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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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태실(純祖 胎室)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의 순조 태실 전경
식별자 PC018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순조 태실
한자명 純祖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Sunjo
피안자 명칭 순조(純祖)
피안자 이칭 이공(李玜)·자(字) 공보(公寶)·호(號) 순재(純齋)·숙황제(肅皇帝)·인릉(仁陵)
피안자 부 정조(正祖)
피안자 모 현목유빈(顯穆綏嬪) 박씨(朴氏)
피안자 생년월일 1790.07.29
피안자 몰년월일 1834.12.13
안태 연월일 1790.08.12 『순조 태지석』
안태지 기록 보은현(報恩縣) 『순조실록』
안태지 기록1 보은태실(報恩胎室) 『승정원일기』
안태지 기록2 충북 보은군 속리면 『서삼릉 순조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6°54'71.99"N
안태지 좌표(경도) 127°85'51.25"E
안태지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문화재 지정여부 충북 유형문화재 제11호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乾隆五十五年庚戌,六月,十八日生,純祖肅皇帝胎,乾隆五十五年庚戌,十一月,藏于報恩郡俗離面,昭和四年,月,日移藏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순조 가봉태실 안태지 복원
태항아리 순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편집]

조선 제 23대 국왕 순조의 태실이다.

강원도 홍천·충청도 보은 속리산·음성현 등이 안태지로 거론되었다. 그 중 속리산으로 정해졌다. 정조는 안태 비용으로 저치미(儲置米)를 사용해 지방민들의 피해가 없도록 하였고, 안태사로 오재순(吳載純)을 임명했다. 정조는 안태사부터 하리에 이르기까지 고루 포상하고 안태하고 돌아온 오재순에게 태실에 대해 꼼꼼히 물었다. 이처럼 정조는 순조의 태실을 조성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순조는 즉위 후 먼저 아버지 정조의 태실을 가봉한 뒤 1806년(순조 6)에 자신의 태실을 가봉하였다. 이 때 순조의 태실 역시 아버지 정조와 같이 영조 태실의 제도를 쫓았다. 태실을 가봉하는데 소용하는 석재는 회인현감이 담당한 것으로 보이며 서표관은 관상감 제조였던 김사목이 맡았다. 그리고 돌을 다듬는 석수와 각수는 서울에서 내려간 이들이었다.

이러한 순조 태실 가봉에 관한 내용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중인 《순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규 13968)에 자세히 전한다.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순조 태봉의 모습을 그린 태봉도(덕수 6374)가 전한다. 보은현은 순조 태실 가봉이 이루어지고 4년 뒤 군으로 승격되었다.

순조 태실은 태항아리의 반출이 이루어졌음에도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지 않았다. 또한 화소비를 비롯해 금표비, 법주사 앞에 하마비가 남아있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1790) 7월 6일 갑신(甲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자의 태봉 길지를 속리산 아래에 있는 을좌 신향의 자리로 정하다》

원자(元子)의 태봉 길지(胎封吉地)를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아래에 있는 을좌 신향(乙坐辛向)의 자리로 정하였다.

元子胎封吉地, 定于報恩縣 俗離山下乙坐辛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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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1790) 7월 6일 갑신(甲申) 1번째 기사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1790) 7월 7일 을유(乙酉) 3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홍양호·김희·오재순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양호(洪良浩)를 이조 판서로, 김희(金憙)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오재순을 안태사(安胎使)로 삼았다.

以洪良浩爲吏曹判書, 擢金憙爲刑曹判書, 以吳載純爲安胎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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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1790) 7월 7일 을유(乙酉) 3번째 기사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안태사 오재순을 불러 위로하고 상을 내리다》

안태사(安胎使) 오재순(吳載純)이 복명하니, 상이 불러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오재순과 도차사원(都差使員) 보은 현감(報恩縣監) 김재익(金載翼)은 가자하고, 배태관(陪胎官) 조헌택(趙憲澤)은 품계에 걸맞는 벼슬에 임명하고, 본도의 감사 정존중(鄭存中)에게는 호피(虎皮) 1장을 하사하였다.

