未知其後事矣。

上曰, 何年間事乎?

匡輔曰, 癸卯年也。其時守令, 或有給錢物者, 且已成牒於政府, 小臣見之寒心。

上曰, 政府踏印以給, 極可怪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



고대일록[편집]

『고대일록』 제3권, 무술(戊戌, 1598) 가을 7월[편집]

Quote-left blue.png 《7월 15일 무술(戊戌)》

새벽에 동쪽으로 가서 태조의 태능(胎陵)을 알현(謁見)했다. 산천이 공읍(拱揖)하는 빼어난 음택(陰宅)이다.

나는 복통을 일으켜 몇 번이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점심때 시장터에 도착했다. 장보는 사람이 적어 불리할 것 같아서 영동으로 가고자 했는데 복통이 점점 더 심해져서 되돌아 용담(龍潭)으로 향했다. 저녁에 초현(草峴) 마을에 묵었다.

十五日戊戌曉, 發東去見太祖胎陵, 山川拱揖眞明堂也。余患腹痛幾至死, 域午到市塲人少不利, 欲向永同而腹痛轉急回向龍潭, 夕投于草峴村。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대일록』 제3권, 무술(戊戌, 1598) 가을 7월)



덕계집[편집]

『덕계집』 제4권, 「계(啓)」[편집]

Quote-left blue.png 《어사 겸 재상경차관 때 올린 계 - 경오년(1570, 선조3). 전라도 〔御史兼災傷敬差官時啓 庚午年 全羅道〕》

… (전략) … 신은 지난 8월 27일 한양을 떠나서 진산(珍山)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백성 오응(吳鷹) 등 32명이 발괄(白活)을 올렸는데, 그 말에 “우리 군은 처음에는 군이나 현 지역이 아니고 연산(連山)ㆍ고산(高山)ㆍ금산(錦山) 등이 관리하는 부곡(部曲)이었으나,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의 태실(胎室)을 봉안한 뒤로 승격되어 군이라 불렀습니다. 사방의 땅이 매우 좁은데, 서쪽으로 전주(全州)와 떨어진 것이 겨우 5리이고, 동ㆍ남ㆍ북쪽은 10리 정도도 못 가서 모두 깊은 산골짜기입니다. 토지는 척박하고 백성은 부족한데도 그 공물과 부세, 요역은 다른 번창한 각 군에 의거해 동일하게 배당합니다.

臣去八月二十七日, 行到珍山止宿。居民吳鷹等三十二人, 呈所志白活, 其言曰, 本郡初非郡縣之地, 乃連山, 高山, 錦山等官部曲, 而自太祖康獻大王奉安胎室後, 陞號爲郡。四境之地極爲褊小, 西距全州只五里。東南北面不過十里許, 皆是窮山深谷, 土瘠民殘, 然其貢賦徭役, 依他阜盛各郡, 一樣分定。

Quote-right blue.png
출처: 『덕계집』 제4권, 「계(啓)」



임하필기[편집]

『임하필기』 제31권 「순일편(旬一編)」[편집]

Quote-left blue.png 《어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본(本)》

국초에 그린 태조의 수용(睟容) 두 본을 경기전과 준원전(濬源殿)에 나누어 봉안하였으니, 두 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준원전의 터는 본래 물이 있던 못이었다. 무학(無學)이 환조(桓祖)를 만나서 말하기를, “귀한 아들을 잉태할 것입니다. 아무 날에 내가 다시 오겠습니다.” 하였다.

을해년 10월 11일에 다시 와서 태조의 탄생을 보고는 태항(胎缸)을 가져다 못 속에 넣고 ‘요락지(瑤樂池)’라고 이름 붙였다. 태조가 네 살 때 지은 시에, “요락지 속의 옛날 용, 변화하여 장차 패택(沛澤)의 용이 되리라.[瑤樂池中舊日龍 變化將爲沛澤龍]”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뒤에 그 못을 메우고 준원전을 세웠다.

國初, 圖寫太祖睟容二本, 分奉于慶基殿濬源殿, 兩本最久也。 濬源殿基址, 本沮洳之池, 無學見桓祖曰, 孕貴子, 某日我當來。 乙亥十月十一日復來, 見太祖誕生, 取其胎缸藏于池, 名之曰瑤樂。 太祖四歲有詩曰, 瑤樂池中舊日龍, 變化將爲沛澤龍者, 是也。 後塡其池, 建濬源殿。

Quote-right blue.png
출처: 『임하필기』 제31권 「순일편(旬一編)」



북도능전지[편집]

『북도능전지』, 「준원전(濬源殿) - 고실(故實)」[편집]

Quote-left blue.png 《준원전(濬源殿) - 고실(故實)》

初僧無學住薪寺【在殿基西南五里許】一日望氣來告桓祖曰, 公將生貴子及至。 太祖誕生時來, 納米藿酱三種曰, 王者必生須善保養云。 殿基舊有龍淵, 太祖誕降初藏御胎, 於淵中後填其淵【本殿錄曰, 填淵時, 胎缸則移奉, 於全羅道珍山郡萬仞山】

Quote-right blue.png
출처: 『북도능전지』, 「준원전(濬源殿) - 고실(故實)」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계보도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수치지형도[편집]

전자지도[편집]

이미지 마커와 커스텀 오버레이 + 지도에 지형도 표시하기

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이유원(李裕元), 『임하필기(林下筆記)』, 187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오건(吳健), 『덕계집(德溪集)』, 1827, 국립중앙도서관 및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정경운(鄭慶雲),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 ~ 1609,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 위창조(魏昌祖),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 175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금산군지편찬위원회, 『금산군지』, 금산군지편찬위원회, 1987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문화재청, 『서삼릉 유적현황 자료집』, 문화재청, 2003.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와 태실 관련 의궤』, 민속원, 2006.
  • 김득환, 『조선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태실』, 책읽는사람들, 2016.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태실 관련 자료집 1 - 역사서 및 문집 소재 태실 관련 기록 집성』, 2017.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태실 관련 자료집 2 - 태실 관련 등록 및 의궤 집성』, 2017.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태실 관련 자료집 3 - 태실 관련 등록 및 기사 집성』, 2017.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도록

  • 이주환, 이진훈, 조원교 공저, 『조선의 태실 1』,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 국립고궁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 : 나라의 복을 담은 태항아리』, 예맥, 2018.

4.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 홍성익, 「조선시대 태실의 역사고고학적 연구 」, 『영남학』27, 2015.
  • 유기원, 김기주, 「조선 태조대왕 태실의 형식과 특성」, 『건축역사연구』26, 2017.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