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친왕 묘

SeosamneungWiki.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메인 화면으로 돌아가기


완친왕묘(完親王墓)
서삼릉 숙의 분묘 집장지 완친왕 묘
식별자 RT026
분류 분묘
한글명 완친왕묘
한자명 完親王墓
영문명 Tomb of Prince Wan of the Empire
피장자 명칭 완친왕(完親王)
피장자 이칭 이선(李墡)
피장자 부 고종(高宗)
피장자 모 영보당(永寶堂) 이씨(李氏)
피장자 생년월일 1868.윤4.10
피장자 몰년월일 1880.01.12
초장 연월일 1880.03.07
초장지 기록 양주 치남(治南) 월곡(月谷) 완친왕묘표석
초장지 기록1 양주 월곡 선원계보기략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광복 이후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장지 좌표(위도) 37°40'0.00"N
이장지 좌표(경도) 126°52'0.00"E
지문 有明朝鮮國 王子 領宗正卿府事 完和君 贈諡孝憲公墓
지문 찬자 조영하(趙寧夏)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내용[편집]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 소생 완친왕 이선(1868~1880)의 묘 이다.

1876년(고종 13) 완화군(完和君)에 봉해졌고 동시에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제수되었다. 1877년(고종 14) 관례를 거행하였고, 1880년(고종 17)에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 효헌(孝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907년(순종 즉위년) 완왕(完王)에 봉해졌다. 완친왕은 처음에 양주 월곡에 안장되었다가 광복 이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편집]

『고종실록』권5, 고종 5년(1868) 윤4월 10일 정사(丁巳)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궁인 이씨가 왕자를 낳다》

전교하기를,

"오늘 진시(辰時)에 궁인(宮人)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았다. 산모를 보살펴주는 등의 일을 운현궁(雲峴宮)에서 대령하라."

하였다.

敎曰: "今日辰時, 宮人李氏生男。 護産等節, 待令于雲峴宮。"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5, 고종 5년(1868) 윤4월 10일 정사(丁巳)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3,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왕자 이선을 완화군으로 봉하다》

전교하기를,

"왕자 이선(李墡)을 완화군(完和君)으로 봉하라."

하였다.

敎曰: "王子墡, 完和君封爵。"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3,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3,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이선을 영종정경에 단부하다》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을 영종정경(領宗正卿)에 단부(單付)하였다.

完和君 墡, 單付領宗正卿。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3,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0월 13일 갑오(甲午)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이선이 진찬 때에 참가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이 이번에 진찬(進饌) 때에 응당 들어와 참가하도록 하고 관례(冠禮)의 길일(吉日)은 오는 12월 10일 이전으로 택하여 들이라."

하였다.

敎曰: "完和君 墡, 今番進饌時, 應爲進參。 冠禮吉日, 來十二月旬前擇入。"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0월 13일 갑오(甲午)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0월 16일 정유(丁酉)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이선의 관례 때 주관할 사람으로 종정경 이재면을 임명하다》

전교하기를,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의 관례(冠禮) 때 주관할 사람은 종정경(宗正卿) 이재면(李載冕)으로 하라."

하였다.

敎曰: "完和君 墡冠禮時主人, 以宗正卿李載冕爲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0월 16일 정유(丁酉)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1월 25일 병자(丙子)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의 관례를 거행할 때 주관자로 이재면 등을 임명하다》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의 관례(冠禮)를 거행할 때 주관자에 이재면(李載冕), 빈(賓)에 조병세(趙秉世), 찬(贊)에 김철희(金喆熙), 찬관(贊冠)에 조운긍(趙雲兢), 집관(執冠)에 김병휴(金炳休)를 모두 단부(單付)하였다.

完和君 墡冠禮時, 主人李載冕、賓趙秉世、贊金喆熙、贊冠趙雲兢、執冠金炳休, 竝單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1월 25일 병자(丙子)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2월 4일 갑신(甲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이선의 관례를 행하다》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行完和君 墡冠禮。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4, 고종 14년(1877) 12월 4일 갑신(甲申)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7, 고종 17년(1880) 1월 12일 경진(庚辰)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이선이 졸하다》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완화군(完和君)의 죽음은 슬프고도 슬프다. 예장(禮葬) 외에 필단(疋緞), 미포(米布) 등의 물건을 연령군(延齡君)의 전례(前例)에 따라 실어 보내고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골라 보내며 녹봉(祿俸)은 3년에 한하여 그대로 지급하라. 시호(諡號)를 주는 의식은 명정(銘旌)을 세우기 전에 하고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종신(宗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제문(祭文)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짓게 하며 중사(中使)를 보내서 호상(護喪)하게 하라."

