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혜초의 천축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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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세기 혜초의 인도여행이야기 (천축기행)
집필자 황정욱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혜초, 현장, 금강지, 펠리오
장소/공간 ,인도, 중앙아시아



1차 원고

혜초(704-787)는 신라의 불교승려로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삼장602-664)보다 약 한 세기 뒤 사람이다.

10대에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719년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여행기는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는 나라를 거쳐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Kushināgara)의 견문을 적고,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고,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가서 사대영탑(四大靈塔)과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하였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을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이어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왕오천축국전≫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다른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

둘째, 다른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혜초의 ‘천축기행’은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로,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천축기행’의 문화사적 가치 에 대해서 좀 더 기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문화사적 가치 이외에도 ‘천축기행’은 8세기 한국의 고대 문명교류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점, 한반도의 경주에서 출발해 육로와 해로를 거쳐 인도+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여행하면서 당시 한국인이 본 세계상을 소개한 점 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해로)경주->광저우->인도/(육로)페르시아->중앙아시아->창안으로의 혜초가 지나온 길을 이미지 자료로 제시해 글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혜초는 통일신라 시기 승려로, 혜초가 당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인도까지 구법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 서술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혜초가 당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분, 지위를 가졌는지 등 개인에 대한 설명도 있었으면 한다.

-<왕오천축국전>이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도 서술할 것

-내용이 혜초가 다녔던 지역을 시간 순서로 서술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혜초가 다녔던 곳을 기록한 지도를 자료로 함께 제시하였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수정 원고

혜초(704-787)는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승려로 CE 723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육로와 해로로 여행하고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남아있는 것은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간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이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10대에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719년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여행기는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는 나라를 거쳐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Kushināgara)의 견문을 적고,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고,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가서 사대영탑(四大靈塔)과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하였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을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이어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왕오천축국전≫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다른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

둘째, 다른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8대 성지를 모두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혜초의 ‘천축기행’은 한국의 고대문명교류사를 보여주는 저술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교열본

혜초의 천축국 여행기

혜초(704-787)는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승려로 CE 723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육로와 해로로 여행하고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천축국은 현재 인도이며 동서남북 중앙 등 다섯 지역으로 구분되어 오천축국이라 하였다.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남아있는 것은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간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이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0대에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719년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혜초가 인도로 가서 부처의 진리를 구하고자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천축국을 기록하다

그의 여행기는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는 나라를 거쳐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쿠시나가라(Kushināgara)의 견문을 적고,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라자그리하(Rā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고,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가서 사대영탑(四大靈塔)과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하였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여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 다음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을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騍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를 아내로 맞기도 하는 등 진기한 풍속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도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葱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이어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그의 여행기는 여기서 끝난다.

≪왕오천축국전≫의 의의

≪왕오천축국전≫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다른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이거나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 해로나 육로만을 이용했던 다른 승려들과는 달리 혜초는 갈 때는 해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하며 양쪽 경험을 다 담았다.

둘째, 다른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도 보여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8대 성지를 모두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혜초의 ‘천축기행’은 한국의 고대문명교류사를 보여주는 저술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세계 4대 여행기로 손꼽히며, 다른 여행기가 13, 14세기에 쓰인 반면 무려 5세기도 더 앞선 가장 오래 된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