安胎使吳載純復命。 上召見勞問, 施賞典。 載純及都差使員報恩縣監金載翼, 竝加資; 陪胎官趙憲澤, 相當職除授; 本道伯鄭存中, 賜虎皮一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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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1번째 기사



『순조실록』9권, 순조 6년(1806) 10월 20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보은현에서 당저의 태실의 가봉 역사를 마쳤다고 고하니, 군으로 승격시키다》

보은현(報恩縣)에서 당저(當宁)의 태실(胎室)을 가봉(加封)하는 역사를 마쳤다고 고하니, 감동관(監董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고, 현을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았다.

報恩縣當宁胎室加封之役告訖, 監董以下施賞有差, 縣陞爲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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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9권, 순조 6년(1806) 10월 20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1810) 5월 25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태실을 봉한 보은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다》

보은현(報恩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는데, 태실(胎室)을 봉(封)한 후에 관례대로 승격시킨 것이다.

陞報恩縣爲郡, 胎室加封後例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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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1810) 5월 25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1679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6월 24일 계유(癸酉) 13/4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傳于曺允大曰, 藏胎吉日, 從近推擇。凡係貽弊民邑之事, 令該監一提調, 詳考前例, 務加節省。此亦祈永之意, 仍以此意, 待處所稟定後, 令廟堂行會, 嚴飭胎封該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79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6월 24일 계유(癸酉) 13/43 기사



『승정원일기』 1679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6월 25일 갑술(甲戌) 30/4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柳文養, 以觀象監提調意啓曰, 今此新生元子阿只氏藏胎吉日, 從近推擇事, 命下矣。取考本監所在胎峯謄錄, 則其中坐向吉利地, 只是原春道洪川北方面紋巖山下辛坐之原, 忠淸道報恩縣內俗離下乙坐之原, 陰城縣五里外防築洞未坐之原三處, 而入錄已爲年久, 難保無頉。依舊例發送本監相地官, 更加看審後, 備望以入, 待稟下, 以爲涓吉之地,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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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79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6월 25일 갑술(甲戌) 30/40 기사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6일 갑신(甲申) 11/1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戌七月初六日申時, 上御重熙堂。

軍士房承旨入侍時, 左副承旨尹行任, 記事官徐有聞, 記注官白慶楷·金鳳顯, 以次進伏訖。

上命書傳敎曰, 安胎藏胎時所用雜物及役民, 皆用儲置米, 一依書下擧行之意, 自本監, 卽爲措辭行會, 本道亦卽直關該邑, 依此擧行, 無敢一毫違越, 方欲別遣御史, 隨後下送, 以考擧行勤慢, 雖一物取於民, 一民無價使役, 則道伯地方官及奉命之人當之, 以此嚴飭, 以石爲名之物, 一切勿用, 予於御極以後, 猶念民弊, 胎封加築, 尙今不許, 況今番乎?

又況一念憧憧, 不欲張大乎? 聞此下敎之後, 雖下至京司吏隷, 本邑官屬, 寧或藉此, 貽弊於民邑乎? 竝以此意, 謄關, 分付。

又命書傳敎曰, 大赦之時, 先自重囚疎釋, 京中則問于曹堂, 區別處分, 京外何異? 外方錄啓之類, 各令道臣, 親閱文案, 兼探邑中輿論, 可以參量者, 具意見狀聞, 原案之已啓聞者, 別錄冊子, 置之大內, 常常考閱, 今亦更加理會, 而欲待道伯意見後處分, 原本不必盡謄, 只以意見條列後, 錄於狀聞, 中道則今月內, 遠道則來月旬前後修啓, 北道則文案, 不過略干廢仍, 令舊伯交龜前修啓事, 分付諸道, 未錄啓之類, 各令直爲疎放事, 一體分付, 竝以此意, 下諭諸道。命退, 承史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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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6일 갑신(甲申) 11/11 기사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7일 을유(乙酉) 15/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洪義榮, 以觀象監提調意啓曰, 元子阿只氏, 胎峯吉地, 以忠淸道報恩縣內俗離下, 乙坐辛向, 完定事, 昨已, 命下矣。吉地旣已完定, 藏胎吉日時, 令日官, 推擇以入,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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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7일 을유(乙酉) 15/19 기사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8일 병술(丙戌) 5/1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吏批의 관원현황》

