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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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태실(仁宗 胎室)
경북 영천 치일리 인종대왕 태실 전경
식별자 PC010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인종 태실
한자명 仁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Injong
피안자 명칭 인종(仁宗)
피안자 이칭 이호(李岵)·자(字) 천윤(天胤)·효릉(孝陵)
피안자 부 중종(中宗)
피안자 모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
피안자 생년월일 1515.02.25
피안자 몰년월일 1545.07.01
안태지 좌표(위도) 35°99'72.9"N
안태지 좌표(경도) 128°77'68.4"E
안태지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번지
문화재 지정여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
이안 연월일 1929.05(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皇明正德十年,二月二十五日戌時生,世子峼胎,正德十六年,正月十七日,午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태실 인근 소재 구(舊) 인종 태실 석재군
태항아리 인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편집]

조선 제12대 국왕 인종의 태실이다.

전하는 태지석에는 1521년(중종 16)에 안태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록 기록으로는 1517년(중종 12)에 이미 안태와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이 때 안태지는 경기 인근을 물색하고 마땅한 자리가 없으면 하삼도 지역의 명당을 찾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영천이 낙점된 것으로 보인다. 1529년(중종 24) 이미 영천에 위치한 태자의 태실에 화재가 발생하여 태봉을 담당하는 산지기에게 죄를 물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인종 태실의 가봉은 1545년(명종 1) 4월에 이루어졌다. 인종의 재위가 채 1년이 안되었기 때문에 태실 가봉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은 자신의 태실을 가봉하며 형왕인 인종의 태실 역시 국왕 태실로 가봉한 것으로 보인다.

인종 태실 인근에는 은해사가 수호사찰로 기능하였다. 숙종 때 이미 종친부에 소속된 사찰이었으며, 영조 때 왕실 원당으로 삼아 인종 태실을 수호하는 것을 담당하게 했다. 지금도 은해사 앞에 하마비가 있다. 한편 인종 태실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로 지정되어있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중종실록』30권, 중종 12년(1517) 11월 23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유용근 등이 혼인의 풍속·증고사의 일에 관해 아뢰다》

정광필이 아뢰기를,

"원자(元子)의 태봉(胎封)은 가리지 않을 수 없겠으나, 이 때문에 그 폐단이 그대로 계속되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또 반드시 집도 없고 전지도 없는 곳에 터를 잡는다면 백성에게도 억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경기(京畿)에서 가릴 만한 곳이 없으면 하삼도에 지리관(地理官)을 보내어 감사와 함께 돌면서 가리게 하는 것도 경솔히 하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하고, 장령(掌令) 권벌(權橃)이 아뢰기를,

"지난해 경산(慶山) 땅에 안태(安胎)할 때에 신이 차사원(差使員)으로서 친히 보았습니다. 안태하는 근처는 다 묵히게 하였으므로 그 곁에 집이나 전지를 가진 백성이 모두 울부짖었는데, 안태하고 나서는 다 백성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미리 한계를 정했더라면 백성도 미리 알아서 심하게 소동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피차를 분간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먼저 소요하니, 이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풍수의 설은 본디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안태하는 일 역시 관계될 것이 없는 일인데 백성만 소요하게 하니, 먼저 한계를 정하도록 하라."

하매, 유용근이 아뢰기를,

"화를 당하고 복을 받으며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데에는 반드시 하늘이 정한 바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다 보탬이 없는 일입니다. 원자라면 오히려 땅을 가려야 하겠으나, 번번이 그렇게 한다면 땅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고, 벌(橃)이 아뢰기를,

"화복(禍福)의 설이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상시 사대부의 집에서는 아들을 낳거나 딸을 낳거나 태는 죄다 불에 태우니, 이것은 화복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예전 관례를 따라 예사로 하는 일인데 과연 보탬이 없으니, 유사(有司)에 물어서 다시 처치할 방법을 생각하도록 해야 하겠다."

하였다.

