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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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 태실(莊祖 胎室)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의 장조 태실 전경
식별자 PC016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장조 태실
한자명 莊祖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Jangjo
피안자 명칭 장조(莊祖)
피안자 이칭 이선(李愃)·자(字) 윤관(允寬)·호(號) 의재(毅齋)·경모궁(景慕宮)·의황제(懿皇帝)·사도세자(思悼世子)·현륭원(顯隆園)·융릉(隆陵)
피안자 부 영조(英祖)
피안자 모 소유영빈(昭裕暎嬪) 이씨(李氏)
피안자 생년월일 1735.01.21
피안자 몰년월일 1762.05.21
안태 연월일 1735.윤 04.01 『장조 태지석』
안태지 기록 풍기(豐基) 『영조실록』
안태지 기록1 경북 영주군 상리면 『서삼릉 장조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6°78'21.35"N
안태지 좌표(경도) 128°37'60.38"E
안태지 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산2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雍正十三年,正月,二十一日,丑時生,元子阿只氏胎,雍正十三年,閏四月,初四日,巳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朝鮮 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장조 가봉태실 안태지 복원
태항아리 장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편집]

추존 국왕으로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태실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태를 태어난지 3개월만에 안태하였다. 충청도 덕산‧강원도 춘천‧원성현 치악산‧주천면 복룡산‧경상도 풍기 등 다양한 지역을 간심하였다. 결국 경상도 풍기 명봉산으로 정해졌다. 인근에 문종 태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태실을 조성하는 한편 문종 태실도 수개하였다. 하지만 이후 기록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다가 정조의 즉위 이후 사도세자 태실 관련 기록이 나타난다.

정조는 재위 기간 내내 사도세자 추숭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서울에 있었던 수은묘를 수원 화산 아래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하였다. 단순히 이름을 고쳤을 뿐 아니라 여러 상설제도를 왕릉에 준하였다.

정조의 경모궁 태실 가봉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경모궁 태실 가봉 논의에 신하들은 의거할 전례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정조는 경모궁 태실을 가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중인 《장조태봉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조의 태실 가봉이 경모궁 태실 가봉의 예를 따라 이루어진 것을 함께 고려하면 경모궁 태실은 현륭원과 같이 국왕의 태실격으로 가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훼손된 채 방치되다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장조의 태실은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팀이 현장 답사를 통해 태실지가 확인된 뒤 예천군에서 발굴조사를 해 복원되었다.

한편 명봉사 진입로에는 자연암반에 사도세자 태실 조성에 참여한 감역인 명단이 새겨진 각석이 남아있다. 이 각석을 통해 사도세자 태실 가봉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및 감역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이 각석은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으로 명명되어 2016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3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1735) 4월 2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안태사 송인명 등을 보내어 원자의 태를 풍기에 갈무리하게 하다》

안태사 송인명 등을 보내어 원자의 태를 풍기에 갈무리하게 하다.

遣安胎使宋寅明及從事官尹興茂, 藏元子胎于豐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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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40권, 영조 11년(1735) 4월 2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793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1월 26일 정유(丁酉) 15/2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柳萬重, 以觀象監官員, 以提調意啓曰, 今此新生元子阿只氏, 藏胎事, 依前擧行, 而取考本監所上胎峯謄錄, 則去萬曆甲辰, 天啓甲子等年, 各道各邑, 看審擇定矣。百餘年之內, 幾盡擇用, 其或餘存處, 則年久之後, 未知其無故與否, 康熙庚午年分, 更爲看審, 則曾前所定處, 或爲沙汰衝破, 巒頭破碎, 形體變換。故更爲擇占可合九處, 而厥後亦已擇用, 只有二處, 而忠淸道德山地子坐午向之原, 元體極甚殘微, 江原道春川地子坐午向之原, 穴有古塚痕跡。故以此懸載於謄錄中, 而他無備三望擬入處, 斯速發遣本監相地官, 一邊餘存兩處改看審。且於兩道各邑, 可合處, 廣求擇定, 以爲及期定行之地,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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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93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1월 26일 정유(丁酉) 15/25 기사



『승정원일기』 798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4월 24일 갑자(甲子) 23/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乙卯四月二十四日巳時, 上御熙政堂。

