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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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고

조선 왕조는 1392년에 성립되어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왕조의 창시자로서 훗날 태조가 되는 이성계는 고려에서 성공한 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외적의 침략과 정통성의 문제로 몰락하고 있던 왕조를 교체하고 국호를 개칭하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그는 오늘날 서울의 일부인 한양으로 천도하여 성을 쌓고 여러 궁궐을 지었다. 조선의 네 번째 왕인 세종은 과학, 음악, 교양 교육 등 각 분야에서 혁신을 고취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업적은 유학 학설의 보급과 평민들의 실용적 지식 습득을 용이하게 하고자 표음 문자를 창제하도록 명한 데 있다. 이후 15세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조선은 여러 차례의 사화와 당쟁을 겪었다. 1592년에, 그리고 1597년에 다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에서 이순신 제독은 “세계 최초의 철갑 전함으로 평가받는 거북선을 배치하고 눈부신 함대 기동 작전을 구사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침략에 결국 실패함으로써 일본군은 1598년에 완전히 철수하지만, 인명 손실 및 기근과 함께 중요 문헌. 공예품, 건축물의 대대적인 파괴와 도난으로 인해 조선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다음 세기에 들어 1627년과 1637년에 다시 조선은 만주족의 침략을 받게 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정부와 양반 계급은 거듭되는 당쟁에 시달렸다. 그로 인한 정치적 폐해를 시정하고자 영조(재위 1724~1776)는 탕평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정조(재위 1776~1800)는 탕평책을 유지하는 한편,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왕실 문헌과 기록과 보존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다른 정치적 문화적 개혁도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실학이란 꽃이 활짝 피었다. 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진보적인 저작을 써서, 농업과 산업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는 정부의 정책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은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항구를 개방하라는 국제적인 압박을 받았으며, 1876년에는 일본의 강요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 동학 농민 운동(1894)과 같은 내부 갈등을 겪으면서 일본으로부터 계속되는 압박을 받았는데, 그 압박은 일본의 민비 시해 사건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러한 분규 속에서 고종은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개칭함으로써 왕조를 강화해 보고자 하였지만,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면서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린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이에 따라 불교는 무속 신앙과 함께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널리 신봉되었다. 중앙 정부는 의정부와 6조, 승정원 및 3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부에서 일하려면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하였다. 사회는 고도로 신분화되어, 왕실 가문과 귀족인 양반 계급, 중인 계급, 평민인 상민 계급, 천민과 노비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사회 이동의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아서, 특히 과거 시험은 모든 남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지만, 경제적 장벽으로 인해 사회 이동은 어려웠다. 신분이 높을수록 남녀 성별에 따른 구분을 확연하게 두었다. 여성은 왕실 여인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가정사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속은 장자 상속제에 따랐다. 양반과 평민 모두 음악과 춤을 즐겼지만, 스타일은 크게 달랐다. 상류층의 정악은 세련되고 느리고, 종종 서성적인 시가에 바탕을 둔 반면에 농악이나 판소리, 탈춤과 같은 속악은 거칠고 기운차고, 종종 풍자적이었다. 회화와 도자 예술도 융성하였다.

조선은 명나라 및 청나라와 조공 관계에 있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1.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 → “517년/약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