하였다.

完和君 墡卒。 敎曰: "完和之喪, 慘矣慘矣。 禮葬外疋緞米布等物, 依延齡君例輸送。 東園副器一部擇送。 祿俸限三年仍給。 易名之典, 立旌前爲之。 成服日, 遣宗臣致祭。 祭文令文任撰出。 遣中使護喪。"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7, 고종 17년(1880) 1월 12일 경진(庚辰)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7,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이선에게 효헌이라는 시호를 내리다》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에게 ‘효헌(孝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贈諡完和君 墡孝憲。

Quote-right blue.png
출처: 『고종실록』권17,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2번째 기사



『순종실록』권1, 순종 즉위년(1907) 9월 13일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이완용이 흥선 대원군을 왕으로 봉하고 시호 대안을 올리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을 왕(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시호망(諡號望)을 ‘헌의(獻懿)’ 【밖으로 충성스럽고 덕스러운 것을 ‘헌(獻)’이라 하고 행실이 중앙과 지방에 나타난 것을 ‘의(懿)’라고 한다.】 로 하였으며,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을 비(妃)로 추봉하고 시호망을 ‘순목(純穆)’ 【똑바르고 화순한 것을 ‘순(純)’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리를 견지한 것을 ‘목(穆)’이라고 한다.】 으로 의논하여 결정해서 상주하니,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완화군(完和君) 이선(李墡)을 왕으로 추봉하고 왕호망을 ‘완(完)’자·‘헌(憲)’자로 의논하여 결정해서 상주하니, 왕으로 봉하는 칭호는 ‘완(完)’자를 쓰라고 주권(硃圈)하여, 그대로 따랐다.

內閣總理大臣李完用以 "興宣大院君, 追封王。 諡號望, ‘獻懿’ 【嚮忠內德曰獻, 行見中外曰懿】 ; 驪興府大夫人。 追封妃。 諡號望, ‘純穆’ 【中正和粹曰純, 布德執義曰穆】 。 議定上奏。" 恭依。 又以 "完和君 墡, 追封王號望, 完字憲字, 議定上奏。" 奉硃圈, 封號用完字欽此。

Quote-right blue.png
출처: 『순종실록』권1, 순종 즉위년(1907) 9월 13일 1번째 기사



『순종실록』권1, 순종 즉위년(1907) 10월 1일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이선을 완왕으로 추후하여 봉하다》

정사(正使)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과 부사(副使) 정2품 조동희(趙同熙)를 보내어 완왕(完王)을 추봉(追封)하고 이승응(李昇應)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遣正使完平君 李昇應、副使正二品趙同熙, 追封完王, 命昇應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순종실록』권1, 순종 즉위년(1907) 10월 1일 2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2726책(탈초본 128책), 고종 5년(1868) 윤 4월 10일 정사(丁巳) 3/2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왕자가 탄생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王子誕生後, 大殿·大王大妃殿·王大妃殿·大妃殿·中宮殿, 宗親·儀賓·藥房·內閣·政院·玉堂口傳問安。答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726책(탈초본 128책), 고종 5년(1868) 윤 4월 10일 정사(丁巳) 3/21 기사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10/2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왕자 이선(李墡)을 완화군(完和君)에 봉작하도록 비의하라.” 하였다.

傳曰, 王子墡, 完和君封爵下批。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10/25 기사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13/2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정원이 아뢰기를, “왕자 이선을 완화군에 봉작하는 일을 비의하도록 하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政院啓曰, 王子墡, 完和君封爵下批事, 命下矣。 政官牌招開政,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13/25 기사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22/2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겸판서 민규호, 참판 성이호, 참의 이면영이 모두 나왔다. 승지 - 원문 빠짐 - 이선을 완화군에 봉작하는 일은 전교에 의한 것인데, 영종정경부사에 완화군 선을 임명하였다.

