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

Korea100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26일 (수) 15: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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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인이 보는 기자, 기자조선
집필자 남정란 /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단군, 기자, 위만
장소/공간 평양, 황하 유역, 강화도 첨성단
사건 고조선 건국, 몽골의 침략
기록물 삼국유사, 상서대전, 사기, 제왕운기
개념용어 고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
물품/도구/유물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고인돌



원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검토의견



검토의견



교열본

단군의 나라 고조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자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