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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 |
− |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 + |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 |
− | + | [[가야|가야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가야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 왜(大和倭: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 |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 ||
− |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야마토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야마토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 + |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가야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고, [[가야|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고 주장하였다. |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 ||
===임나일본부설의 현재=== | ===임나일본부설의 현재=== | ||
− | + |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 |
− |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 + |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가야|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가야]]와 야마토 왜, 그리고 [[백제]]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임나일본부는 그러한 교역과 관련된 기구였다고 보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고대 한일 관계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고 그 주체는 누구였는지 밝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해야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
− |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 + |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벗어나 한반도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올바로 밝히려는 노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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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 *[[가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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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 | + |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 |
− | *[[일본서기]] | + | *『[[일본서기|일본서기(日本書紀)]]』 |
*[[백제]] | *[[백제]] | ||
*[[삼국시대]] | *[[삼국시대]] |
2017년 11월 19일 (일) 15:38 판
고대의 한일관계
가야(加耶)는 어떤 나라였을까?
가야는 서기 전 1세기경부터 서기 6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이다. 서기전 1세기 경 낙동강 유역에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가 유입되면서 가야 문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흩어져 있던 소국들은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흔히 전기 가야연맹(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국(加耶國: 加羅國)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나타났다.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며 발전해 나갔으나, 가야 전역을 통합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532년 김해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이, 562년에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나머지 소국들도 대부분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연맹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고, 일찍부터 제철기술이 발달하여 이웃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특히 후기 가야연맹은 백제와 왜 사이에서 활발하게 중계 무역을 하였는데, 이 시기 가야와 야마토 왜(大和倭: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의 관계에 대하여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야마토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한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부르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기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로부터 외국 세력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광개토왕릉비문과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를 의미하거나 가야연맹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손상된 글자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391년에 왜가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고, 가야(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경영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의해 시작되어 20세기 초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며 한반도 남부는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이 지배해 온 지역이므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의 현재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의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학자들이 기존에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대대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는 고고학적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4~6세기 경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다만 6세기 전반에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현재 한반도 남부의 함안 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가야와 야마토 왜, 그리고 백제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임나일본부는 그러한 교역과 관련된 기구였다고 보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 고대 한일 관계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고 그 주체는 누구였는지 밝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에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속적인 연구 끝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해야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최근 일본사 연표(2011)에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표기하고,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2015)에도 수록하는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역사가 현대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은 제국주의 시대의 왜곡된 고대사 연구와 식민사관을 벗어나 한반도와 고대 일본의 관계를 올바로 밝히려는 노력이다.
관련항목
- 가야
- 임나일본부설
- 광개토대왕
- 『삼국사기(三國史記)』
- 『일본서기(日本書紀)』
- 백제
- 삼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