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제도: 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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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17일 (금) 00: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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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제도: 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이해

조공과 책봉-외교적 형식

조공(朝貢)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冊封)’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

이런 관계는 중국 고대 주나라 때에 귀족들에 대해서 시작되었다.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조공과 책봉이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 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명·청 시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책봉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조공과 책봉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주위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린 듯한 인상을 준다. 조공 책봉으로 형성된 중국을 둘러싼 국가간의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근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하였을까?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인가?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조공과 책봉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국제 무역이었던 조공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 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의 침략을 막으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에게 조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였으며 중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한 국제무역이기도 했다. 중국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게 그 몇 배의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로 조공과 책봉을 택했듯이 중국 역시 주변국의 중국 침략을 막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다. 심지어 과도한 하사품이 중국의 재정을 압박하자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제한하고 주변국은 오히려 조공을 주장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하사품 외에도 공식적인 사절단을 따라 온 상인들을 통해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이는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 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공식적으로 주고 받는 조공품과 하사품 외에 이를 계기로 이루어지는 사무역 비중도 높았다. 또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서도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

소중화사상

중국에서 명이 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이중적인 태도로 중국을 대하게 되었다. 그 동안 조선과 명나라는 양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조공 책봉으로 국교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욱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지원병을 보내준 일도 있어 조선은 명나라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조선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불러온 만주족의 나라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을 한 후 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동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월감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이라고 한다. 중국조차 문화적 후진국으로 본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은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 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음을 의미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수천 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거나 중국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천 년간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온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관련항목

  • 조공
  • 책봉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