有政。吏批, 判書洪良浩未肅拜, 參判未差, 參議曺允大進, 右承旨徐瀅修進。以趙衍德爲光州牧使, 安胎使單吳載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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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8일 병술(丙戌) 5/15 기사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8일 병술(丙戌) 15/1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戌七月初八日辰時, 上御重熙堂。

軍士房承旨入侍時, 左副承旨尹行任, 記事官徐有聞, 記注官白慶楷·金鳳顯, 以次進伏訖。

上命書傳敎曰, 今聞安胎使, 以從一品以上差出, 前例皆然, 昨日啓下之人, 時帶藥院, 更爲差出事, 分付, 從事官則置之事, 亦爲分付。命退, 承史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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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8일 병술(丙戌) 15/15 기사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24일 임인(壬寅) 12/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洪義榮, 以觀象監言啓曰, 今此元子阿只氏, 胎缸奉安時, 不用甕石, 而以瓦代之者, 雖仰聖意之不欲張大, 不欲煩民, 而在下之道, 實不勝其區區悶歎之心者, 蓋以莫重莫大之事, 不可若是之故也。竊伏念, 石甕則浮出磨治之際, 爲役鉅而用力多, 湖西有一種軟石, 民間或穿以爲器, 鑿以爲鼎, 其爲工至易, 省於燔瓦之勞, 堅實耐久, 有非陶瓦之比, 及今發關於該道道臣, 採取軟石, 刻成甕制, 又爲蓋石以用, 恐合愼重之意, 命下多日, 今始覺得, 不勝惶悚, 敢啓。

傳曰, 依此爲之,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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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0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7월 24일 임인(壬寅) 12/20 기사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4일 임자(壬子) 13/1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戌八月初四日辰時, 上御重熙堂。

左承旨·右副承旨入侍時, 行左承旨李祖承, 右副承旨尹行任, 記事官徐有聞, 記注官白慶楷·金鳳顯, 以次進伏訖。

… (중략) …

命祖承書傳敎曰, 今日安胎行時, 奉函承旨徐瀅修, 兒馬一匹賜給, 觀象監官員, 禁漏官, 令該衙門, 高品付料, 分軍部將, 上弦弓一張賜給, 皷吹工人員役下人等, 依判下米布分等施賞。命祖承·行任, 分讀公事, 書判付訖。命退, 承史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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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4일 임자(壬子) 13/13 기사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7/3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傳于李敏采曰, 安胎使留待。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7/32 기사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8/3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傳于李敏采曰, 安胎使入侍。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8/32 기사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15/3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柳文養, 以吏批言啓曰, 胎封監役都差使員報恩縣監金載翼加資事, 命下矣。未及資窮, 又未經準職, 何以爲之? 敢稟。傳曰, 加資。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15/32 기사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21/3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祖承, 以戶曹言啓曰, 安胎時, 京鄕吏隷·工匠等, 令該曹該道, 從厚施賞, 草記狀聞事, 命下矣。問于該監, 則自京隨往者, 只是香陪兼陪書員一人, 奏時書員一人云, 各木貳疋·布貮疋·米參斗, 參考前例, 從厚題給, 而鄕吏隷·工匠, 則從厚施賞後, 狀聞事, 分付該道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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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21/32 기사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31/3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戌八月十七日午時, 上御重熙堂。

安胎使入侍時, 行左承旨李祖承, 記事官徐有聞, 記注官白慶楷·金鳳顯, 安胎使吳載純, 以次進伏訖。

上曰, 何以往來乎?