光弼曰: "如元子胎封, 不可不擇, 以此其弊因循, 已久矣。 且必於無家舍、無田地處占之, 則民亦無冤。 且於京畿, 無可擇之地, 然後遣地理官於下三道, 與監司同巡擇之, 亦非所以輕之也。"

掌令權橃曰: "去年於慶山地安胎時, 臣以差使員親見之, 安胎近處, 皆使陳荒, 故民之有家舍、田地于其傍者, 咸呼號哭泣, 及其旣安, 皆還于民。 若預定其界限, 則民亦預知而不甚騷動。 今則不然, 不分彼此, 故民先騷擾。 此甚不當。"

上曰: "風水之說, 固不可信, 其事亦不關係, 而使百姓騷動, 先定其界限, 可也。" 庸謹曰: "禍福壽夭, 必有天定, 此皆無益。 若於元子, 則猶可擇地, 若每如此, 則地亦不足矣。"

橃曰: "禍福之說, 有何所關? 常時士大夫之家, 其於生男、生女, 胎則盡焚之於火。 此非有係於禍福也。"

上曰: "此因循例事而爲之, 果無益也。 當問于有司, 思所以更處之,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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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30권, 중종 12년(1517) 11월 23일 을미(乙未) 1번째 기사


『중종실록』30권, 중종 12년(1517) 11월 23일 을미(乙未)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봉태할 땅을 찾는 것과 관찰사를 잉임하는 일에 관해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봉태(封胎)할 땅은 먼저 동문·서문 밖에 터를 가리되 문 밖에 마땅한 곳이 없거든 하룻길이나 이틀길 되는 곳에 가리고, 하루나 이틀길을 넘지 말라. 상장(喪葬)에 있어서 터를 가릴 때에도 먼데서 찾을 것이 없는데, 더구나 이 일이겠는가? 하삼도에 보낼 것 없다. 또 태가 묻힐 땅 근처의 전지를 묵히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백성이 모르므로 혹 소요가 많다. 이것도 큰 폐단이니 먼저 그 한계를 정하도록 하라. 또 경기에 마땅한 곳이 없으면 하삼도에서 가리더라도 증고사를 보낼 것 없다. 외람된 짓을 하지 않을 상지관(相地官)을 가려 보내어 그 도의 감사와 함께 돌면서 한꺼번에 터를 가리도록 하라."

하고, 또 정원에 전교하기를,

"관찰사(觀察使)는 다들 잉임(仍任) 할 것은 없으나, 그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자가 있다면 잉임하는 것도 괜찮으니, 의정부(議政府)의 낭관(郞官)을 불러 합좌(合坐) 때에 묻게 하라. 또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바야흐로 직사(職事)에 마음을 다한다 하는데, 이 도는 땅이 크고 백성이 많아서 기년(期年)안에는 백성의 고통을 혹 죄다 알 수 없으니, 잉임하여 백성이 그 참된 혜택을 입도록 할 것인지도 아울러 묻게 하라."

하였다.

傳于政院曰: "封胎地, 可先於東、西門外擇地, 門外無可當地, 則或一日程, 或二日程, 無過一二日程。 凡喪葬擇地, 猶不必求之於遠, 況此事乎? 不必爲遣於下三道也。 且胎封之地, 凡田地陳荒, 亦有畿限, 而民不之知, 或多騷擾。 此亦弊之大者, 可先定其界也。 且若於京畿無可當之地, 則雖擇於下三道, 不必遣證考使也。 相地官, 擇不泛濫者遣之, 與其道監司同巡, 一時擇地, 可也。"

又傳于政院曰: "觀察使, 不必皆仍任也, 其間若有出類拔萃者, 則亦可仍之。 其招議政府郞官, 令於合坐時問之。 且聞慶尙道觀察使金安國, 方盡心職事。 是道地大民多, 期年之內, 民瘼或未能盡知之。 可仍任, 使民蒙其實澤。 其竝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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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30권, 중종 12년(1517) 11월 23일 을미(乙未) 2번째 기사


『중종실록』65권, 중종 24년(1529) 7월 14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세자 태실의 실화 죄를 물어 영천 군수 허증을 체직시키다》

형조(刑曹)의 공사(公事)【영천(永川)에 사는 산지기 김성문(金性文)과 박만수(朴萬壽) 등이 세자(世子)의 태실(胎室)을 삼가 수직(守直)하지 못하여 실화(失火)한 죄로 장 일백(杖一百)을 받았고, 군수 허증(許磳)은 삼가 규검하지 못하여 실화한 죄로 장 칠십(杖七十)에 처하고 수속(收贖)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소방(疏放) 전의 일이었다.】를 정원에 내리면서 전교하였다.