2. “오늘날 서울의 일부인 한양” → “오늘날 서울의 중심인 한양”
3. “궁궐을 지었다.” → “궁궐과 관청을 지었다.”
4. “과학, 음악, 교양 교육 등 각 분야에서” → “법제, 세법, 과학, 음악, 교육, 농업 등 각 분야에서”
5. “표음 문자를 창제하도록 명한 데 있다” → “표음 문자 한글(Korean Alphabet system)을 스스로 창제한 데 있다”
6. "다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7. “다음 세기에 들어 1627년과 1637년에 다시 조선은 만주족의 침략을 받게 된다. ” → “1627년과 1637년에 다시 조선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침략을 받게 된다. 강화 협상의 결과 조선은 명나라와 단교하고, 청나라와 새롭게 사대관계(종속적인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8. “규장각을 설치하여 왕실 문헌과 기록과 보존하도록 하였다” → “규장각을 설치하여 왕실 문헌을 보존하고 정치 문화적 개혁을 선도하게 하였다”
9. “그는 다른 정치적 문화적 개혁도 시행하였다” → “그는 사회적 개혁을 시행하고 서울의 남쪽에 수원성을 신축하여 수도를 옮길 준비를 하였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루지 못했다.”
10. “실학이란 꽃이 활짝 피었다.” → “실학이란 새로운 경향의 실용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학문 경향이 성행하였다.”
11. “민비 시해 사건” → “명성왕후 시해 사건”
12. “대한제국으로 개칭함으로써” →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개혁정치를 시행함으로써”
13. “정부에서 일하려면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하였다.” → “정부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고관으로 승진하려면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하였다.”
14. “신분이 높을수록 남녀 성별에 따른 구분을 확연하게 두었다.” → “남녀의 성별에 따른 차별이 심하여 여성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15. “상속은 장자 상속제에 따랐다.” → “상속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여 신분과 제사권 등을 세습하였지만, 재산의 상속은 자녀들 자매 간에 공평하게 하였다.

16. “조선은 명나라 및 청나라와 조공 관계에 있었다.” → “조선은 명나라 및 청나라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중국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이나 유구, 여진 등과는 교린 정책으로 평화를 도모하였다.”



수정 원고

  • 제목: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

이성계에 의해 개창된 조선왕조는 1392년에 성립되어 약 5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왕조의 창시자인 이성계는 고려 말 많은 공을 세운 가장 명망이 높았던 장군 가운데 하나로,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혼란한 정세를 극복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는 고려 말 사회 개혁을 주도했던 성리학자 집단인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당시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첫째, 고려왕이었던 우왕의 혈통에 대한 문제, 둘째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토지개혁, 셋째,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권문세족들을 제거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 넷째,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 중심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 다섯째, 여러 폐단을 야기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것들이었다.

그 개혁의 추진 속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한때 신진사대부들은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성계는 그 반대파들을 제거하면서 마침내 조선 건국에 찬성하는 신진사대부를 위주로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때 가장 앞장 선 인물은 정도전으로 그는 태조 이성계의 신임 속에 중국의 동의를 얻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도읍을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정했으며, 왕궁인 경복궁을 짓고 새나라 조선의 여러 국가제도들을 마련해 가며 정치를 주도해갔다.

신하인 정도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상황에 대해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던 몇몇 왕자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왕위에 올라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태종은 국왕이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모든 국정을 자신이 직접 관장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했으며, 왕권에 방해가 되는 외척세력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때문에 그 토대 위에 등극한 세종은 다져진 왕권 위에서 찬란한 문화정치를 꽃 피울 수 있었다.

성리학이 꿈꾸는 이상정치를 실현하는데 집중하였던 세종은 신하들이 마음껏 정치를 논의할 수 있도록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해 국왕의 권력을 신하에게 나눠주었다. 또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각종 농사기술을 기록한 책들을 보급하고 측우기와 물시계 등의 발명을 장려하였다. 특히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한글을 창제하여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글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시에 북쪽으로 4군과 6진을 개척해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줄곧 세종과 그 아들인 문종의 치세를 제일가는 태평성대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어린 조카를 제거하고 왕이 된 세조 이래로 한동안 조선은 정치적 혼란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여러 정치적 격변 속에 성장한 공신 세력들은 자신의 위세를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켰으며, 이에 조선의 지배계층 안에서는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두되면서 사림이 등장하였다.

훈구라 불리웠던 공신 세력들을 비판하며 조선의 혁신을 주장했던 사림은 여러 현안에 따라 그들과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급기야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던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4대 사화’이다.