有政。 吏批, 兼判書閔奎鎬, 參判成彝鎬, 參議李冕榮竝進, 承旨缺, 完和君單墡封爵事傳敎, 領宗正卿府事單完和君墡。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0일 신미(辛未) 22/25 기사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3일 갑오(甲午) 7/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이재순에게 전교하기를, “완화군 선(完和君墡)은 이번 진찬(進饌) 때에 응당 진참(進參)해야 할 것이니, 관례(冠禮)의 길일을 오는 12월 10일 이전으로 가려 들이라고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傳于李載純曰, 完和君墡, 今番進饌時, 應爲進參, 冠禮吉日, 來十二月旬前擇入事, 分付該曹。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3일 갑오(甲午) 7/18 기사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4일 을미(乙未) 19/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전교에, ‘완화군 선(完和君墡)은 이번 진찬(進饌) 때에 응당 진참해야 할 것이니, 관례(冠禮)의 길일을 오는 12월 10일 이전으로 가려 들이라고 해조에 분부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일관(日官) 최영원(崔榮遠)을 시켜 추택하게 하였더니, 오는 12월 4일 손시가 길하다고 합니다. 이 일시로 정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又以禮曹言啓曰, 傳曰, 完和君墡, 今番進饌時, 應爲進參, 冠禮吉日, 來十二月旬前擇入事, 分付該曹事, 命下矣。 令日官崔榮遠推擇, 則來十二月初四日巽時爲吉云。 以此日時定行,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4일 을미(乙未) 19/19 기사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6일 정유(丁酉) 6/1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심상목에게 전교하기를, “완화군 선(完和君墡)의 관례(冠禮) 때 주인(主人)은 종정경 이재면(李載冕)으로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傳于沈相穆曰, 完和君墡冠禮時, 主人以宗正卿李載冕爲之事, 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6일 정유(丁酉) 6/14 기사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9일 경자(庚子) 9/1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박용대가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완화군(完和君)의 관례(冠禮)의 길일은 이미 추택한 것이 계하(啓下)되었습니다. 관례를 행할 장소를 여쭈어 정해야 할 것인데, 삼가 등록을 상고하니, 숙종조 병술년 연령군(延齡君)의 관례 때에는 숙종조 계미년의 예에 따라 통화문(通化門) 안 동쪽 월랑(月廊)으로 정하여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곳으로 정하여 거행할 것인지를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병술년의 예대로 정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朴容大, 以禮曹言啓曰, 完和君冠禮吉日, 旣已推擇啓下矣。 冠禮處所, 當爲稟定, 而謹稽謄錄, 則肅宗朝丙戌延齡君冠禮時, 依肅宗朝癸未年例, 以通化門內東月廊定行矣。 今番則以何處所定行乎? 敢稟。 傳曰, 依丙戌年例定行。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9일 경자(庚子) 9/11 기사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9일 경자(庚子) 10/1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왕자가 관례에 처음 나올 때에는 으레 쌍동계(雙童髻), 직령(直領), 조대(條帶) 차림으로 하였습니다. 이번에 완화군이 관례에 처음 나오는 복색은 이대로 거행하되, 삼가복(三加服)은 초가(初加)에 오사모(烏紗帽), 흑단령(黑團領), 재가(再加)에 복두(幞頭), 공복(公服), 삼가에 양관(樑冠), 조복(朝服)이니, 이것들을 전례대로 빨리 장만하라고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又以禮曹言啓曰, 王子冠禮初出時, 例以雙童髻·直領條帶矣。 今此完和君冠禮初出服色, 則依此擧行, 而三加服, 則初加烏紗帽·黑團領, 再加幞頭公服, 三加樑冠朝服等物, 依前例急速措備事, 分付該曹,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43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0월 19일 경자(庚子) 10/11 기사



『승정원일기』2844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1월 25일 갑자(甲子) 12/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이조가 완화군 선(完和君墡)의 관례(冠禮) 때 주인(主人)에 이재면(李載冕)을 단부하였는데, 차출하라는 전교를 받은 것이다. 빈(賓)에 조병세(趙秉世)를 단부하고, 찬(贊)에 김철희를 단부하고, 찬관(贊冠)에 조운긍(趙雲兢)을 단부하고, 집관(執冠)에 김병휴(金炳休)를 단부하였다.