"평상시 태반(胎盤)을 태봉(胎封)할 적에는 그 택일(擇日)을 능묘(陵廟)의 일과 달리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겨서이다. 예조의 공사를 보건대, 수백 보나 태웠으니 지극히 놀랍다는 내용으로 공사를 만들었다. 과연 태실(胎室)이 불탄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수령 및 산지기들을 모두 소방령(疏放令)이 내리기 전의 일로 조율(照律)하였지만, 지금 별도로 추론(追論)해서 죄줄 수는 없겠다. 그리고 그 수령이 죄가 없다는 것은 위에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세자의 태봉(胎峯)에 대해서는 평상시에도 근신하여 지켜야 하는 것인데, 잘 규찰(糾察)하지 못하여 실화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중하다는 것을 보이려면 달리 예(例)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 수령을 체직시켜야 한다. 그러면 뒷사람들이 반드시 ‘과거에 수령이 실화 때문에 체직당한 일이 있다.’ 하면서, 징계하는 마음을 지닐 것이다. 군수는 체차(遞差)시키라."

下刑曹公事, 【永川居山直金性文、朴萬壽等, 世子胎室, 不謹守直, 致令失火, 罪各杖一百。 郡守許磳, 不謹檢擧, 致令失火, 罪杖七十收贖。 竝疏放前事。】 傳于政院曰: "常時安胎。 擇日等事, 與陵廟無異者, 重其事也。 見其禮曹公事, 以連燒數百步, 至爲駭愕事, 爲公事。 果若延燒胎室, 則焉有如此之事乎? 今此守令及山直人等, 皆以疏放前事照律, 今不可別爲追論而罪之。 且其守令之無罪, 自上亦非不知。 但世子(胎峯)〔胎封〕 , 在常時所當謹愼守直, 而不能糾檢, 以致失火。 若欲示此事之重, 則不可以他例爲之。 今遞其守令, 見後人必以爲曩者守令, 以失火被遞, 而有懲戒之心矣。 郡守遞差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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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65권, 중종 24년(1529) 7월 14일 정미(丁未) 2번째 기사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9월 16일 갑술(甲戌) 4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영의정 김근사 등이 영천의 태실 방화 사건과 박연 폭포 행행의 일에 대해 아뢰다》

영의정 김근사(金謹思)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경상도 관찰사 【이사균(李思鈞)임.】 의 계본(啓本) 【 태실(胎室)의 석물(石物)을 깨뜨려 훼손한 사건임.】 을 보았는데 매우 해괴하고 경악스럽습니다. 이 사건은 반역(反逆)과 다를 것이 없으니 경차관만을 파견하여 추고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 계본에는 비록 ‘수령을 해치려고 계략을 꾸민 것이다.’고 했습니다. 산지기의 공초(供招) 안에는 ‘전에도 여러 번 불을 질렀다.’고 했으니 참으로 수령을 해치려고 계략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만약 수령을 해치려고 했다면 반드시 관아 창고에 불을 질렀을 것이지 어찌 꼭 태실에다 불을 질렀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의금부(義禁府)의 낭관을 보내어 잡아다가 추고해서 명백하게 죄명(罪名)을 정하여 다스리소서. 또 박연에 관한 일은 신들이 전번 의논에서 이미 그 대개를 말씀드렸기 때문에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시종(侍從)과 대간의 말이 곧 정론(正論)이니 그 말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였다.

