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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6일 (월) 10:41 판

영문 원고 번역본

조선 왕조는 1392년에 성립되어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왕조의 창시자로서 훗날 태조가 되는 이성계는 고려에서 성공한 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외적의 침략과 정통성의 문제로 몰락하고 있던 왕조를 교체하고 국호를 개칭하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그는 오늘날 서울의 일부인 한양으로 천도하여 성을 쌓고 여러 궁궐을 지었다. 조선의 네 번째 왕인 세종은 과학, 음악, 교양 교육 등 각 분야에서 혁신을 고취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업적은 유학 학설의 보급과 평민들의 실용적 지식 습득을 용이하게 하고자 표음 문자를 창제하도록 명한 데 있다. 이후 15세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조선은 여러 차례의 사화와 당쟁을 겪었다. 1592년에, 그리고 1597년에 다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에서 이순신 제독은 “세계 최초의 철갑 전함으로 평가받는 거북선을 배치하고 눈부신 함대 기동 작전을 구사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침략에 결국 실패함으로써 일본군은 1598년에 완전히 철수하지만, 인명 손실 및 기근과 함께 중요 문헌. 공예품, 건축물의 대대적인 파괴와 도난으로 인해 조선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다음 세기에 들어 1627년과 1637년에 다시 조선은 만주족의 침략을 받게 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정부와 양반 계급은 거듭되는 당쟁에 시달렸다. 그로 인한 정치적 폐해를 시정하고자 영조(재위 1724~1776)는 탕평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정조(재위 1776~1800)는 탕평책을 유지하는 한편,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왕실 문헌과 기록과 보존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다른 정치적 문화적 개혁도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실학이란 꽃이 활짝 피었다. 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진보적인 저작을 써서, 농업과 산업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는 정부의 정책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은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항구를 개방하라는 국제적인 압박을 받았으며, 1876년에는 일본의 강요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 동학 농민 운동(1894)과 같은 내부 갈등을 겪으면서 일본으로부터 계속되는 압박을 받았는데, 그 압박은 일본의 민비 시해 사건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러한 분규 속에서 고종은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개칭함으로써 왕조를 강화해 보고자 하였지만,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면서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린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이에 따라 불교는 무속 신앙과 함께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널리 신봉되었다. 중앙 정부는 의정부와 6조, 승정원 및 3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부에서 일하려면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하였다. 사회는 고도로 신분화되어, 왕실 가문과 귀족인 양반 계급, 중인 계급, 평민인 상민 계급, 천민과 노비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사회 이동의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아서, 특히 과거 시험은 모든 남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지만, 경제적 장벽으로 인해 사회 이동은 어려웠다. 신분이 높을수록 남녀 성별에 따른 구분을 확연하게 두었다. 여성은 왕실 여인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가정사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속은 장자 상속제에 따랐다. 양반과 평민 모두 음악과 춤을 즐겼지만, 스타일은 크게 달랐다. 상류층의 정악은 세련되고 느리고, 종종 서성적인 시가에 바탕을 둔 반면에 농악이나 판소리, 탈춤과 같은 속악은 거칠고 기운차고, 종종 풍자적이었다. 회화와 도자 예술도 융성하였다.

조선은 명나라 및 청나라와 조공 관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