吏曹, 完和君墡冠禮時, 主人單李載冕差下事, 傳敎, 賓單趙秉世, 贊單金喆熙, 贊冠單趙雲兢, 執冠單金炳休。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44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1월 25일 갑자(甲子) 12/23 기사



『승정원일기』2845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2월 4일 갑신(甲申) 4/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정원이 아뢰기를, “빈(賓) 조병세(趙秉世)와 찬(贊) 김철희가 완화군(完和君)의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 복명한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政院啓曰, 賓趙秉世, 贊金喆熙, 完和君冠禮後復命云矣。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45책(탈초본 132책), 고종 14년(1877) 12월 4일 갑신(甲申) 4/18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2일 경진(庚辰) 2/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이 졸서(卒逝)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에 가설 약방(加設藥房), 내각, 정원, 옥당, 백관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完和君卒逝後, 大殿·大王大妃殿·王大妃殿·中宮殿·世子宮, 加設藥房·內閣·政院·玉堂·百官口傳問安。 答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2일 경진(庚辰) 2/24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9/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완화군 선의 상에 성복하는 날, 종신을 보내어 치제할 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 어느 종신을 나아가게 할까요?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종정경 이인설(李寅卨)을 나아가게 하라.” 하였다.

又啓曰, 完和君墡喪成服日, 遣宗臣致祭事, 命下矣。 何宗臣進去乎? 敢稟。 傳曰, 知宗正卿李寅卨進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9/20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10/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완화군 선의 상에 성복하는 날, 근시(近侍)를 보내 치조(致弔)할 일에 대한 예조의 단자를 계하하셨습니다. 어느 승지를 나아가게 할까요? 감히 여쭙니다.” 하니, 우승지가 나아가라고 전교하였다.

又啓曰, 完和君墡喪成服日, 遣近侍致弔事, 禮曹單子, 啓下矣。 何承旨進去乎? 敢稟。 傳曰, 右承旨進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10/20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11/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완화군 선의 시망(諡望)을 의정부에서 원본을 첨부하여 올린 것을 계하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어 하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又啓曰, 完和君墡諡望, 議政府粘目, 啓下矣。 政官牌招, 開政下批,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11/20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18/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이원명(李源命)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완화군 선의 시망은 효헌(孝憲)으로 하였다.

以李源命爲判義禁, 完和君墡諡望爲孝憲。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3일 신사(辛巳) 18/20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4일 임오(壬午) 2/1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성빈(成殯)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에 가설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 2품 이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完和君成殯後, 大殿·大王大妃殿·王大妃殿·中宮殿·世子宮, 加設藥房·內閣·政院·玉堂·朝廷二品以上口傳問安。 答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4일 임오(壬午) 2/15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4일 임오(壬午) 12/1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정원이 아뢰기를, “완화군 선의 시호를 양사가 서경해야 되므로 새로 제수된 지평 신태관ㆍ박규찬과 정언 조용구ㆍ홍병일을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政院啓曰, 完和君墡諡號, 兩司當爲署經, 新除授持平申泰寬·朴奎燦, 正言趙龍九·洪炳一, 竝卽牌招,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4일 임오(壬午) 12/15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5일 계미(癸未) 2/1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 성복(成服)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에 내각, 정원, 옥당, 조정 2품 이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完和君成服後, 大殿·大王大妃殿·中宮殿·世子宮, 內閣·政院·玉堂·朝廷二品以上口傳問安。 答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5일 계미(癸未) 2/13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5일 계미(癸未) 7/1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신 정직조가 오늘 완화군 선의 상에 성복하는 데에 치조(致弔)하러 나아가기 위하여 하직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又啓曰, 臣稷朝, 今日完和君墡喪成服, 致弔進去, 下直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15일 계미(癸未) 7/13 기사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21일 기축(己丑) 10/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구전 하교에 따라, 새롭게 정한 완화군(完和君) 묘소의 경계(境界)에 낭청을 보내어 중사(中使)와 함께 입회하여 간심해 보니, 새로 정한 묘소는 임좌(壬坐) 병향(丙向)으로 정하였고, 사방의 끝은, 북쪽으로는 주봉(主峰) 후오현(後梧峴)까지, 남쪽으로는 대로(大路)까지, 동쪽으로는 우장현(雨裝峴)까지, 서쪽으로는 사아리(沙阿里)까지를 경계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禮曹啓曰, 謹依口傳下敎, 完和君新定墓所境界, 發遣郞廳, 與中使眼同看審, 則新定墓所, 以壬坐丙向定標, 而四標則北至主峰後梧峴, 南至大路, 東至雨裝峴, 西至沙阿里定界云矣,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1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1월 21일 기축(己丑) 10/18 기사



