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IMF 경제위기와 금모으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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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97 아시아 금융위기와 금모으기운동
집필자 황정욱
교열자 유안리
개념용어 새마을운동, 국채보상운동



1차 원고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연쇄적으로 아시아 각국으로 확산된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한국경제의 건전성에도 의구심을 갖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이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금융기관에 빌려준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보유외환이 소진되어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정부는 IMF의 굴욕적이고도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런 위기를 지켜본 국민들은 나라를 경제위기에서 구하자는 애국심에서 소장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모아 해외에 내다팔아 국가부채의 상환에 도움을 주자는 캠페인을 폈다.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캠페인은 그 해 11월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되었던 사건은 이 보다 90년 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 국운이 기운 대한제국의 국채를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벌인 애국운동이었다. 당시 많은 시민들이 귀금속과 기부금을 자발적으로 거두어 나라 빚을 갚는데 써 달라고 기탁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은 그 해 12월 금 650그람 등을 모아 국가에 헌납했다.

1998년 1월 5일부터는 국영방송인 KBS가 전국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납이 아니라 은행이 정해진 금액으로 금을 사들이고, 이 금을 해외에 팔아 외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캠페인이 시작되자 날마다 감동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느냐고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캠페인에는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약 227톤의 금이 수집되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 14.5톤의 15배가 되는 양이었다.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고, 22억 달러가 판매대금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IMF가 한국에 제공한 구제금융 220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1월에 시작한 이 운동은 4월말에 끝났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금모으기 캠페인을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한국인의 범국민적인 위기극복 노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한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캠페인은 그가 아는 한 구제금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사재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본 한 중국의 경제학자는 한국인들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운동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금을 수출해서 외환으로 바꾸는 것을 우선한 탓에 모인 금의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으로 팔아버렸다는 주장이다. 지나치게 많은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져서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국제시장에 227t의 금이 갑자기 쏟아진다면 금값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캠페인은 국난을 만날 때 마다 강력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한국은 신흥경제국 중 외환위기를 가장 단시일내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빌려온 IMF구제금융도 기일 보다 빨리 갚았다.

연구원 1차 검토

검토의견
금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민의 정신을 부각시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므로 이 문단의 내용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 가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인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주세요.
-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의 문단을 맨 마지막 문단과 같이 묶어서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평가로 글을 마무리지었으면 좋겠다.


수정 원고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아시아 각국으로 연쇄 확산된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아시아경제의 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이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금융기관에 빌려준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보유외환이 소진되어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정부는 IMF의 굴욕적이고도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국가가 부도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애국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민들은 나라를 경제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소장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모아 해외에 내다팔아 국가부채의 상환에 도움을 주자는 캠페인을 폈다.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캠페인은 그 해 11월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되었던 사건은 이 보다 90년 전 대한제국 말기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대한제국이 외국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기부금을 모으는 켐페인을 벌였다. 많은 국민들이 담배와 술을 끊고 모은 돈과 귀금속을 거두어 나라 빚을 갚는데 써 달라고 기탁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은 그 해 12월 금 650그람 등을 모아 국가에 헌납했다.

1998년 1월 5일부터는 국영방송인 KBS가 전국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납이 아니라 은행이 정해진 금액으로 금을 사들이고, 이 금을 해외에 팔아 외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캠페인이 시작되자 날마다 감동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느냐고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캠페인에는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약 227톤의 금이 수집되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 14.5톤의 15배가 되는 양이었다.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고, 22억 달러가 판매대금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IMF가 한국에 제공한 구제금융 220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1월에 시작한 이 운동은 4월말에 끝났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금모으기 캠페인을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한국인의 범국민적인 위기극복 노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한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캠페인은 그가 아는 한 구제금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캠페인은 국난을 만날 때 마다 강력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한국은 신흥경제국 중 외환위기를 가장 단시일내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빌려온 IMF구제금융도 기일 보다 빨리 갚았다.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사재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본 한 중국의 경제학자는 한국인들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기본정보> 보충 필요함.


교열본

한국 경제의 부도 선언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되어 아시아 각국으로 연쇄 확산된 금융위기는 한국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아시아경제의 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된 외국 금융기관들은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금융기관에 빌려준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 보니 한국은행의 보유외환이 소진되어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나라 빚은 1,500억 달러가 넘는데, 외환보유고는 40억 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정부는 IMF의 굴욕적이고도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나라에 달러가 부족해져서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애국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민들은 나라를 경제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소장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모아 해외에 내다팔아 국가부채의 상환에 도움을 주자는 캠페인을 폈다.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까지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20세기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은 그 해 11월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에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그 모델이 되었던 사건은 이 보다 90년 전 대한제국 말기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대한제국이 외국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는 활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 많은 국민들이 담배와 술을 끊고 모은 돈과 귀금속을 거두어 나라 빚을 갚는 데 써 달라고 기탁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은 그 해 12월 금 650그람 등을 모아 국가에 헌납했다. 1998년 1월 5일부터는 국영방송인 KBS가 전국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납이 아니라 은행이 정해진 금액으로 금을 사들이고, 이 금을 해외에 팔아 외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캠페인이 시작되자 날마다 감동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금붙이들을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느냐고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이 캠페인에는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약 227톤의 금이 수집되었다. 당시 한국 은행의 금 보유량 14.5톤의 15배가 되는 양이었다.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고, 22억 달러가 판매대금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IMF가 한국에 제공한 구제금융 220억 달러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8년 1월에 시작한 이 운동은 4월말에 끝났다.

국민의 힘으로 극복한 IMF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금 모으기 캠페인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한국인의 범국민적인 위기극복 노력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는 보도가 잇달았다. 한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캠페인은 그가 아는 한 구제금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캠페인은 국난을 만날 때 마다 강력한 애국심을 발휘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 노력으로 한국은 신흥경제국 중 외환위기를 가장 짧은 기간 안에 성공적으로 극복한 나라가 되었다. 빌려온 IMF구제금융도 기일 보다 빨리 갚았다.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사재기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민들의 반응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본 한 중국의 경제학자는 한국인들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2015년 한 방송사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대국민 의식조사로 광복 이후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웠던 순간을 물었다. 월드컵 4강 진출, 88올림픽 개최와 함께 IMF 금 모으기 운동이 꼽혔다. 이 일은 한국인에게 단합된 힘으로 국가 위기를 극복한 귀중한 경험을 안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