"영천(永川) 사람의 범행은 매우 해괴하고 경악스럽다. 처음에 잡아다가 추문하려고 했으나 다만 범인이 도망가 있었다. 또 그 정범인(正犯人)을 잡아올 경우는 도망하거나 혹은 그 죄가 중한 줄 알고 자살할까 염려가 되었고 그리고 사간인(事干人)들이 외방에 많이 있기 때문에 경차관을 보내도록 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당장 잡아다가 추문하여 중한 법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경차관을 보내지 말고 의금부 낭관을 보내어 잡아다가 추문하라.

그리고 대간이 논하는 점은 나도 헤아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저 지난 갑오년에 성종(成宗)께서 이 고도(古都)에 행행하셨는데 그후 지금까지 62년이 되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후대에도 이곳에 행행하는 일은 역시 드물 것이다 전례를 끌어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평소에 편안하게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고도의 유적을 두루 살펴보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하다. 윤허하지 않는다."

領議政金謹思等啓曰: "臣等見慶尙道觀察使 【李思鈞】 啓本, 【胎室石物打毁事。】 至爲駭愕。 此擧亂逆無異, 不可只遣敬差官, 而推之也。 此雖曰謀害守令, 然其山直招內云: ‘目前亦累〔有〕 衝火云爾, 則固非謀害守令之事也。 若欲害守令, 則必當衝火於官庫, 豈必於胎室乎? 此固前古所無, 請遣義禁府郞官, 拿致而推之, 明正定罪。 且朴淵事, 臣等於前議, 已盡其大槪, 無可更啓也, 侍從、臺諫之言, 乃正論也。 請勉從。"

答曰: "觀永川人所犯, 至爲駭愕。 初欲拿推, 而但其在逃, 且其正犯人捉來之時, 或爲逃躱, 或知其罪重, 而自死, 又其事干, 多在於外, 故命遣敬差官矣。 然此事至重, 當拿推, 而明示重典也。 勿遣敬差官, 而遣禁府郞官, 拿來推之。 且臺諫所論, 予非不計也, 二去甲午年, 成宗幸此都, 到今六十二年。 由是觀之, 後世幸此都, 亦當稀罕也。 援引前例, 雖未可知也, 予素不好逸豫。 此古都, 歷觀遺迹, 似不妨也。 不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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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9월 16일 갑술(甲戌) 4번째 기사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10월 17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추고 경차관 안현이 영천 사건과 관련한 유지와 사목의 일 등에 대해 아뢰다》

추고 경차관(推考敬差官) 안현(安玹)이 아뢰기를,

"사목(事目)은 신이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로 있을 때 보니 태실(胎室)이 있는 산은 매우 깊고 험악하고 그 옆에 사는 백성들 역시 많지 않았습니다. 삼공형(三公兄)과 삼색장(三色掌) 등이 만약 경관(京官)이 내려온다는 말을 들으면 두려워 도망할 폐단이 있으며, 수령(守令) 【영천 군수(永川郡守) 홍우석(洪羽錫)임.】 역시 자기의 잘못을 헤아리고 정직하게 공초(供招)할 사람들을 숨길 것이니, 그러면 공초할 수 없습니다. 비록 비밀스럽게 본도의 감사에게 관자(關字)265) 를 보낸다 하더라도 중도에서 열어보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수령은 감사의 말이 아니면 듣지 않으니, 의심스런 사람을 우선 잡아 가두라는 일을 본도 관찰사에게 유지(有旨)하고,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서 경차관의 말을 듣지 않거나 죄인 체포에 힘쓰지 않으면 치죄(治罪)한다는 내용도 아울러 사목(事目)에 넣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죄인 가운데 공신(功臣)이나 의친(議親)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유지(有旨)하는 일과 사목(事目)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공신과 의친에 대해서도 계품(啓稟)한 후에 형추하면 일이 늦어질 것이니, 만약 어긋난 단서가 있거든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내야 한다."

乙巳/推考敬差官安玹啓曰: "事目則臣時未及見之矣, 臣爲慶尙都事時見之, 胎室之山, 極爲深險, 傍居之民, 亦不多矣。 三公兄、三色掌等, 若聞京官之下去, 則恐有驚懼、逃匿之弊, 而守令 【指永川郡守洪禹錫。】 亦自計其曲, 其可直招者, 匿之則不可矣。 雖通秘密關字于本道監司, 然中路開見, 不可謂無也。 守令非監司之言, 則不聽, 可疑人先捕囚禁事, 有旨于本道觀察使, 而隣邑守令, 不聽敬差官之言。 不盡力捕捉罪人者, 治罪事, 竝入事目何如? 且罪人中, 有功臣議親者, 則何以爲之?"