『승정원일기』2873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3월 7일 갑술(甲戌) 3/1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完和君)의 발인(發引) 때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육조 당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完和君發引, 大殿·大王大妃殿·王大妃殿·中宮殿·世子宮, 藥房·內閣·政院·玉堂·朝廷二品以上·六曹堂上, 口傳問安。 答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3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3월 7일 갑술(甲戌) 3/14 기사



『승정원일기』2873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3월 9일 병자(丙子) 2/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완화군(完和君)을 안장(安葬)한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육조 당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完和君安葬後, 大殿·大王大妃殿·王大妃殿·中宮殿·世子宮, 藥房·內閣·政院·玉堂·朝廷二品以上·六曹堂上, 口傳問安。 答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873책(탈초본 132책), 고종 17년(1880) 3월 9일 병자(丙子) 2/23 기사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18일 정미(丁未) 7/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장례원경 이중하(李重夏)가 아뢰기를, “홍문관 태학사 김학진(金鶴鎭)의 상소로 인하여 비지의 내용에 ‘내각 대신ㆍ원임 의정ㆍ장례원경에게 순문하여 들이라.’고 명이 내리셨습니다. 장례원 낭청을 보내어 순문하니, 내각 총리대신 신 이완용(李完用), 내부 대신 신 임선준(任善準), 탁지부 대신 신 고영희(高永喜), 군부 대신 신 이병무(李秉武), 법부 대신 신 조중응(趙重應), 학부 대신 신 이재곤(李載崑), 농상공부 대신 신 송병준(宋秉畯) 등이 이르기를, ‘신등이 순문하는 명을 삼가 받들고 홍문관 태학사 김학진의 상소 원본(上疏原本)을 취하여 상고하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추존(追尊)하기를 건의한 일이었습니다. 신등이 삼가 역대의 전례를 상고하니, 한(漢)나라의 사황손(史皇孫)과 남돈군(南頓君 한나라 광무제의 아버지 흠(欽))은 모두 별다른 칭호가 없었고, 명(明)나라 흥헌왕(興獻王)의 일은 예법에 크게 어긋나며, 오직 송(宋)나라 복안의왕(濮安懿王 영종(英宗)의 생부(生父))의 삼은 전례(典禮)는 근거를 삼기에 가장 마땅하니, 흥선대원군은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으로 추존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가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진실로 합당하겠습니다. 부부인(府夫人)의 칭호에 이르러서는 옛날 제후(諸侯)의 소군(小君 제후의 아내)은 모두 부인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의논에 있어서도 또한 부인을 추존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명(明)나라 때에 친왕(親王)의 부인을 ‘비(妃)’라고 일컫는 제도가 있었으니, 이는 대체로 공작(公爵) 이하 경사(卿士)의 아내와 구별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물며 본생 부모(本生父母)를 추존함에 있어서는 사체가 더욱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은 간혹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명나라와 달라 선왕(先王)의 내전(內殿)을 모두 비라고 일컫는데, 이제 혼동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마는, 이는 아마도 그렇지 않습니다. 《선원보(璿源譜)》를 상고하니, 열성조(列聖朝)의 왕비를 모두 왕후라고 일컬었으며, 정유년(1897, 광무1) 이후에 효정왕후(孝定王后 헌종(憲宗)의 계비(繼妃) 홍씨(洪氏))를 또한 명헌태후(明憲太后)라고 존칭(尊稱)했으니, 이제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에게 대원왕 비(大院王妃)로 존칭하고 아름다운 시호를 가한다면 혼동할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신등이 원래 예전(禮典)에 어두워 감히 억단(臆斷)할 수가 없으니, 삼가 성명께서 재처하시기만 바라옵니다. 신등이 이미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비록 원소(原疏)에 미치지 않은 것이라도 또한 소회(所懷)를 모두 진달함이 마땅합니다. 완화군(完和君)에게 아직도 왕작(王爵)을 추봉하지 않았고, 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에게 아직도 비로서 일컫지 않은 것이 궐전(闕典)에 관련되는 일입니다. 이준용(李埈鎔)의 속적(屬籍)은 비록 친등(親等)이 다하였으나 태황제에게는 생가의 조카가 되니, 특례로써 군(君)을 봉하는 것이 친족을 친애(親愛)하는 의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삼가 원컨대, 널리 순문하여 조처하옵소서.’하였다.