載純曰, 歡忭之極, 不知行役之爲勞, 而往返矣。

上曰, 胎峯果如何耶?

載純曰, 峯巒佳麗, 山拱水抱, 雖以凡眼見之, 亦知其吉地, 且安胎時, 日氣甚好, 事事慶忭, 不可勝達矣。

上曰, 卿必勞憊, 早退, 可也。

載純承命退出。

上曰, 同副承旨入侍。

出榻敎 賤臣承命出, 與同副承旨柳文養, 偕入進伏。

命文養書傳敎曰, 水原新劃付廣州兩面所在軍額四百六十七名, 所收身米二百餘石, 竝蕩滌, 在兩面民, 比未移屬前, 可謂快得脫濕, 此意令本府使知悉, 曉諭民人, 皆得以安堵樂生。雖以本府言之, 得此許多閒丁, 此後使用之際, 深念新付之異於元居, 各別顧見撫摩, 雖不得不充丁, 切勿如前夥多, 俾有特諭之實效事, 下諭于本道伯及本府使。

又命書傳敎曰, 監試初試出榜之太近, 日前試官入侍也, 以文科初試之緩緩出榜, 有所下敎, 而傳謄書手, 今番則亦令拔例, 多數定送, 書手亦人耳, 欲令容旋, 此蓋今科事事便好之意也。然則考券, 必須緩緩, 書手旣多, 又不若已前之紛拿, 令廟堂嚴飭兩所主掌官處, 仍令試官知悉, 依此擧行, 而若此則設場多日應辦侵漁之弊, 在所當禁, 亦令廟堂申飭。

又命書傳敎曰, 安胎使吳載純, 監役兼都差使員報恩縣監金載翼, 竝加資, 陪胎官趙憲澤相當職除授, 本道伯鄭存中, 虎皮一令賜給, 鄕看役將校, 令道伯拔例陞差, 京鄕吏隷工匠等, 令該曹該道, 從厚施賞, 草記狀聞事, 分付。

又命書傳敎曰, 政官牌招開政。命退, 承史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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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1책 (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8월 17일 을축(乙丑) 31/32 기사



『승정원일기』 1686책 (탈초본 89책) 정조 15년(1791) 1월 28일 계묘(癸卯) 16/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辛亥正月二十八日未時, 上御誠正閣。

前忠淸監司入侍時, 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洪樂游·徐有聞, 忠淸前監司鄭存中, 以次進伏訖。

… (중략) …

存中曰, 從前胎封, 卽排石物, 實是國朝典禮也, 俗離胎封, 旣是人跡之所罕到處, 則表石等儀, 決不可久闕不設, 臣意則俗離及他處未設石儀之胎封, 竝卽排設, 一遵典禮, 恐合事宜, 敢此仰達矣。

上曰, 卿言旣如此, 然則待年豐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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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686책 (탈초본 89책) 정조 15년(1791) 1월 28일 계묘(癸卯) 16/16 기사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2일 병자(丙子) 22/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文會, 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胎室加封事, 旣伏承待秋成擧行之命矣, 該道年事, 可占豐登, 凡諸擧行, 不可不前期整備, 俾無臨時窘速之弊, 令地方官兼監役, 爲先浮石, 以隣近守令, 定差使員監董事, 分付道臣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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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2일 병자(丙子) 22/24 기사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8일 임오(壬午) 15/2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文會, 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聖上胎室石物加封, 已爲擇日啓下矣。 謹稽本監謄錄, 則列聖朝胎室體樣, 不一其制, 故辛酉年先大王胎室加封時, 依英廟朝胎室石物加封時例, 稟定擧行矣。 今此加封石物長廣尺數, 依辛酉年例擧行, 恐合事宜, 何以爲之? 敢稟。