傳曰: "有旨事及事目事, 如啓。 有功臣議親者, 若待啓稟之後, 刑推則事緩矣。 若有違端, 刑推得情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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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10월 17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12월 16일 임인(壬寅)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우부승지 박홍린이 영천 사건 죄인들의 일에 대해 아뢰다》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홍린(朴洪鱗)이 금부의 추국에 참여하고 위관(委官)의 뜻으로 아뢰기를,

"영천(永川)의 죄수들을 추국하니, 대개는 승복하였으나 그 사이의 말과 날짜에 많은 착오가 있습니다. 대저 이 일이 수령(守令)과 원한이 있어서 저지른 것이 아닌 듯하기 때문에 경차관을 특별히 보내어 상세히 추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차관이 이제 벌써 네 차례의 형신을 하였어도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윤말금(尹末金)은 괴수라고는 하지만 그도 송사의 일로 수령과 원한을 가져 지금 도피 중이라고 합니다.

비록 말금을 나포하더라도 사실을 알아 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외방에 나포할 때까지 우선 보석을 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중 조숭(祖崇)이라는 자는 태실(胎室) 근처에 살고 있고, 은해(銀海)의 일은, 그가 늘 말금과 친하게 지내다가 지금은 회암사(檜巖寺)에 피신하여 가 있다고 합니다. 나포하여다 추문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壬寅/右副承旨朴洪鱗, 參鞫於禁府, 以委官意啓曰: 永川罪囚等推之, 則大槪承服, 而其間言辭、日月, 多有差錯。 大抵此事, 似非嫌怨守令之所爲, 故特遣敬差官, 詳悉推閱, 而敬差官, 今已刑訊四次, 亦未得實, 而尹末金, 雖稱爲魁首, 然亦以訟事間事, 嫌怨太守, 而在逃云。 雖捉末金, 似難得情。 外方分囚事干等, 如此凍天, 被囚已久, 末金搜捕間, 姑令保放何如? 且僧人祖崇者, 居胎室近處, 銀海事, 常與末金交親, 而今者移避, 來寓于檜巖寺云。 請拿來推問。"

傳曰: "如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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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12월 16일 임인(壬寅) 1번째 기사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12월 18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영의정 김근사 등이 영천의 옥사에 대해 논하다》

영의정 김근사, 좌의정 김안로, 우의정 윤은보, 좌찬성 유보, 우찬성 황사우, 지의금부사 심언경, 우참찬 김인손, 동지사 권예와 허흡, 대사헌 허항, 대사간 채무택, 사간 권기, 집의 정만종, 장령 이이와 임붕, 헌납 이몽필, 지평 조사수와 정희렴, 정언 이팽수와 노한문 등이 의논드리기를,

"영천(永川)의 옥사(獄事)는 신인(神人)이 공노할 일입니다. 진실로 통쾌한 처벌을 내려 분노를 가시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초 본군(本郡)이 옥사를 일으킬 적에 의문이 갈만한 단서는 다루지 않고, 그가 지난날 고을 원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원한을 품었을 것이라는 하나의 단서만을 가지고서 거기에 심증을 두고 끝까지 다스리고자 하여, 아전을 시켜 김막동(金莫同)을 꾀어 그 일에 증거를 서게 한 사실이, 이제 김막동이 초사(招辭)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세 차례의 형신에서 비록 다 실토를 하기는 했으나, 저마다의 공술한 내용에서 날짜·물건·사람수·절차 등이 각기 현격하게 달랐는데, 서로 다른 그 공초(供招)를 가지고 끝까지 심문하여 하나로 귀결지으려 함에 미쳐서는 그들도 하나로 귀결시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묻는대로 승복을 하여 초사의 내용이 서로 엇갈리는가 하면,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으로 판단하여 장이 내리는 것만 두려워하고 순간의 목숨이라도 더 연장하고자 다시는 변대(辨對)를 하지 않으니, 불쌍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하여 사실을 캐낼 수는 없을 듯합니다.