사림에 대한 훈구의 박해는 대략 조선 중기 명종때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그들은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 지식인들을 기르는 교육에 매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 이후 훈구세력들이 모두 제거되면서 사림은 어느덧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선조 즉위를 계기로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리학 사회를 만들고자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었다. 하지만 각 학파들의 입장에 따라 그 정치적 견해는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다시 정파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것이 곧 ‘당쟁’이다.

당쟁은 중앙정치의 혼란으로 이어졌으며, 선조 당시 직면했던 다양한 문제에 적절한 대응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었으며, 이것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겪었던 가장 큰 전란이었으며, 조선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대략 조선의 인구와 토지의 1/3이 사라졌으며, 도읍지 한양의 궁궐은 불타 각종 문서와 전각들은 모두 사라졌다. 특히 일본군의 침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던 조선 정부의 무능함은 가장 뼈아픈 상처였다.

명군의 참전으로 전기를 마련한 조선의 관군은 이순신과 권율 등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여기에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과 승병들의 활약도 대단히 컸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1598년 7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그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전후 선조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부적으로 여러 전후 사업들을 추진하는 가운데 밖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여진족, 즉 후금을 의식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균형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중립적인 외교를 펼쳐갔다. 하지만 그 결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후금을 배척하는 세력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어머니 인목대비와 동생 영창대군을 유폐하거나 죽인일로 정변이 일어나 결국 광해군은 왕위를 읽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인조는 명나라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며 후금을 적대시하였다. 이에 후금은 더욱 강성해져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을 두 차례 쳐들어온다. 이른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인 것이다. 조선은 청나라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끝내 지금의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청나라와 강화를 체결한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질서에 편입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즉 양란을 거치며 조선은 피폐해진 사회를 회복시키는 한편 무너진 질서와 기강을 다시 바로잡는데 주력한다. 물론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였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걸고 조선 사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효종대에 와서는 급기야 청나라에 대한 복수전을 기획하면서 이른바 ‘북벌’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부흥기는 조선 후기 숙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숙종 이후 영조와 정조에 이르는 대략 120년간의 정치에서 조선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다시 확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탕평’이란 이름으로 시도되었다.

당시 학문적 배경에 따라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던 신하들을 강력한 왕권으로 제어하는 것에 탕평책은 그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국왕의 권력을 강화되었고 재삼 정치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토대 위에서 이들 국왕들은 과감하게 조선 사회를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뒤 그 아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그러한 균형은 다시 깨지게 되었다. 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에 이르기까지 대략 3대에 걸친 60여년간의 조선은 다시 왕권이 약화되고 국왕의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세도정치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출현한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극심하였다. 중요한 관직은 대부분 세도가문과 연결된 사람들에게만 돌아갔으며, 그들로부터 자행된 부정부패 역시 심각했다. 이로써 조선은 점차 나라 밖 세상의 변화로부터 멀어지면서 내부적으로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사회에 진입하여 놀라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러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점점 그 흐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과 서양 근대국가와의 간극은 더욱더 커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철종이 죽고 어린 고종이 등극하면서 고종을 대신해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야 세도정치는 종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쇄국정책이란 이름으로 서양의 문물제도를 철저하게 막았던 탓에 조선은 여전히 변화와 개혁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급기야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장성하면서 왕비였던 명성왕후와 그 외척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일본이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불법적인 방식으로 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키면서 1910년 조선왕조는 그 500여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 활기찬 국가의 분위기 속에서 많은 문화적 업적을 이루어 내었다. 해시계와 물시계, 자격루와 칠정산과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이 동원된 업적들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새로 개창된 조선을 보다 부국강병한 나라로 키우기 위한 의지가 바로 이러한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결국 이때 축적된 조선의 과학기술과 지식이 그대로 이어져 거북선과 비격진천뢰, 신기전과 같은 첨단 무기를 탄생시켰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라고 봐야 하겠다. 더불어 이때 제작된 한글은 우리 한민족이 높은 수준의 문화민족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도 부정할 수 없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의 위상은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에 와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문화와 학문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조선의 성리학은 당대 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이시기 그 깊이를 더하였다. 한편 실학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실용적이고 현실지향적인 학문 경향이 나타나 성행하기도 하였다.