掌禮院卿李重夏奏, 因弘文館大學士金鶴鎭上疏批旨內, 令內閣大臣·原任議政·掌禮卿, 詢問以入事, 命下矣。 發遣院郞詢問, 則內閣摠理大臣臣李完用, 內部大臣臣任善準, 度支部大臣臣高永喜, 軍部大臣臣李秉武, 法部大臣臣趙重應, 學部大臣臣李載崑, 農商工部大臣臣宋秉畯等以爲, 臣等伏奉詢問之命, 取考大學士金鶴鎭疏本, 則以興宣大院君追隆建請事也。 臣等謹稽歷代典禮, 漢之史皇孫南頓君, 俱無殊稱, 明之興獻事, 大乖禮意, 惟宋濮安懿王典禮, 㝡宜援據, 興宣大院君, 追稱大院王, 加以美諡, 允合情禮。 至若夫人之稱, 古者侯國小君, 皆稱夫人, 故濮議亦無加隆, 而其後明朝, 著有親王夫人稱妃之制, 蓋欲別異於公爵以下卿士之妻也, 況追隆本生, 事體尤重者乎? 論者或以我朝異於有明, 先王內殿, 旣皆稱妃, 則今不當混同云爾, 此恐不然。 稽諸璿譜, 列聖王妃, 皆稱王后, 丁酉以後, 孝定王后, 亦嘗以明憲太后尊稱焉, 今於驪興府大夫人, 進稱大院妃, 加以美諡, 似無混同之慮, 臣等素昧禮典, 不敢臆斷, 伏俟聖裁。 臣等旣與於論議, 雖原疏之所不及, 而亦宜畢陳所懷。 完和君之尙未追封王爵, 延原郡夫人之尙不稱妃, 係是闕典, 李埈鎔屬籍, 雖盡親, 於太皇帝, 爲本生猶子, 則特例封君, 恐合親親之義, 伏願博詢而處之焉云。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18일 정미(丁未) 7/7 기사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27일 병진(丙辰) 5/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비서감승 조병건(趙秉健)ㆍ박용원(朴用元)과 홍문관 시강 신영학(辛泳學)ㆍ윤주성(尹柱成)과 농상공부 서기랑 권오익(權五翊)은 자원에 의하여 본관을 해면하고, 정3품 김갑수(金甲洙)를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로, 정3품 서상훈(徐相勛)ㆍ조명희(趙命熙)를 비서감승으로, 9품 김영선(金永善)ㆍ이병홍(李秉洪)을 홍문관 시강으로, 정3품 강경희(姜敬熙)를 시강원 부첨사로, 정3품 김춘수(金春洙)ㆍ윤희구(尹喜求)를 시강원 시독으로, 6품 송종국(宋鍾國)ㆍ민재의(閔載禕)ㆍ이해승(李海昇)ㆍ조남복(趙南復)을 시강원 시종관으로, 비서감승 서상훈을 겸임 장례원 장례로 임명하였다.

