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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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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자주 노력의 방안으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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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발의로 시작된 농촌종합개발운동이다. 그는 근면·자조·협동을 이 운동의 기본 정신으로 제시했다. 나와 지역사회의 문제를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나서고 이웃과 협력하여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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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먼저 농민들의 자세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꾸고, ‘우리도 할 수 있다’ (can-do spirit)는 의식을 계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새마을운동을 정착시키려면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마을의 협동 체제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부지런한 농민’ ‘잘사는 농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변화의 촉매제가 될 활동으로 먼저 마을환경개선사업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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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농한기를 이용하여 주민 주도아래 마을환경개선사업을 하도록 전국의 3만 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했다. 각 마을은 사업 추진기구로 주민개발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 사업을 결정하고 주민의 협동으로 이를 추진했다. 마을 안 길을 포장하거나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낡은 담장을 새로 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바꾸는 것 등이 그 사업내용이었다. 짧은 시간에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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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적으로 확산된 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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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는 새마을운동을 이끌어 갈 주민지도자의 발굴과 훈련, 이들의 활동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사업내용도 생활환경개선과 영농기반 조성사업 등을 계속 추진하면서 이에 더해 주민들의 의식계발사업과 소득증대사업 등도 포괄하는 종합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종자개량, 경지정리, 농업기계화, 선진영농법 도입 등에 새마을운동 조직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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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사업이 부진한 마을을 돕는 대신 성과가 좋은 마을에게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줌으로써 마을 간의 경쟁과 분발을 촉진하는 시책을 썼다. 1973년 정부는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있는지를 평가해 전국 3만5천 개 마을을 자립 마을, 자조 마을, 기초 마을로 나누었다. 가령 기초 마을은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없는 마을로 그 등급에 맞게 적합한 사업 과제가 주어지고 이에 따라 정부 지원도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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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등급이 나뉘고 승급 기준이 정해지자 전국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갔다. 마을 사이에 경쟁심이 자극된 것이다. 1979년까지 전국 3만5천 개 마을 중 97%가 자립 마을로 승격했고 기초 마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좋은 성과를 낸 마을의 지도자는 대통령이 참석한 새마을지도자 회의에서 성공사례발표를 하여 다른 마을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노록 했다. 성공사례로 뽑힌 마을에는 전국의 농촌지도자들이 견학을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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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지역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둔 새마을 운동은 그 후 도시, 직장, 공장 등으로 확대되었다. 도시새마을운동은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쓰레기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에 중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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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는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민간주도의 추진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이 기구는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과 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담당했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 후인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 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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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수출되는 개발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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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수 천 년을 이어온 한국농민의 수동성과 농촌의 빈곤을 타파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독창적인 지역사회개발 모델이지만 비슷한 발전 단계에 놓인 다른 나라에서도 도입해 볼만한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 국가원수들이 이 모델을 도입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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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도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전수하는 데 적극 나섰다.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한국에서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았다. 또한 한국해외협력단(KOICA)이 개발도상국에 파견하는 해외협력단원들은 여러 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을 전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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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79동안의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관련항목'''==
 
=='''관련항목'''==

2017년 11월 27일 (월) 11: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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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과 박정희, 조국 근대화

농촌 자주 노력의 방안으로 시작

새마을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발의로 시작된 농촌종합개발운동이다. 그는 근면·자조·협동을 이 운동의 기본 정신으로 제시했다. 나와 지역사회의 문제를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나서고 이웃과 협력하여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농민들의 자세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바꾸고, ‘우리도 할 수 있다’ (can-do spirit)는 의식을 계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새마을운동을 정착시키려면 농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마을의 협동 체제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부지런한 농민’ ‘잘사는 농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변화의 촉매제가 될 활동으로 먼저 마을환경개선사업을 제시했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농한기를 이용하여 주민 주도아래 마을환경개선사업을 하도록 전국의 3만 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했다. 각 마을은 사업 추진기구로 주민개발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 사업을 결정하고 주민의 협동으로 이를 추진했다. 마을 안 길을 포장하거나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낡은 담장을 새로 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바꾸는 것 등이 그 사업내용이었다. 짧은 시간에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경쟁적으로 확산된 새마을운동

1972년부터는 새마을운동을 이끌어 갈 주민지도자의 발굴과 훈련, 이들의 활동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사업내용도 생활환경개선과 영농기반 조성사업 등을 계속 추진하면서 이에 더해 주민들의 의식계발사업과 소득증대사업 등도 포괄하는 종합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종자개량, 경지정리, 농업기계화, 선진영농법 도입 등에 새마을운동 조직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부는 사업이 부진한 마을을 돕는 대신 성과가 좋은 마을에게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줌으로써 마을 간의 경쟁과 분발을 촉진하는 시책을 썼다. 1973년 정부는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있는지를 평가해 전국 3만5천 개 마을을 자립 마을, 자조 마을, 기초 마을로 나누었다. 가령 기초 마을은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없는 마을로 그 등급에 맞게 적합한 사업 과제가 주어지고 이에 따라 정부 지원도 제공되었다.

이렇게 등급이 나뉘고 승급 기준이 정해지자 전국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갔다. 마을 사이에 경쟁심이 자극된 것이다. 1979년까지 전국 3만5천 개 마을 중 97%가 자립 마을로 승격했고 기초 마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좋은 성과를 낸 마을의 지도자는 대통령이 참석한 새마을지도자 회의에서 성공사례발표를 하여 다른 마을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노록 했다. 성공사례로 뽑힌 마을에는 전국의 농촌지도자들이 견학을 가기도 했다.

농촌지역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둔 새마을 운동은 그 후 도시, 직장, 공장 등으로 확대되었다. 도시새마을운동은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쓰레기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에 중점을 두었다.

1980년에는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민간주도의 추진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이 기구는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과 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연구사업을 담당했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 후인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 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해외로 수출되는 개발 모델

새마을운동은 수 천 년을 이어온 한국농민의 수동성과 농촌의 빈곤을 타파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독창적인 지역사회개발 모델이지만 비슷한 발전 단계에 놓인 다른 나라에서도 도입해 볼만한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 국가원수들이 이 모델을 도입하고 싶어 했다.

한국정부도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전수하는 데 적극 나섰다.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한국에서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았다. 또한 한국해외협력단(KOICA)이 개발도상국에 파견하는 해외협력단원들은 여러 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을 전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1970-1979동안의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관련항목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