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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한 1,893권의 책이다. 제26대 고종과 제27대 순종 시대의 기록은 <고종황제실록> · <순종황제실록>으로 따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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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한 1,893권의 책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왕 때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는 사초(史草)를 비롯하여,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조보(朝報)> <비변사등록> <일성록>도 중요 자료로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왕 때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는 사초(史草)를 비롯하여,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조보(朝報)> <비변사등록> <일성록>도 중요 자료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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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태조실록>은 1413년에 편찬되었다. 이때 실록은 네 부를 만들어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등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 ‧ 충주 · 성주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 전주 사고의 실록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고 이 전주 사고본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켰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태조실록>은 1413년에 편찬되었다. 이때 실록은 네 부를 만들어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등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 ‧ 충주 · 성주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 전주 사고의 실록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고 이 전주 사고본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켰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만 아니라 각종 제도 · 법률 · 경제 · 사회 · 풍속 · 천문 · 지리 · 과학 · 예술 · 학문 · 사상 · 윤리 · 도덕 ·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 방대한 분량이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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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고종과 제27대 순종 시대의 기록은 <고종황제실록> · <순종황제실록>으로 따로 분류한다. 이 두 황제 실록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27부터 1932년 사이에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황제와 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 왜곡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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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만 아니라 각종 제도 · 법률 · 경제 · 사회 · 풍속 · 천문 · 지리 · 과학 · 예술 · 학문 · 사상 · 윤리 · 도덕 ·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 방대한 분량이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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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원래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 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국역본이 413책이 완성되어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도 제작되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및 관련자료===

2017년 8월 1일 (화) 03:46 판

제목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 조선왕조실록
집필자 황인희
인물/기관/단체 태조, 철종, 순종, 실록청, 춘추관, 도청, 사관, 총재관, 도청 당상,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祿)
장소/공간 자하문, 차일암,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태인, 금산, 정읍 내장산
사건 무오사화
개념용어 조선, <고종황제실록>, <순종황제실록>, 사초,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조보>, <비변사등록>, <일성록>,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경종개수실록>, <춘추관 시정기>, <태조실록>, <명종실록>, <태조실록>



원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날짜 순서에 따라 기록한 1,893권의 책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왕 때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는 사초(史草)를 비롯하여,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이 사용되었다. 후세에는 <조보(朝報)> <비변사등록> <일성록>도 중요 자료로 쓰였다.

사초는 전 왕 재위 시에 사관(史官)들이 작성해둔 기록으로 실록의 중심 자료가 되었다. 네 명의 전임 사관은 궁중에서 항상 임금 곁에 있다가 임금의 언행을 비롯하여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과 풍속의 미악(美惡)과 향토(鄕土)의 사정(邪正) 등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여 사초를 작성하였다.

사초는 성격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필화(筆禍)를 막기 위해 임금도 열람할 수 없게 하였다. 사초를 본 사관이 그 내용을 누설할 경우에도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엄하게 단속한 덕분에 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다. 사초에 대한 비밀 유지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같은 변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초에는 작성한 사관의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관은 자신이 써놓은 사초 때문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사초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 또는 바꿔 쓰는 일이 간혹 있었다. 또 당쟁이 심할 때는 집권당의 사관이 자기 당파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여 공정성을 잃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집권당이 바뀌면 수정하여 다시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실록이 <선조수정실록> · <현종개수실록> · <경종개수실록> 등이다.

실록 편찬은, 사초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실록청에 모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실록청의 구성원은 모두 춘추관의 관원이었는데, 다음의 세 단계를 거쳐서 실록을 완성하였다. 첫째 단계는, 셋에서 여섯 개로 나뉜 각 방에서 각종 자료 가운데에서 중요한 사실을 골라내 초고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중심 부서인 도청에서 초고 가운데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간 원고를 작성하였다. 셋째, 실록청의 우두머리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간 원고의 잘못을 재수정하고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최종 원고를 만들어낸다.

실록이 완성되면 이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편찬에 이용한 기본 자료인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고와 중간 원고는 서울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巖) 시냇물에서 세초(洗草)하였다. 세초란 종이의 먹물을 씻어내는 것인데 기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고 종이를 재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첫 편인 <태조실록>은 1413년에 편찬되었다. 이때 실록은 네 부를 만들어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 사고 등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 ‧ 충주 · 성주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 전주 사고의 실록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고 이 전주 사고본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켰다고 한다.

제26대 고종과 제27대 순종 시대의 기록은 <고종황제실록> · <순종황제실록>으로 따로 분류한다. 이 두 황제 실록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27부터 1932년 사이에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황제와 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 왜곡이 많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만 아니라 각종 제도 · 법률 · 경제 · 사회 · 풍속 · 천문 · 지리 · 과학 · 예술 · 학문 · 사상 · 윤리 · 도덕 ·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그 방대한 분량이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등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국보 제151호이며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원래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 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국역본이 413책이 완성되어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도 제작되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한국사료해설집』(신석호, 한국사학회, 1964)
  • 『조선왕조실록』 1―범례―(신석호, 국사편찬위원회, 1955)
  • 「조선왕조실록과 한국학연구」(이성무, 『민족문화』 17, 1994)
  •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정구복,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
  • 「조선전기 실록과 사론」(차장섭, 『국사관논총』 32, 1992)
  •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편찬에 관한 연구」(한우근, 『진단학보』 66, 1988)
  • 「조선전기의 사관」(차장섭, 『경북사학』 6, 1983)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태도와 사관의 역사의식」(차용걸, 『한국사론』 6, 국사편찬위원회, 1979)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신석호, 『사총』 5, 1960)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조선왕조실록 원고는 황인희의 원고와 황정욱의 원고가 중복되므로 2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 후세 → 후기

- 황인희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황정욱 원고 중 포함시켰으면 하는 글
①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의 실록은 1927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황제•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서 왜곡이 많다.

② 《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하여 413책으로 간행되었다. 1995년에는 CD-ROM으로 제작되었다.



교열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