宮內府大臣李允用謹奏, 卽伏見掌禮院卿李重夏奏本批下者, 則興宣大院君追隆封王, 驪興府大夫人追封妃, 完和君追封王, 延原郡夫人封妃事, 命下矣。 諸般儀節, 令掌禮院, 磨鍊擧行, 何如? 謹上奏。 奉旨依奏。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27일 병진(丙辰) 5/8 기사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28일 정사(丁巳) 7/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장례원경 이중하(李重夏)가 삼가 아뢰기를, “궁내부의 주본(奏本)으로 인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추존하여 왕으로 봉하고,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을 추존하여 비로 봉하며, 완화군을 추존하여 왕으로 보하고, 연원군부인을 비로 봉하는 의절을 장례원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거행하는 일로써 주하(奏下)하였습니다. 삼가 차례로 거행함을 당하여 흥선대원군의 봉왕 시호(封王諡號)와 여흥 부대부인의 봉비 시호(封妃諡號) 및 완화군의 친왕 봉호(親王封號)를 마땅히 의정하여야 하겠습니다. 길일시(吉日時)를 일관(日官) 김동표(金東杓)로 하여금 추택하게 하였는데, 음력 8월 초6일 신시(申時)가 길하다고 하니, 이 일시에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아룁니다.” 하니, 봉지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掌禮院卿李重夏謹奏, 因宮內府奏本, 興宣大院君追隆封王, 驪興府大夫人追封妃, 完和君追封王, 延原郡夫人封妃儀節, 令掌禮院磨鍊擧行事, 奏下矣。 謹當次第擧行, 而興宣大院君封王諡號, 驪興府大夫人封妃諡號, 完和君親王封號, 當爲議定矣。 吉月[日時], 令日官金東杓推擇, 則陰曆八月初六日申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 何如? 謹上奏。 奉旨依奏。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28일 정사(丁巳) 7/7 기사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29일 무오(戊午) 13/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완화군을 왕으로 추봉하는 길일을 언제쯤 추택 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봉지에 이르기를, “음력 8월 20일 이후로 추택하여 올리라.” 하였다.

又奏, 完和君追封王吉日, 以何間推擇乎? 敢奏。 奉旨, 陰曆來月念後擇入。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1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7월 29일 무오(戊午) 13/20 기사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2/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아뢰기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왕(王)으로 추봉(追封)하는 시호(諡號)와,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을 비(妃)로 추봉하는 시호와, 완화군(完和君)을 왕으로 추봉하는 호(號)를 의정(議定)하는 일로서 장례원을 거쳐 주하(奏下)하였습니다. 신등이 삼가 지의(旨意)를 받들어 회의하여 들일 뜻을 삼가 상주하였는데, 봉지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원왕(大院王)의 시호(諡號)는 ‘헌의(獻懿)’이니, 충성스런 데에 향하고 덕 있는 이를 받아들임을 헌(獻)이라 하고, 행적(行績)이 안팎에 드러남을 의(懿)라 하는데, 삼가 따른다는 칙지(勅旨)를 받들었습니다. 대원비(大院妃)의 시호는 ‘순목(純穆)’이니, 치우치지 않고 바르며 순수(純粹)함을 순(純)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義)를 따름을 목(穆)이라 하는데, 삼가 따른다는 칙지를 받들었으며, 완화군을 왕으로 추봉하는 호의 의망(擬望)은 ‘완(完)’과 ‘헌(憲)’인데, 권점(圈點)을 받들어 봉호(封號)에 ‘완(完)’ 자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흠차(欽此).” 하였다.

