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한반도에서 일어난 열강의 각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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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19일 (일) 19: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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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한반도에서 일어난 열강의 각축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이후 한반도에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청은 1882년 임오군란을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크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을 두고 청과 일본이 경쟁하던 1894년, 부패한 관리와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외세를 몰아내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자’고 궐기한 동학농민운동이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청이 군사를 보내자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여 두 나라의 군대는 거의 동시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파병에 놀란 조선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약(전주화약)을 맺어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청일 양군이 동시에 철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청일전쟁 풍자화 :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가 1887년 2월 15일자 잡지 ‘도바에’에 실은 삽화로 제목은 ‘낚시 놀이’이다. 청일전쟁 발발 직전 정세를 그린 풍자화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내정개혁’을 핑계 삼아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후, 선전포고도 없이 청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한반도는 청과 일본의 전쟁터로 변하였고 조선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제공격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심화했다. 이에 해산했던 농민군은 일본을 몰아내자며 다시 봉기하였으나 일본군의 최첨단 무기에 처참히 무너졌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임과 동시에 한반도 내에서는 일본군과 동학 농민군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다.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넘겨받았으며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도 인정받았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는 사실상 무너졌고, 청은 열강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옛 러시아 공사관(서울 중구 정동)

일본의 승리는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를 자극하였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청에 반환하라고 압력을 가해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을 저지하였다(삼국간섭). 이를 지켜본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정책을 추진하였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깡패와 군대를 동원해 중전 민씨를 살해하고(을미사변), 단발령과 같은 강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한층 증대되었다.

아관파천 일 년 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황제 칭호는 일본이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벗어나게 한다는 명분으로 착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있어 그것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교육과 상공업을 진흥시켰으며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 때, "조선"을 대신하는 새로운 나라 이름으로 정한 "대한제국"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호의 연원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결과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한 대한제국의 노력은 러일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 청으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뤼순항을 조차하며 만주에서 입지를 강화해갔다. 또 러시아는 의화단운동(1899-1901)을 빌미로 파견하였던 군대 일부를 철수하지 않고 압록강 주변에 주둔시켰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뿐 아니라 영국을 자극하였다. 영국은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1902)을 맺어 일본을 지지하였고, 러시아가 압록강 입구의 용암포를 조차하자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후원을 얻게 된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해 중립국화를 시도하였지만 열강에 의해 묵살 당했다. 러시아가 쉽게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서양 열강들의 전망과 달리 일본은 1905년 초 뤼순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그 결과 1905년 9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고, 만주 남부의 철도 부설권을 인정받았다.

러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의 국내 상황도 변화시켰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로 전쟁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갔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생활이 빈곤해진 국민들 사이에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막힌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로 침략의 방향을 옮기면서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촉진시켰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여 1910년 한국의 국권을 박탈했다. 청일전쟁러일전쟁, 한반도를 둘러싼 두 차례의 전쟁은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이 쟁탈전의 최종 피해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한국이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