당초 옥사를 일으킬 적에 벌써 저처럼 근거가 없었고, 의금부가 끝까지 형신을 하여 승복을 받았다 하여도 이처럼 믿기가 어려우며, 또 근본적으로 그 범죄의 수법을 분석해 보아도 받침을 부수고 머리를 꺾으며 조각(雕刻)을 잘라버리는 행위는 흉악하기 이를데 없으니 참으로 지나다가 순간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고 반드시 거기에 쌓인 감정이 있어서였습니다.

그것이 어찌 고을 원에게 원한을 품은 자의 소행이겠습니까. 그 정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참으로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도 서둘러 판결을 내려 큰 형벌을 씌운다면 흉인(凶人)이 법망을 빠져 나가 곁에서 엿보고 속으로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옛부터 흉역(凶逆)이란 처음에는 참시 도망쳤다가도 끝내는 나타나고야 마는 것이므로, 아직은 인명을 소중히 여기는 어지심으로 자수하여 나올 때를 기다려 보는 것이 성군의 인자한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서로 멀지 않으므로, 함께 모의하지는 않았다 하여도 흉인이 드나드는 것은 알 수 있을 터인데도 그것을 발각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태봉(胎峰)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 및 수직(守直)한 자도 모두 함께 벌을 주어 뒷날을 경계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領議政金謹思、左議政金安老、右議政尹殷輔、左贊成柳溥、右贊成黃士祐、知義禁府事沈彦慶、右參贊金麟孫、同知事權輗ㆍ許洽、大司憲許沆、大司諫蔡無擇、司諫權祺、執義鄭萬鐘、掌令李頤ㆍ林鵬、獻納李夢弼、持平趙士秀ㆍ鄭希廉、正言李彭壽ㆍ盧漢文議曰: "永川獄事, 神人共怒。 固當快置典刑, 以謝其憤。 但當初本郡起獄, 不因可疑之緖, 只以宿昔受罪, 有怨邑宰, 乃欲憑此窮治, 使吏敎誘金莫同, 俾證其事, 乃見於金莫同之招。 今又訊至三次, 雖若輸服, 各人所供, 日月器具, 人數節次, 皆爲懸異。 逮擧異招, 窮詰歸一之時, 務欲歸同, 隨問隨服, 其辭意錯亂, 自分必死, 唯畏下杖, 欲延須臾之命, 不復辨對, 似可悶惻。 恐不可以此得實了情也。 厥初起獄, 旣無據如彼, 禁府窮訊, 雖曰承服, 其難取信, 又如此, 且原究其迹, 碎趺折首, 又斷其鐫, 其凶已甚, 固非造次過去者之所爲, 包畜必有其地。 此豈咎怨邑宰者之爲哉? 究情察狀, 誠有可疑, 遽以斷獄, 當以大律, 則恐凶人漏網, 傍窺竊笑也。 自古凶逆, 初雖暫逭, 終必敗露, 姑用不(輕)〔經〕 之仁, 以待自速之誅, 似合於聖朝欽恤之意。 但此人等, 所居不遠, 雖不自與謀, 兇人出入, 宜可知之, 而若不發覺, 豈得無罪? 胎峰傍近處居人及直守者, 竝皆徵治, 以戒後來何如?"

傳曰: "如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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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종실록』80권, 중종 30년(1535) 12월 18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


『명종실록』3권, 명종 1년(1546) 3월 25일 임오(壬午) 4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윤인경이 고향으로 내려간 관상감 제조 이언적의 체직을 청하니 윤허하다》

