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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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
집필자 남정란
제목수정안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단군, 기자, 위만
장소/공간 평양, 황하 유역, 강화도 첨성단
사건 고조선 건국, 몽골의 침략
기록물 삼국유사, 상서대전, 사기, 제왕운기
개념용어 고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
물품/도구/유물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고인돌



1차 원고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고’조선이다. 한반도에는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조선’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도 부른다.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이라는 사람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한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에 의해 공격을 받을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일부 국가에서는 한반도의 기원을 서술할 때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조선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에 따르면 ‘기자’는 기원전 1000년 전후에 중국 은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은나라에 충언을 하다가 폭군에 의해 탄압을 받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서에는 ‘기자’가 한반도로 옮겨갔다는 내용은 없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일부 역사책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다른 책에서는 기자가 무왕을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아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한국의 고대인들도 ‘기자’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의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며 고조선에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 단군과 기자를 함께 찬양하고 있는데 『제왕운기』의 역사관은 조선시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존재를 유교와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로 와서 유학을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기자’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며, ‘기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이야기한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고조선을 설명할 때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쓴 부분은 제외해도 괜찮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본 글의 제목 ‘한국인은 기자가 누군지 모른다’를 수정가능하다면, 어떤 제목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존재를 유교와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로 와서 유학을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 유학은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인 경전과 이 경전에 근거한 후세 학자들의 체계적인 학문이고, 공자는 서기전 551년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한반도에 유학을 전해주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에 대한 근거를 좀 더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


수정 원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교열본

단군의 나라 고조선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가장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조선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칭하였다. 근대 이후로는 이씨 왕조인 조선과 구별되는 의미로 널리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은 천신의 후손인 ‘단군’이다.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라는 서사시에서도 단군을 한반도의 국조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단군 숭배 역사관은 이후 역사서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현재 한국인들은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단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번영하다가 기원전 194년 철기 문화를 앞세워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그의 왕조는 기원전 108년 중국을 통일한 ‘한’이 공격해올 때까지 한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즉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군’과 ‘위만’의 왕조였다. 그런데 중국의 『사기』, 『상서대전』 등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사서에 등장하는 기자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기술된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군을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지배자로 보지도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

현재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2차 교열본

  • 제목
    • 기자: 한국 유교 문명의 기원론

은나라의 현자 기자

한국인들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세워진 고조선을 민족 최초의 국가로 생각한다. 또한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그가 나라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10월 3일)을 국경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에는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한반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세웠다는 서술이 있고, 외국인들 중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기자는 누구이며 한국 사람들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중국의 역사서 『상서』, 『논어』 등에는 기자가 기원전 1000년 전후 은나라의 현자였다고 한다. 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술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인 『상서대전』이나 『사기』 같은 책에 나온다. 이들 책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사기』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해주었다고 하며, 『상서대전』은 기자가 무왕이 이끄는 주나라 군대를 피해 일족을 이끌고 한반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기자

한국의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자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을 뿐, 고조선을 멸망시켰거나 새로운 왕조를 세운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제왕운기』에서도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후조선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기자가 중요해진 것은 한반도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13세기 이후이다.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단군을 본격적으로 숭배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다.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에 중국의 문물을 전해준 기자도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유교와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기자가 기원전 1000년경에 주, 은나라로부터 한반도로 와서 중국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이는 한반도 유학의 역사가 중국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중국 본토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했기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정수는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기자’와 ‘기자조선’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자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기자와 ‘기자의 조선’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10세기 경 중국 황하유역과 고조선이 있는 한반도 북쪽의 이동거리와 양쪽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고고학적 견해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자의 실체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며 고대 한반도 역사의 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유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자와 기자조선을 한국의 자주성과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실체와 상관없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지는 그 자체에 주목하여 고대 한국의 문화가 형성될 때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써 이야기한다.

북한에서 펴낸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사학자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1994.
    • 노태돈, "기자동래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