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근대 교육과 기독교
제목 | 근대교육과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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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정욱 / 안지영 |
제목수정안 | 초기 선교사와 미션계 학교가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배재학당, 아펜젤러,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민족사학, 안창호, 대성학교, 이승훈, 오산학교, 양정의전, 보성학교, 희문의전, 보성중학교, 중동학교 |
사건 | 강화도조약 |
개념용어 | 전통교육, 기독교, 성서의 한글번역, 여성교육, 근대교육, 미션계 학교 |
목차
1차 원고
19세기 후반, 조선은 오랜 쇄국정책 끝에 뒤늦게 해외에 문호를 개방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한 인재교육은 조선의 급선무였다. 새로운 서구식 학교가 정부, 민간인 유지, 선교단체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중 선교단체가 세운 학교가 시기적으로 앞서고 수적으로도 많아서 기독교를 빼놓고 한국의 근대교육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 전통은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계속되었다. 2016년 현재 한국의 총 대학 수 189개교 중 약 절반인 94개 대학이 기독교재단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이 미국의 해외선교단에게 문호를 열었다. 이듬해 여름 고종은 민영익에게 전권대사 자격을 주어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케 했다. 이때 뉴욕 감리회(監理會) 선교본부는 민영익으로부터 조선의 사정을 청취하고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에 머물던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ey)가 본부의 지시를 받고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매클레이 부처는 1884년 6월 한국에 도착하여 김옥균의 안내로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의사 앨런(H.N. Allen)부처, 이듬해 4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함께 조선에 들어왔고, 한달 후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여사(Mrs, M. F. Scranton)가 도착했다.
알렌은 1885년 의료기관이면서 서양식 의료교육을 겸한 광혜원을 세웠고, 아펜젤러는 미션스쿨 1호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1886년 언더우드는 경신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학당을 세웠고 스크랜턴 여사는 조선 최초의 서구식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열었다. 1997년에는 북장로교 선교사 엘러스(Miss, Annie Ellers)가 서울 정동(貞洞)에 정신여학교를 세웠다.
이처럼 기독교계 학교는 처음 서울을 중심으로 세워졌으나 차츰 지방으로 퍼져나가 거의 전국화되었다. 평양에서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W. M. Baird,裵緯良)가 13명의 학생을 모아 ‘숭실학당'을 시작했다. 평양의 기독교 유지들이 운영해 온 이 학교는 1900년에 수업연한 5년으로 하는 정식 중학교가 되었고, 1905년 가을학기부터 고등교육과정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0년 2월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의 종파 별 통계를 보면 장로파가 501교, 감리파가 158교, 성공회(聖公會)가 4교, 안식교가 2교, 종파 미상교가 84교, 각 파 합동이 1교, 천주교 46교로 신·구교회가 세운 학교는 모두 796교였다. 남자학교보다 여자학교가 많았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경신학교의 대학과정인 조선기독교대학은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4년제 연희대학교로 승격했고, 1957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통합하여 명문사학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고종이 학교이름을 하사한 이화학당은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세워 고등교육에도 진출했으며, 오늘날 세계 최대의 명문여성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배재학당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입학하여 처음 서양문물을 배웠던 학교로 유명하다.
기독교 계열 학교들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여 다스리던 시절 심한 간섭과 견제를 받아야 했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숭실학원은 1938년 자진 폐교를 하기도 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기독교계 학교들은 새로 활력을 띄게 되었고 많은 학교가 기독교 교단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미션계 학교는 선교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교육에 포함된 근대적 성격이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근대적 주체 형성에도 공헌하였다. 기독교의 영향 즉, 1) 근대화의 전파와 한글을 통한 교육의 변화, 2) 교육을 통한 서양학문의 소개 3) 근대 학문의 수립 4) 여성교육의 실시, 5) 성경 번역을 통한 자국어의 보급 등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 |
• -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근대교육 기관 설립과 주요 학교의 발전에 대해서는 잘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어떠한 근대교육(즉 교육 교과목)이 이루어졌으며, 졸업생들은 어떤 활동을 하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하였는가를 써주었으면 좋겠다. : 일제 식민지에 대항, 근대학문 습득 이후의 활약 등등 - 주로 어떤 사람들이 근대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서술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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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한국의 근대교육에서 기독교가 이룬 공적은 지대하다. 기독교 교육의 근대적 성격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근대화 주체세력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성경 번역을 통한 한글의 보급, 서양학문 소개, 여성교육의 실시에 기여하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오랜 쇄국정책 끝에 뒤늦게 해외에 문호를 개방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한 인재교육은 조선의 급선무였다. 새로운 서구식 학교가 정부, 민간인 유지, 선교단체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중 선교단체가 세운 학교가 시기적으로 앞서고 수적으로도 많았다.
그 전통은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계속되었다. 2016년 현재 한국의 총 대학 수 189개교 중 약 절반인 94개 대학이 기독교재단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이 미국의 해외선교단에게 문호를 열었다. 이듬해 여름 고종은 민영익에게 전권대사 자격을 주어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케 했다. 이때 뉴욕 감리회(監理會) 선교본부는 민영익으로부터 조선의 사정을 청취하고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에 머물던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ey)가 본부의 지시를 받고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매클레이 부처는 1884년 6월 한국에 도착하여 김옥균의 안내로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의사 앨런(H.N. Allen)부처, 이듬해 4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함께 조선에 들어왔고, 한달 후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여사(Mrs, M. F. Scranton)가 도착했다.