영상 윤인경이 아뢰기를,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는 2원(員)뿐인데 이언적(李彦迪)은 고향으로 내려갔고 신영(申瑛)은 80이 된 노모(老母)가 있다고 합니다. 새달에는 영천(永川) 땅의 태실(胎室)을 간심(看審)할 일이 있는데 신영은 노모 곁을 멀리 떠날 수 없고 이언적 역시 쉽게 올라오지 못할 것이니, 이언적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領相尹仁鏡啓曰: "觀象監提調, 只有二員, 李彦迪下鄕, 申瑛有八十老母。 來月將有永川地胎室看審事, 而瑛不可遠離老母, 彦迪亦未易上來, 請遞彦迪。"

答曰: "如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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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3권, 명종 1년(1546) 3월 25일 임오(壬午) 4번째 기사


『명종실록』3권, 명종 1년(1546) 4월 22일 무신(戊申) 3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사헌부가 인종 태봉의 돌 난간을 고치는 일을 추수 후로 미룰 것을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인종 대왕 태봉(胎峯)의 돌 난간을 고쳐 배치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므로 작은 폐단을 따질 수 없습니다. 지금 경상 감사의 계본(啓本)을 보니, 거기에 쓰이는 돌을 7식(息)098) 혹은 4식의 거리에서 가져오기 때문에 운반 과정에서 밭 곡식을 짓밟게 되면 굶주린 백성들이 무엇으로 살아가겠느냐고 했는데, 그 일이 비록 부득이한 일이나 민생의 곤췌(困瘁)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달 더 늦추었다가 추수가 끝난 후하게 하고, 서산(瑞山) 태봉 명종 태실 의 역사도 추수 후에 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憲府啓曰: "仁宗大王胎峯石欄干改排, 事甚重大, 不可計小弊矣。 今見慶尙監司啓本, 所用之石, 取來於七息或四息之程, 輸曳之際, 踏損田穀, 則飢饉之民, 何以聊生? 此雖不得已之擧, 民生困瘁, 亦不可不慮。 請姑緩數月, 以待秋成之後, 瑞山胎峯之役, 【今上胎室。】 亦於秋收後爲之。"

傳曰: "如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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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3권, 명종 1년(1546) 4월 22일 무신(戊申) 3번째 기사


『명종실록』3권, 명종 1년(1546) 4월 23일 기유(己酉) 5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 판서 윤개가 인종의 태실 조성을 그대로 행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예조 판서 윤개(尹漑)가 아뢰기를,

"지금 경상 감사 안현(安玹)의 서장(書狀)을 보니 영천(永川)의 태실(胎室)인종 태실 돌 난간이 절반이나 이미 조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대간(臺諫)들이 정역(停役)을 계청(啓請)하였더라도 대신과 의논하여 역사를 마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토석(土石)이 이미 갖추어졌는데 정지했다가 다시 역사를 벌이게 되면 오히려 민력(民力)을 거듭 피곤하게 할 것이니, 사헌부를 불러 이러한 뜻을 이르라." 하였다.

禮曹判書尹漑啓曰: "今觀慶尙監司安玹書狀, 永川胎室 【仁宗。】 石闌干, 半已造作云。 雖臺諫啓請停役, 議于大臣畢役何如?"

傳曰: "土石已具, 停而更役, 重困民力, 招司憲府言此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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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3권, 명종 1년(1546) 4월 23일 기유(己酉) 5번째 기사


『명종실록』4권, 명종 1년(1546) 8월 4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삼공과 금부 당상에게 표류해 온 중국인을 탕참에 인계할 것을 명하다》

삼공과 금부 당상을 명소(命召)하여 전교하기를,

"지금 표류해 온 중국인은 포로가 된 중국인의 전례에 따라 탕참에 인계하고 요동에 이자하는 것이 편리할 듯하다. 만약 매번 주문한다면 혹 은상(恩賞)을 바란다는 기롱을 받을까 염려된다. 정사룡이 아뢴 말이 나의 뜻에 부합되니, 지금부터는 주문하지 말고 다만 탕참에 인계하도록 하라."