서화와 미술을 망라해 문화 전반의 경향 역시 당시 사대부 중심의 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들이 지향하던 성리학적 관점에서 문인화와 서예, 그리고 백자를 위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는 자유분방한 문화가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민요와 판소리, 그리고 민화 등은 당시 조선의 예술과 미술이 결코 지배계층인 사대부 중심의 흐름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소재와 주제, 내용과 모습으로 그려진 조선 후기의 민간 예술은 조선의 사대부 중심의 예술과는 또 다른 당대 의식과 인식의 면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교열본

  • 제목: 동방 군자의 나라, 조선

개국에 즈음한 당면 과제

이성계가 개창한 조선왕조는 1392년에 성립되어 약 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성계는 고려 말 많은 공을 세운 명망 높았던 장군으로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뒤 혼란한 정세를 평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려 말 사회 개혁을 주도했던 성리학자 집단인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당시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첫째, 고려왕이었던 우왕의 혈통에 대한 문제, 둘째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토지개혁, 셋째,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권문세족들을 제거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 넷째,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 중심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 다섯째, 여러 폐단을 야기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것 등이었다.

정도전을 축출하고 왕이 된 태종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한때 신진사대부들은 둘로 나뉘기도 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그 반대파들을 제거하면서 마침내 조선 건국에 찬성하는 신진사대부를 위주로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신임 속에 중국의 동의를 얻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도읍을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정했으며, 왕궁인 경복궁을 짓고 새나라 조선의 여러 국가제도들을 마련해 가며 정치를 이끌어갔다.

그러자 신하인 정도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상황에 대해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던 몇몇 왕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왕위에 올라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태종이 다지고 세종이 꽃피운 태평성대

태종은 국왕이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모든 국정을 자신이 직접 관장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시행했으며, 왕권에 방해가 되는 외척세력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때문에 그 토대 위에 등극한 세종은 다져진 왕권 위에서 찬란한 문화정치를 꽃 피울 수 있었다.

성리학이 꿈꾸는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데 집중하였던 세종은 신하들이 마음껏 정치를 논의할 수 있도록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해 국왕의 권력을 신하에게 나눠주었다. 또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각종 농사기술을 기록한 책들을 보급하고 측우기와 물시계 등의 발명을 장려하였다. 특히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한글을 창제하여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글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시에 북쪽으로 4군과 6진을 개척해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줄곧 세종과 그 아들인 문종의 치세를 제일가는 태평성대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사림과 훈구의 갈등, 사화

어린 조카를 제거하고 왕이 된 세조 이래로 한동안 조선은 정치적 혼란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여러 정치적 격변 속에 성장한 공신 세력들은 자신의 위세를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선의 지배계층에서 대두되면서 사림이 등장하였다.

훈구라 불리던 공신 세력들을 비판하며 조선의 혁신을 주장했던 사림은 여러 현안에 서 그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급기야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던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4대 사화’이다.

사림에 대한 훈구의 박해는 대략 조선 중기 명종 때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그들은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 지식인들을 기르는 교육에 매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 이후 훈구세력들이 모두 제거되면서 사림은 어느덧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당쟁의 와중에 맞은 임진왜란

선조 즉위를 계기로 사림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리학 사회를 만들고자 다양한 목소리들을 냈다. 하지만 각 학파들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 견해에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다시 정파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것이 곧 ‘당쟁’이다.

당쟁은 중앙정치의 혼란으로 이어졌으며, 선조 당시 직면했던 다양한 문제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었으며, 이것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겪었던 가장 큰 전란이었으며, 조선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대략 조선의 인구와 토지의 1/3이 사라졌으며, 도읍지 한양의 궁궐이 불길에 휩싸이고 각종 문서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일본군의 침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던 조선 정부의 무능함은 조선의 국토와 국민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명군의 참전으로 전기를 마련한 조선의 관군은 이순신과 권율 등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여기에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과 승병들의 활약도 대단히 컸다. 1598년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그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두 번의 호란이 남긴 상처

전쟁이 끝나고 선조에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부적으로 여러 전후 복구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밖으로는 새롭게 성장하는 여진족, 즉 후금을 의식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균형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중립적인 외교를 펼쳐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후금을 배척하는 세력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 인목대비와 동생 영창대군을 유폐하거나 죽인일로 정변이 일어났다. 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위를 잃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바로 ‘인조반정’이다.