알렌은 1885년 의료기관이면서 서양식 의료교육을 겸한 광혜원을 세웠고, 아펜젤러는 미션스쿨 1호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1886년 언더우드는 경신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학당을 세웠고 스크랜턴 여사는 조선 최초의 서구식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열었다. 1997년에는 북장로교 선교사 엘러스(Miss, Annie Ellers)가 서울 정동(貞洞)에 정신여학교를 세웠다.
이처럼 기독교계 학교는 처음 서울을 중심으로 세워졌으나 차츰 지방으로 퍼져나가 거의 전국화되었다. 평양에서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W. M. Baird,裵緯良)가 13명의 학생을 모아 ‘숭실학당'을 시작했다. 평양의 기독교 유지들이 운영해 온 이 학교는 1900년에 수업연한 5년으로 하는 정식 중학교가 되었고, 1905년 가을학기부터 고등교육과정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0년 2월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의 종파 별 통계를 보면 장로파가 501교, 감리파가 158교, 성공회(聖公會)가 4교, 안식교가 2교, 종파 미상교가 84교, 각 파 합동이 1교, 천주교 46교로 신·구교회가 세운 학교는 모두 796교였다. 남자학교보다 여자학교가 많았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경신학교의 대학과정인 조선기독교대학은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였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4년제 연희대학교로 승격했고, 1957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통합하여 명문사학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고종이 학교이름을 하사한 이화학당은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세워 고등교육에도 진출했으며, 오늘날 세계 최대의 명문여성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배재학당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입학하여 처음 서양문물을 배웠던 학교로 유명하다.
기독교 계열 학교들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여 다스리던 시절 심한 간섭과 견제를 받아야 했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숭실학원은 1938년 자진 폐교를 하기도 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기독교계 학교들은 새로 활력을 띄게 되었고 많은 학교가 기독교 교단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2차 수정 원고
한국은 오랜 기간 유교의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화도조약(1876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서구의 문화와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전통교육은 서양학문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서양학문과의 접촉은 주로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초기 선교사들의 아시아 진출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선교에 있었지만 조선정부가 선교를 금지함에 따라 의료와 교육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곳에 학교를 세우는 간접 선교방식으로 미션계 학교를 설립되었다. 그들이 펼친 교육은 한국이 전통교육에서 근대교육으로 전환하는 데 교량역할을 하였으며, 한글의 대중화를 비롯해 근대사상의 확산, 남녀평등, 민족의식 고취 등 현대식 교육의 보급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성서의 한글번역은 한글이 한국문자로 정착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대상은 주로 서민층들이었고, 이들 서민층들은 양반을 중심으로 한 전통교육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한글의 읽고 쓰기를 가르침에 따라 한글은 여성을 포함한 서민계층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한글의 대중화와 서적의 출판 보급에 따라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인도주의적 정신은 소외계층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한국의 봉건적인 사상 변화와 민족주의를 고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미션계 학교로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등이 있다. 1886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선교학교(mission school)인 배재학당이 설립하였다. 이어서 이화학당(1886년), 경신학교(1886년), 정신여학교(1887년) 등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점 전인 1909년까지 900여 개의 선교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그 중 선교사 스크랜튼은 열악한 한국의 여성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1886년 200평 정도의 교사를 마련해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다. 이것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의 효시이다. 이렇게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미션계 학교인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영화학당 등은 당시 전통교육에서 제외되었던 여성에 대한 교육을 타파함으로써 한국 여성 교육 근대화에 기여한다.
이외에도 한글의 보급과 미션계 학교를 통한 서양학문의 소개와 교육은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근대적 주체 형성에도 공헌을 한다. 그 예로 기독교계의 학교설립에 자극을 받은 민간인 선각자들이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사립학교들이 설립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근대교육의 보급과 확산을 교육구국운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하고, 대한자강회, 교남학회 등 각종 학회를 조직하거나 지방자치를 표방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근대교육의 보급·확산에 노력했다. 심지어 일부 지식인들은 국민교육론에 근거하여 의무교육을 주장하기도 하고, 사립학교·야학· 강습소 운영에 노력했다.
이들이 설립한 학교들은 현재까지도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사학으로 남아있으며, 도산의 대성학교(1907)과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1907), 1905년에 양정의전과 보성학교, 1906년에 설립한 희문의전, 보성중학교, 중동학교 등이 있다.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미션계 학교의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션계 학교는 교육을 통한 근대교육의 확산은 물론 서양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회 지도층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션계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 강사들은 선교사들보다 학생들에게 서양의 교과를 가르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배재학당에서 강의한 서재필, 윤치호 등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미션계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주의 정신에 기반하여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위해 노력했다.
