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근대 교육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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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30일 (일) 16: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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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근대교육과 기독교
집필자 황정욱
인물/기관/단체 매클레이, 앨런, 아펜젤러, 스크랜턴, 언더우드, 앨러스, 베어드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경신학교, 정신학교, 연세대학교, 이화대학교, 연희전문, 세브란스 의전,



원고

한국의 근대교육에서 기독교가 이룬 공적은 지대하다. 기독교 교육의 근대적 성격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근대화 주체세력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성경 번역을 통한 한글의 보급, 서양학문 소개, 여성교육의 실시에 기여하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오랜 쇄국정책 끝에 뒤늦게 해외에 문호를 개방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한 인재교육은 조선의 급선무였다. 새로운 서구식 학교가 정부, 민간인 유지, 선교단체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중 선교단체가 세운 학교가 시기적으로 앞서고 수적으로도 많았다.

그 전통은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계속되었다. 2016년 현재 한국의 총 대학 수 189개교 중 약 절반인 94개 대학이 기독교재단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이 미국의 해외선교단에게 문호를 열었다. 이듬해 여름 고종은 민영익에게 전권대사 자격을 주어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케 했다. 이때 뉴욕 감리회(監理會) 선교본부는 민영익으로부터 조선의 사정을 청취하고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에 머물던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ey)가 본부의 지시를 받고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매클레이 부처는 1884년 6월 한국에 도착하여 김옥균의 안내로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의사 앨런(H.N. Allen)부처, 이듬해 4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함께 조선에 들어왔고, 한달 후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여사(Mrs, M. F. Scranton)가 도착했다.

알렌은 1885년 의료기관이면서 서양식 의료교육을 겸한 광혜원을 세웠고, 아펜젤러는 미션스쿨 1호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1886년 언더우드는 경신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학당을 세웠고 스크랜턴 여사는 조선 최초의 서구식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열었다. 1997년에는 북장로교 선교사 엘러스(Miss, Annie Ellers)가 서울 정동(貞洞)에 정신여학교를 세웠다.

이처럼 기독교계 학교는 처음 서울을 중심으로 세워졌으나 차츰 지방으로 퍼져나가 거의 전국화되었다. 평양에서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W. M. Baird,裵緯良)가 13명의 학생을 모아 ‘숭실학당'을 시작했다. 평양의 기독교 유지들이 운영해 온 이 학교는 1900년에 수업연한 5년으로 하는 정식 중학교가 되었고, 1905년 가을학기부터 고등교육과정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0년 2월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의 종파 별 통계를 보면 장로파가 501교, 감리파가 158교, 성공회(聖公會)가 4교, 안식교가 2교, 종파 미상교가 84교, 각 파 합동이 1교, 천주교 46교로 신·구교회가 세운 학교는 모두 796교였다. 남자학교보다 여자학교가 많았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경신학교의 대학과정인 조선기독교대학은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4년제 연희대학교로 승격했고, 1957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통합하여 명문사학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고종이 학교이름을 하사한 이화학당은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세워 고등교육에도 진출했으며, 오늘날 세계 최대의 명문여성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배재학당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입학하여 처음 서양문물을 배웠던 학교로 유명하다.

기독교 계열 학교들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여 다스리던 시절 심한 간섭과 견제를 받아야 했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숭실학원은 1938년 자진 폐교를 하기도 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기독교계 학교들은 새로 활력을 띄게 되었고 많은 학교가 기독교 교단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두산백과

관련자료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미션계 학교는 선교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교육에 포함된 근대적 성격이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근대적 주체 형성에도 공헌하였다. 기독교의 영향 즉, 1) 근대화의 전파와 한글을 통한 교육의 변화, 2) 교육을 통한 서양학문의 소개 3) 근대 학문의 수립 4) 여성교육의 실시, 5) 성경 번역을 통한 자국어의 보급 등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이 원고의 출처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과사전만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과 차별성이 있는 집필이 필요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 인용하였다면 정확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근대교육 기관 설립과 주요 학교의 발전에 대해서는 잘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어떠한 근대교육(즉 교육 교과목)이 이루어졌으며, 졸업생들은 어떤 활동을 하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하였는가를 써주었으면 좋겠다. : 일제 식민지에 대항, 근대학문 습득 이후의 활약 등등

- 주로 어떤 사람들이 근대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서술할 것
- 초창기 기독교교육기관이 설립되어 학생들을 모집할 때의 어려운 점도 서술할 것

- 기독교계 학교가 남자학교보다 여학교가 많은 이유도 설명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