藥房入診, 自上傳敎全羅監司徐宗玉, 同爲入侍時, 都提調金興慶, 提調金在魯, 副提調李春躋, 假注書崔龍賢, 記事官宋儒式·柳萬樞, 全羅監司徐宗玉, 醫官權聖徵·金應三·許信·玄起鵬·金德履同爲入侍。

… (중략) …

而聞外議則吏曹判書宋寅明, 以安胎使, 數日內將發行云。都政之至此遷就, 已極未安, 而今若奉使出外, 則大政又將遲延, 誠爲可慮, 政院似當有稟旨變通之事矣。

春躋曰, 當初院中, 與吏判相議, 以爲今番安胎使, 吏判當往, 而但都政尙未設行, 宜有議稟變通之事云, 則吏判以爲, 自前安胎使, 必以吏判爲之。該曹今不可違例, 而且都政, 必當設行於出去之前, 有何可慮云, 故院中亦以爲然矣。都政至今遷延, 而安胎吉日已迫, 聞槐院正字言, 則開基時, 旣以吏判之名告辭云, 今將何以爲之耶?

興慶曰, 舊例以二品定送, 而本無吏判必去之規云矣, 且豈有擧名告辭之事耶?

春躋曰, 戊辰年沈梓, 以行吏判出去矣。

上曰, 考見舊例, 則辛丑年刑判出去, 其後戊辰年, 沈梓以行吏判出去, 無必送吏判之規, 而卽今秋判務劇, 判尹在鄕, 工判篤老, 其他無可往之人矣。吏判雖不出去, 其前必不能設行都政, 而程途不甚遠, 吏判往來, 應不遲久, 今旣已定, 何必變通耶?

諸臣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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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98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4월 24일 갑자(甲子) 23/23 기사



『승정원일기』 798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4월 27일 정묘(丁卯) 17/2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내일 陪胎할 때 宣仁門을 捲草할 때의 例에 따라 열도록 兵曹에 分付하라는 傳敎》

傳于鄭必寧曰, 明日陪胎時宣仁門, 依捲草時例開門事, 分付兵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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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98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4월 27일 정묘(丁卯) 17/26 기사



『승정원일기』 799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윤 4월 10일 기묘(己卯) 22/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待罪하지 말라고 慶尙監司의 狀啓에 대해 내린 傳敎》

以慶尙監司狀啓, 安胎時不能及期眼同待罪事, 傳于洪尙賓曰, 勿待罪事, 回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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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99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윤 4월 10일 기묘(己卯) 22/24 기사



『승정원일기』 799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윤 4월 15일 갑신(甲申) 22/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乙卯閏四月十五日卯時, 上御宣政殿常參, 行都承旨李春躋, 左承旨洪尙賓, 右承旨柳萬重, 左副承旨鄭必寧, 右副承旨南泰慶, 假注書南鶴宗·李長夏, 記事官鄭東說·宋儒式, 同爲入侍時,

… (중략) …

寅明曰, 臣以安胎使下去矣。新胎峯, 有文宗大王胎室, 故奉審則蓮花石·欄干石, 竝皆依舊, 欄干一面石色頗異, 而要皆無大段毁傷, 修改不至時急, 其處山谷深峻, 石材運入極難, 若欲一竝修改, 則功力甚鉅, 民弊必多, 旣無表石, 此則雖不可不刻立, 而其他石役, 姑觀前頭爲之, 恐無妨矣。

在魯曰, 欄干橫石兩面, 元無稜與他面之八稜者有異, 且不正圓, 有同無隅石, 其中一石, 又有腰折細痕, 不無前頭折墮之慮, 若以其不甚緊急, 竝與表石新設而姑徐, 則可也。若設表石, 則此兩石, 似不可不同時改設, 石樣不大, 工亦不大段矣。

上曰, 旣無表石, 則當爲新設, 而其他不得不修改者, 同時修改,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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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99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윤 4월 15일 갑신(甲申) 22/22 기사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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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동원건축사사무소, 『명봉리 조선왕실 태실유적 복원 기본설계 및 종합정비계획』, 예천군, 2015.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