傳曰, 依前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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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8일 임오(壬午) 15/26 기사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9일 계미(癸未) 17/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文會, 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在前胎室加封時, 本監官員一員, 臨時下送, 監董工役, 奏時, 仍令兼行矣, 今亦依此磨鍊,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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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9일 계미(癸未) 17/23 기사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11일 을유(乙酉) 26/3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申絢, 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胎室加封時, 觀象監提調·繕工監提調各一員進去監董, 例也, 而曾在乙巳景慕宮胎室加封時, 因特敎, 兩監提調中一員, 兼進擧行, 書標官, 亦爲兼差, 故辛酉年先大王胎室加封時, 亦用此例矣。 今亦例此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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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15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8월 11일 을유(乙酉) 26/31 기사



『승정원일기』 1917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9월 20일 갑자(甲子) 21/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丙寅九月二十日辰時, 上御熙政堂。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承旨李文會, 假注書李晉淵, 事變假注書趙奎昇, 記注官鄭宗顯, 記事官鄭觀綏, 左議政李時秀, 行吏曹判書金文淳, 戶曹判書徐榮輔, 刑曹判書金羲淳, 工曹判書朴宗來, 兵曹判書趙得永, 行護軍李得濟, 掌令李渭達, 正言李鎭嵩, 修撰洪儀泳, 以次進伏訖。

… (중략) …

時秀曰, 胎封董役時, 觀象監·繕工監提調中一員, 例爲進去, 而尙無一定之式云, 自今兩監提調中無故人兼進事, 定式分付, 因此有仰達者, 秋穫纔歇, 糴事方始, 此時役民之政, 所宜深恤, 遠邑調丁, 尤易生弊, 分付該道道臣, 凡係用民力之處, 務從省約, 俾無一毫貽弊之端, 仰體朝家軫恤之德,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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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17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9월 20일 갑자(甲子) 21/22 기사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0일 계사(癸巳) 16/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傳于柳畊曰, 胎室加封時觀象監提調以下, 別單書入。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0일 계사(癸巳) 16/22 기사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0일 계사(癸巳) 17/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傳于柳畊曰, 報恩胎室加封時, 觀象監提調兼書標官行知中樞府事金思穆, 半熟馬一匹賜給, 監役兼都差使員地方官報恩縣監金翼行, 浮石差使員懷仁縣監李厚植, 本道觀察使趙德潤, 各兒馬一匹賜給, 監役兼傳香奏時官崔選基, 上弦弓一張賜給, 員役工匠等米布, 令該曹, 參酌磨鍊題給。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0일 계사(癸巳) 17/22 기사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1일 갑오(甲午) 20/2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沈奎魯, 以戶曹言啓曰, 報恩胎室加封時, 員役工匠等米布, 令該曹參酌磨鍊題給事, 命下矣。

觀象監書員鄭景福, 木二疋·布一疋·米三斗, 庫直朴義得, 木二疋·米三斗, 使令朴萬億等二名, 木一疋·布一疋·米三斗, 奏時書員禹昌根, 木一疋·布一疋·米三斗, 京石手李春三等二名, 京刻手李世豐等二名, 各木二疋·布一疋·米三斗, 參酌磨鍊題給, 而至於外方將校以下工匠等賞格, 則例自該道擧行矣。

今亦依前例, 自該道擧行後狀聞之意, 分付道臣,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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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1일 갑오(甲午) 20/25 기사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6일 기해(己亥) 11/1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丙寅十月二十六日辰時, 上御誠正閣。

右副承旨入侍時, 右副承旨申絢, 假注書洪起燮, 記注官崔鳳和, 記事官鄭觀綏, 檢校待敎朴宗薰以次進伏訖。

上命讀公事, 絢讀奏訖。

上命夾侍, 出授胎室加封儀軌, 宗薰跪受。

上命絢讀奏, 絢展讀。

上曰, 使注書持出, 傳于閣吏, 可也。

絢奉儀軌, 還盛于櫃子, 以授于賤臣, 賤臣奉出, 傳于閣吏, 還入進伏。

上命退, 諸臣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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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18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0월 26일 기해(己亥) 11/1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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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