하니, 회계하기를,

"표류해 온 사람에 대해 매번 주문하여 은사를 입게 되면 바로 사은(謝恩)해야 하므로 많은 폐가 있으니, 탕참에 인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문이(文伊)·문수(文守) 등을 조율하는 일에 대하여는 【인종의 태실(胎室)의 돌난간을 때려부순 일이다.】 정률(正律)이 없습니다. 만약 산릉(山陵)을 헐은 죄에 비하면 태실(胎室)과 산릉(山陵)은 차이가 있고, 부득이 제서(制書)를 기훼(棄毁)한 율(律)에 비하면 수범(首犯)은 참형(斬刑)에 처해야 하는데, 그 수범 윤말(尹末)은 이미 장하(杖下)에 죽었고 종범(從犯) 문이 등은 그 사건이 유지(宥旨) 이전에 있었으니, 이제 의당 몽유(蒙宥)되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命召三公禁府堂上, 傳曰: "今來唐人, 如被虜唐人之例, 交割湯站, 移咨遼東爲便。 每若奏聞, 恐有希恩望賞之譏。 士龍之啓, 正合予意, 自今勿爲奏聞, 只交割湯站。" 回啓曰: "漂流人, 每爲奏聞, 若蒙恩賜, 旋復謝恩, 多有弊事, 交割湯站, 果當。"

且啓: "文伊、文守等照律事, 【打破仁宗胎室石欄干者。】 無正律。 若以謀毁山陵比之, 則胎室與山陵有間, 不得已以棄毁制書律比之, 則首者斬, 而其首尹末, 已死於杖下, 從者文伊等, 事在宥旨前, 今當蒙宥矣。"

答曰: "依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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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4권, 명종 1년(1546) 8월 4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



연려실기술[편집]

『연려실기술』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선조조명신(宣祖朝名臣)》[편집]

Quote-left blue.png 《정종영(鄭宗榮)》

임술년(1562)에 경상 감사가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의 가까운 친속과 문객이 수령이 되어 세력을 믿고 탐욕을 부리고 있었는데, 원형이 성대한 송별연을 베풀고 부탁했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너그러이 봐주지 않고 전최(殿最)에서 하고(下考)에 두었다. 또 요망스러운 중이 대비의 명이라 칭탁하고 인종(仁宗)의 태봉(胎封)의 나무를 거의 다 베 간 것을 공이 또한 엄하게 다스려 죽기에 이르자, 대비가 크게 노하여 체직을 명하였다.

任戌爲嶺南伯時, 尹元衡切屬, 及門客爲守令恃勢貪號饕, 元衡爲設盛餞而托之, 公不少饒悉置之殿。 又妖僧稱內旨伐, 仁宗胎封樹木殆盡, 公亦嚴治於死, 內殿震怒命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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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려실기술』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선조조명신(宣祖朝名臣)》



대동야승[편집]

『대동야승』, 「청강선생 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청강선생 사제록(淸江先生思齊錄)》[편집]

Quote-left blue.png 《청강선생 사제록(淸江先生思齊錄)》

상영부사(尙領府事)가 일찍이 정옥형과 같이 인종의 태봉(胎峯)을 경상도에서 감정할 때에, 함창(咸昌)원으로 있는 이는 두 정승의 옛날 친구였다. 그는 술을 권하려다가 먼저 취하여 오줌을 싸서 자리에 흘렀다. 정 찬성이 상 정승에게 가리켜 보이며 서로 보고 웃었더니, 그 원은 곧 동헌으로 들어가고 파하였다.

尙領府嘗同丁相, 監仁廟胎峯于慶尙。有咸昌倅兩相舊知也。欲勸酒而先醉, 因失溺流于座。丁相指尙相使見之, 相視而笑, 主倅因入衙而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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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동야승』, 「청강선생 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청강선생 사제록(淸江先生思齊錄)》



용재집[편집]

『용재집』, 「행장(行狀)」, 《이행(李荇) 행장》[편집]

Quote-left blue.png 《이행(李荇) 행장》

2월에는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고, 10월에는 세자 우부빈객을 겸임하였으며, 가을에는 증고사(證考使)가 되어 호남과 영남으로 갔다.

二月, 兼同知義禁府事, 十月, 兼世子右副賓客, 秋, 爲證考使湖嶺二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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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용재집』, 「행장(行狀)」, 《이행(李荇) 행장》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전자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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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禮曹), 『태봉등록(胎封謄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편,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