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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바로 38선을 통제하였다. 8월 말에는 남북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모두 막았다. 9월 6일에는 통신을 끊고 우편물이 오고가는 것도 금지했다. 원래 38선은 미소 연합국이 점령지를 구분 짓기 위한 단순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은 남한과 북한을 분단시키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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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발발=== | ||
+ |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략을 해왔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남한보다 훨씬 뛰어났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유엔은 바로 다음 날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에게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유엔은 세계 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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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간 국군과 유엔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남한군은 그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도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낙동강을 뚫지 못했다. 그 무렵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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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였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도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30만 명이나 되는 중국 공산군이 참전했고 11월 말에는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해야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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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년 1월 4일, 아군은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겼다.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은 후 38선까지 영토를 회복했고 38선 근처에서는 양쪽 진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을 계속해봤자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현재 형성된 전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회담이 시작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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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전 회담은 2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2년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을 선거 공약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싸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전 협정에 반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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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우리의 의견은 무시된 채, 공산 국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넘긴다는 안이 휴전 회담에서 합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6천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중단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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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을 통일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는다. 미국 정부가 허용하는 한 장기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유엔군의 정전 결정을 받아들였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 조인이 이뤄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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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전은 했지만 6.25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다. 국군과 유엔군 119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부상당하였고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남북한의 인명 피해 규모는 500만 명이 넘었다.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 명에 이르렀고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거의 전국이 다 전쟁터였기 때문에 건물은 물론 도로, 철도, 항만과 산업 시설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커다란 피해는 같은 민족끼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적대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 ||
2017년 11월 27일 (월) 11:28 판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분단과 한국전쟁
38선을 통제한 소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이 항복한 것은 8월 11일이었지만 소련은 8일부터 한반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도 서둘러 군대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소련군은 미군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먼저 들어올 수 있었다. 다급해진 미군은 소련이 남쪽으로 더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고 8월 27일까지 38선 이북의 북한 전 지역을 점령했다. 미군은 9월 8일에야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바로 38선을 통제하였다. 8월 말에는 남북을 잇는 경원선과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모두 막았다. 9월 6일에는 통신을 끊고 우편물이 오고가는 것도 금지했다. 원래 38선은 미소 연합국이 점령지를 구분 짓기 위한 단순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은 남한과 북한을 분단시키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략을 해왔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남한보다 훨씬 뛰어났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유엔은 바로 다음 날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에게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유엔은 세계 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계속 남쪽으로 밀려 내려간 국군과 유엔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남한군은 그곳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도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낙동강을 뚫지 못했다. 그 무렵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였다. 10월 7일에는 유엔군도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30만 명이나 되는 중국 공산군이 참전했고 11월 말에는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해야 했다.
1951년 1월 4일, 아군은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겼다.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은 후 38선까지 영토를 회복했고 38선 근처에서는 양쪽 진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을 계속해봤자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현재 형성된 전선에서 휴전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회담이 시작되었다.
휴전으로 중지된 전쟁
휴전 회담은 2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2년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을 선거 공약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싸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전 협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의견은 무시된 채, 공산 국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넘긴다는 안이 휴전 회담에서 합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6천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했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중단되었다.
미국은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을 통일하는 데 계속 노력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는다. 미국 정부가 허용하는 한 장기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유엔군의 정전 결정을 받아들였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 조인이 이뤄졌다.
휴전은 했지만 6.25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다. 국군과 유엔군 119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부상당하였고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남북한의 인명 피해 규모는 500만 명이 넘었다.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 명에 이르렀고 물적 피해도 엄청났다. 거의 전국이 다 전쟁터였기 때문에 건물은 물론 도로, 철도, 항만과 산업 시설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커다란 피해는 같은 민족끼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적대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