內閣摠理大臣李完用奏, 興宣大院君追封王諡號, 驪興府大夫人追封妃諡號, 完和君追封王號議定事, 由掌禮院, 奏下矣。 臣等恭奉旨意, 會議以入之意, 謹上奏。 奉旨依奏。 大院王諡號, 獻懿, 嚮忠納德曰獻, 行見中外曰懿。 奉勅恭依。 大院妃諡號, 純穆, 中正和粹曰純, 布德執義曰穆, 奉勅恭依。 完和君追封王號望完憲, 奉硃圈封號, 用完, 字欽此。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2/18 기사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3/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궁내부 대신 이윤용(李允用)이 아뢰기를, “흥선대원군을 왕으로 추봉하는 시호와 여흥 부대부인을 비로 추봉하는 시호와 완화군을 왕으로 추봉하는 호를 의정(議定)한 단자를, 지금 이미 주하(奏下)하였습니다. 장례원랑을 초치하여 전해 주려는 뜻을 삼가 상주합니다.” 하니, 봉지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宮內府大臣李允用奏, 興宣大院君追封王諡號, 驪興府大夫人追封妃諡號, 完和君追封王號議號[議定]單子, 今旣奏下矣。 招致禮郞傳授之意, 謹上奏。 奉旨依奏。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3/18 기사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6/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완화군을 왕으로 추봉할 길일을 음력 8월 20일 뒤로 가려서 들일 것을 명하셨습니다. 일관 김동표(金東杓)로 하여금 가리게 하였더니, 8월 24일이 좋다 하였습니다. 이날로 정하여 거행합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봉지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又奏, 完和君追封王吉日, 以陰曆八月念後擇入事, 命下矣。 令日官金東杓推擇, 則八月二十四日爲吉云。 以此日定行乎? 敢奏。 奉旨依奏。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6/18 기사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9/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또 아뢰기를, “지금 이 완화군을 왕으로 추봉할 때의 책문(冊文)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고, 금책(金冊)ㆍ금인(金印)의 조성은 궁내부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봉지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又奏, 今此完和君追封王時冊文, 令弘文館撰進, 金冊·金印造成, 令宮內府擧行, 何如? 奉旨依奏。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3212책(탈초본 141책), 순종 1년(1907) 8월 6일 을축(乙丑) 9/18 기사



매천야록[편집]

『매천야록』권1[편집]

Quote-left blue.png 궁녀 이씨가 완화군(完和君)을 낳아 계(季)씨로 사성(賜姓)하였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7세였다. 고종은 매우 기뻐하며 완화군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고 하자 대원군은, “중궁(中宮)이 만일 경사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라고 하면서 급히 서두르지 말라고 간하였다.

宮人李氏, 生完和君, 賜姓季, 時上年十七, 喜甚, 欲册以元子, 大院君以中宮有慶, 則將何以處之, 諫勿倉卒。

Quote-right blue.png
출처: 『매천야록』권1



『매천야록』권1[편집]

Quote-left blue.png 기묘년(1879) 봄, 완화군선(完和君墡)이 사망하였다. 외간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명성왕후가 젓항아리에 거꾸로 넣어 죽였다고 하고, 일설에는 방망이로 때려 죽였다고도 하였다. 나합(羅閤)의 수광(壽壙)이 동대문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때 대원군은 그곳을 빼앗아 완화군의 장례를 치렀다.

「 己卯(高宗十六年) 春, 完和君墡卒, 外間盛傳明成后倒植鮓瓮, 一云砧杵撞殺之, 初羅閤營壽壙, 在東大門外, 至是雲峴奪之, 以葬完和君。」

Quote-right blue.png
출처: 『매천야록』권1



대한계년사[편집]

『대한계년사』권8, 순종황제 융희원년 정미(自8월)[편집]

Quote-left blue.png 追封興宣大院君爲大院王, 完和君墡爲完王, 封李埈鎔爲永宣君。 十三日舊曆八月初六日 追封興宣大院君昰應, 爲興宣大院王, 贈諡獻懿, 驪興府大夫人閔氏爲王妃, 贈諡純穆, 完和君墡爲完王, 封義王堈妻延原郡夫人爲王妃, 李埈鎔爲永宣君。 Quote-right blue.png
출처: 『대한계년사』권8, 순종황제 융희원년 정미(自8월)



청우일록[편집]

『청우일록』병자(고종 13, 1876), 정월[편집]

Quote-left blue.png 王子墡完和君封爵, 王子生朝日, 傳曰, 王子墡, 完和君封爵, 政院啓曰, 王子完和君墡, 封爵下批事命下矣, 政官牌招何如, 傳曰允, 吏判閔奎鎬, 叅判成彛鎬, 叅議李有榮。 Quote-right blue.png
출처: 『청우일록』병자(고종 13, 1876), 정월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현재의 묘역[편집]

초장 추정지[편집]

갤러리[편집]

동영상[편집]

전자지도[편집]

이미지 마커와 커스텀 오버레이 + 지도에 지형도 표시하기

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