이와 같이 초기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성경을 번역, 출판하고, 미션계 학교를 설립했지만,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들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글을 보급하고, 교육을 통해 여성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근대사상과 서양사상을 한국에 도입해 한국의 근대교육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함께 우리민족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수용 노력은 오랜 기간 사회 엘리트 계층에 한정되었던 유교 경전 중심의 전통교육을 서민과 여성을 포함한 교육의 대중화와 한국 근대교육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교열본
간접 선교 방식으로 설립된 학교
한국은 오랜 기간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화도조약(1876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서구의 문화와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전통교육은 서양학문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서양학문과의 접촉은 주로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초기 선교사들이 아시아에 진출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선교에 있었지만 조선정부가 이를 금지함에 따라 의료와 교육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곳에 미션계 학교를 대신 세우는 간접 선교방식을 택했다. 그들이 학교를 통해 펼친 교육은 한국이 전통교육에서 근대교육으로 전환하는 데 교량역할을 하였다. 한글의 대중화를 비롯해 근대사상의 확산, 신분제도 타파, 남녀평등, 민족의식 고취 등 현대식 교육의 보급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글을 통해 확산된 근대 사상
특히 성서의 한글번역은 한글이 한국 문자로 정착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대상은 주로 서민층들이었고, 이들 서민층들은 양반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읽고 쓰기를 가르치면서 한글은 여성을 포함한 서민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한글의 대중화되고 한글 서적이 다량으로 출판 보급되면서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인도주의적 정신 또한 널리 전파되었다. 이는 한국의 봉건적인 사상을 변화시키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미션계 학교로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등이 있다. 1886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선교학교(mission school)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이화학당(1886년), 경신학교(1886년), 정신여학교(1887년) 등 900여 개의 선교학교들이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점 전인 1909년까지 설립되었다.
그 중 선교사 스크랜튼은 열악한 한국의 여성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1886년 200평 정도의 교사를 마련해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이것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의 효시이다. 이렇게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미션계 여학교인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영화학당 등은 당시 전통적인 교육에서 제외되었던 여성에 대한 교육을 시행함으로써 한국 여성 교육 근대화에 기여했다.
민간 사학 설립으로 이어진 기독교계 교육
이외에도 한글의 보급과 미션계 학교를 통한 서양학문의 소개와 교육은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근대적 주체 형성에도 공헌을 했다. 그 예로 기독교계의 학교설립에 자극을 받은 민간인 선각자들이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사립학교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근대교육의 보급과 확산을 교육구국운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하고, 대한자강회, 교남학회 등 각종 학회를 조직하거나 지방자치를 표방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근대교육의 보급·확산에 주력했다. 심지어 일부 지식인들은 국민교육론에 근거하여 의무교육을 주장하기도 하고, 사립학교·야학· 강습소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이 설립한 학교들은 현재까지도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사학으로 남아있다. 도산이 세운 대성학교(1907)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1907가 대표적이다. 또 양정의숙과 보성학교(1905), 1906년에 설립한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중동학교 등이 있다.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미션계 학교의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션계 학교는 교육을 통한 근대교육의 확산은 물론 서양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회 지도층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션계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 강사들은 선교사들보다 학생들에게 서양의 교과를 가르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배재학당에서 강의한 서재필, 대성학교를 세운 안창호 등이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미션계 학교 출신 한국인들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주의 정신에 토대를 두고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위해 노력했다.
한국 사회의 근대화로 연결
이와 같이 초기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성경을 번역, 출판하고, 미션계 학교를 설립했지만, 한국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들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글을 보급하고, 교육을 통해 여성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함께 우리민족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수용 노력은 교육의 대중화와 한국 근대교육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사회 엘리트 계층에 한정되었던 유교 경전 중심의 전통교육은 서민과 여성을 포함한 일반 국민 전체로 확산되었다.
더불어 이를 통해 한국에 도입된 근대사상과 서양사상이 확산됨에 따라 신분제 붕괴도 가속화되었다. 교육을 통해 대물림되던 지위를 뛰어넘는 지도자도 배출되었으며, 이런 성공 경험은 한국의 교육열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이경자, 「미션계 학교가 한중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中國學論叢』 제45집,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2016, 75-103쪽.
- 노영숙, 「개화기 선교사들의 기독교 교육이 근대 교육·문화에 기여한 교육적 의의-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1884-1941)」, 『기독교교육논총』 제34집, 한국기독교교육학회, 2013, 349-388쪽.
- 류성민, 「근대 한국사회 변동과 개신교」, 『제31회 원불교사상연구원 학술대회』 Vol.2012 No.2,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2, 85-103쪽.
- 노인화, 「대한제국 시기 관립학교 교육의 성격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9.
- 김형목, 『대한제국기 야학운동』 경인문화사, 2005.
- 정수화, 「구한말 근대교육 전개과정에서의 주도세력 고찰」, 『유관순 연구』 제9집,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06, 111-132쪽.
- 관련자료
- 이경숙, 손운산, 정용석, 박경미, 양명수, 장윤재, 『기독교와 세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3.
- 이성전 지음. 서정민·가미야마 미나코 옮김, 『미국선교사와 한국 근대교육 : 미션스쿨의 설립과 일제하의 갈등』,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 『한국의 사학』, 민중서관,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