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88 서울올림픽

Korea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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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이 도약하는 계기가 된 88서울올림픽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동서 진영, 국제올림픽위원회, 북한, 노태우, UN총회
장소/공간 바덴바덴, 모스크바, 소련, 로스앤젤레스, 동유럽, 멕시코, 헝가리,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 중국
사건 아프가니스탄 침공
개념용어 화합과 전진, 냉전, 분단 국가, 선진국, 후진국, 개발도상국, 정식 종목, 시범 종목, 전시 종목



1차 원고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첫째, 동서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분단 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바야흐로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제24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면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이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에서 서울올림픽 개최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졌다.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로써 한국 국민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희망하는 민족임을 실천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정한 것도 스포츠를 사랑하는 한국민의 적극적인 자세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 것이며, 인류의 스포츠 대제전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상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한국’을 세계 여러 나라에 드러내 보였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기로 여겨졌던 공산권 예술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나라 문화 예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헝가리와는 무역대표부 설치로 통상의 길을 열었고, 동독 · 유고슬라비아 ·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교역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왔다.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 사업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며, 중국은 한국의 기술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한국 경제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현상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직접 사용해 본 한국 상품에 대한 신용도가 높아졌고, 그 기술에 대한 신뢰도 커진 덕분이다.

연구원 1차 검토

검토의견
- 도입 서술할 것

- 첫 문단은 88올림픽의 의미로 맨 뒤에 서술해도 좋을 듯</br>

-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좋다고 느낌


수정 원고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첫째,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첨예하게 대치하던 냉전 상황에서 분단 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이 반쪽짜리 올림픽들을 지켜본 세계인은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버렸다고 우려했다. 그런 시기에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개최되는 제24회 대회가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은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 한국에서 치러지는 올림픽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이 기록되었다. 탁구와 테니스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었고 태권도는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동독의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였던 크리스티나 루딩-로텐부르거는 1988년 초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사이클로 종목을 바꿔 그 해 하계 올림픽인 서울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이 선수는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딴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되었다. 남자 100m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캐나다의 벤 존슨은 도핑 테스트 결과 금지 약물 복용이 밝혀져 실격 처리되었다. 2위로 들어온 미국의 칼 루이스가 금메달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1984년 올림픽에 이어 이 종목에서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한편 서울올림픽은 소련과 동독 ‧ 서독, 북예멘 ‧ 남예멘 등의 나라가 별도로 참가한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1992년 올림픽인 바르셀로나 대회 이전에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과 예멘은 동서 및 남북 통일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서울올림픽 덕분에 그 동안 대한민국과 교류가 없던 공산 국가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특히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후 헝가리와 폴란드 등의 여러 나라가 대한민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둘째, 멕시코를 제외한 역대 올림픽 개최국은 모두 선진국이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 한국에서 치러지는 올림픽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삭제 필요.
-> “88서울올림픽은 처음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함께 참여한 올림픽으로 스포츠를 통해 세계 평화와 화해의 무드를 세계적으로 확산한 계기가 되었다.” 로 수정하면 어떨지...


교열본

분단된 나라 한국에서 열린 축제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세계 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올림픽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냉전 시대에 동서 진영의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킨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인 무척 의미 있는 올림픽이었다.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개최 결정 당시부터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첫째,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첨예하게 대치하던 냉전 상황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에는 소련 등 동유럽의 18여 개국이 불참했다. 이 반쪽짜리 올림픽들을 지켜본 세계인은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의 장이 되어버렸다고 우려했다. 그런 시기에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개최되는 제24회 대회가 올림픽이 맞이한 위기를 벗어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둘째,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에서 치러지는 올림픽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전쟁을 겪고 휴전 중인 분단국으로서의 참혹하고 불안한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문화와 발전상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160개국 중 한국과 수교 없이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있던 국가는 25개국이나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북한과도 미수교 상태에 있던 국가 2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수교국들은 대부분 공산 국가여서 이들의 출전은 세계 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단 공동 개최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던 북한은 “공동 개최가 아니면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불참을 선언했다.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린 무대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 종목과 야구 · 태권도 · 여자 유도 등 3개 시범 종목, 배드민턴과 볼링 등 2개 전시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하여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동독, 3위는 미국이, 4위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한 한국이 차지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이 기록되었다. 탁구와 테니스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었고 태권도는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동독의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였던 크리스티나 루딩-로텐부르거는 1988년 초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사이클로 종목을 바꿔 그 해 하계 올림픽인 서울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이 선수는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딴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되었다. 남자 100m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캐나다의 벤 존슨은 도핑 테스트 결과 금지 약물 복용이 밝혀져 실격 처리되었다. 2위로 들어온 미국의 칼 루이스가 금메달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1984년 올림픽에 이어 이 종목에서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한편 서울올림픽은 소련과 동독 ‧ 서독, 북예멘 ‧ 남예멘 등의 나라가 별도로 참가한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1992년 올림픽인 바르셀로나 대회 이전에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과 예멘은 동서 및 남북 통일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 · 문화 · 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서울올림픽 덕분에 그 동안 대한민국과 교류가 없던 공산 국가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특히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이후 헝가리와 폴란드 등의 여러 나라가 대한민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문화와 우수한 경기 운영 역량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실제로 88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놀랄 만큼 높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UN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의 국가 원수가 UN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올림픽이 정치적 · 외교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관련자료
    •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임자 올림픽 한 번 해보지』, 2013.
    • 전상진, 『서울 올림픽 성공스토리』, 홍진, 2011.
    • 리처드 W. 파운드 저·최보은 역, 『88서울올림픽 그 성공비화』, 예음, 1995.
    • 박세직,『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 고려서적, 1991.
    • 김종기, 『서울올림픽의 의의와 성과』정책보고 89-01, 한국개발연구원, 1989.
    • 서상목, 『서울올림픽의 국가발전적 의의』정책보고 87-01, 한국개발연구원, 1987.
    • 김명섭·양준석, 「서울올림픽 유치의 정치외교사」,『국제정치논총』54-4, 2014.
    • 박경호·옥광·박장규, 「한국 스포츠외교의 태동: 서울올림픽 유치의 유산」, 『한국체육사학회지』16-2, 2011.
    • 김종해,「국가 도약의 계기가 된 서울올림픽」, 『국회보』, 2010.
    • 이윤근·김명수, 「서울 올림픽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 『한국교육문제연구』6,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