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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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월 15일 (월) 22: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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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다양한 형태로 일본에 맞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 모형(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함으로써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35년 동안 한민족은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라 안에서든 나라 밖에서든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많은 힘을 쏟았다.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그런 노력이 더해져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1918년 2월 8일,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는 이듬해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에는 독립을 위한 집회와 시위가 국내에서만 1500회 이상 일어났다. 중국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단체들이 생겨나 항일 무장투쟁도 본격화되었다.

안창호의 실력 양성 운동

한일합병조약 전후로 국내외에 수백 개의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이들 학교에서는 단지 신학문교육이 아니라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교육을 병행했다. 대표적인 교육운동가로 안창호를 꼽을 수 있다.

안창호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 혁신을 이룩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실력 양성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자기 개조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 ‘무실’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이념을 실천하며 독립 운동에 힘썼다.

적극적인 무장 항일 운동

김좌진 장군 동상(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중국에 세워진 임시 정부는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의거, 4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의 일본군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과 고위 관리들에게 피해를 안긴 윤봉길의 의거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고 그 힘을 길러 나라 안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려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또 중국의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서는 독립군 부대가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좌진 · 김규식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길림성 왕청현(吉林省 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은 청산리 전투이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1,2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는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해외 동포들의 독립 운동

독립 운동은 미주 지역에서도 펼쳐졌다. 해방을 전후하여 미국과 멕시코, 쿠바 등에는 약 1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국제 회의장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는 한인 단체들을 연합하여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회를 만들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도 이를 존중하여 이승만을 임시 정부의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주미 외교위원장의 자격으로 미국 국무부에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에 벌어질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며 소련을 막기 위해서 임시 정부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일본과 한 편에 서서 전쟁하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만이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을 결정하였다. 한민족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군의 활약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