인조는 명나라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며 후금을 적대시하였다. 더욱 강성해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두 차례 쳐들어온다. 이른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조선은 청나라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지금의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청나라와 강화를 체결한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외교질서에 편입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즉 양란을 거치며 조선은 피폐해진 사회를 회복시키는 한편 무너진 질서와 기강을 다시 바로잡는 데 주력한다. 물론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였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걸고 조선 사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효종 대에 와서는 급기야 청나라에 대한 복수전을 기획하면서 이른바 ‘북벌’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르네상스

하지만 본격적인 부흥기는 조선 후기 숙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의 출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숙종 이후 영조와 정조에 이르는 대략 120년간의 정치에서 조선은 다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영조는 그를 위해 ‘탕평’이라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탕평책의 목적은 학문적 배경에 따라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달리하며 대립하던 신하들을 강력한 왕권으로 제어하는 것에 있었다. 그 결과 한동안이나마 국왕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다시금 정치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토대 위에서 대를 이은 국왕들은 조선 사회를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과감하게 시도하였다.

세도정치 등장

그러나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뒤 그 아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그러한 균형은 다시 깨지게 되었다. 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에 이르기까지 대략 3대에 걸친 60여 년 간의 조선은 다시 왕권이 약화되고 국왕의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세도정치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출현한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극심하였다. 중요한 관직은 대부분 세도가문과 연결된 사람들에게만 돌아갔으며, 그들로부터 자행된 부정부패 역시 심각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내부적으로 분쟁과 소요가 난무하는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사회에 진입하여 놀라운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안에서의 세력 다툼에만 몰두한 나머지 아무 변화도 알지 못하였으며 조선과 서양 근대국가와의 간극은 더욱더 커져버리고 말았다.

몰락한 500년 왕조

결국 철종이 죽고 등극한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야 세도정치는 종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쇄국정책이란 이름으로 서양의 문물제도를 철저하게 막았던 탓에 조선은 여전히 변화와 개혁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고종이 장성하면서 급기야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왕비였던 민자영과 그 외척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이 그리는 이상사회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일본이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불법과 강요로 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1910년에 이르러 조선왕조는 그 500여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과학 강국

조선은 건국 초기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많은 문화적 업적을 이루어냈다. 해시계와 물시계, 자격루와 칠정산과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이 동원된 업적들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새로 개창된 조선을 보다 부국강병한 나라로 키우기 위한 의지가 이러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때 축적된 조선의 과학기술과 지식은 거북선과 비격진천뢰, 신기전과 같은 첨단 무기를 탄생시켰고, 결국 위기에서 국가를 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때 제작된 한글은 우리 한민족이 높은 수준의 문화민족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의 위상은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에 와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사대부 문화와 민간 예술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문화와 학문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조선의 성리학은 당대 그 어떤 나라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그 깊이를 더하였다. 한편에서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실용적이고 현실지향적인 학문 경향이 나타나 성행하기도 하였다.

서화와 미술을 망라한 문화 전반의 경향 역시 당시 사대부 중심으로 꽃피었고 그들이 지향하던 성리학적 관점에서 문인화와 서예, 그리고 도자기를 위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는 자유분방한 문화가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민요와 판소리, 그리고 민화 등은 당시 조선의 예술과 미술이 결코 지배계층인 사대부 중심만으로 흐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아 기발하고 창의적인 소재와 주제, 자유로운 내용과 모습으로 그려진 조선 후기의 민간 예술은 조선의 사대부 중심의 예술과는 또 다른 당대 의식과 인식의 면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