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하멜의 한국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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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양에 조선을 알린 최초의 기록, <하멜 표류기>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스페로 호크 호, 헨드릭 하멜, 포겔 스트루이스 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벨테브레
장소/공간 제주도 산방산, 타이완, 나가사키, 전라도, 암스테르담, 훈련도감, 자바 섬 바다비아
개념용어 홍이포, 군역 · 태형 · 유형, 여수 좌수영, 조선 왕국기, 하멜 기념비



1차 원고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 호가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표류해온 때는 1653년이었다. 심한 풍랑으로 배는 크게 부서지고 선원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중 8명이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돌아간 선원 중 헨드릭 하멜(Hamel,H.)은 조선에서 살았던 동안의 삶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이 <하멜 표류기>이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조선으로 오게 된 경위와 조선에서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1653년 1월 하멜 일행은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 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6월에 자바 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스페로 호크 호를 타고 타이완[臺灣]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신임 총독을 임지로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에 도착한 그들에게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7월 말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한 스페로 호크 호는 심한 풍랑으로 보름이 다 되도록 바다 위에서 헤매야 했다. 표류하던 그들이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제주도 남해안이었다.

정박하는 과정에도 심한 풍랑이 몰아쳐 스페로 호크 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그래서 선원 64명 가운데 28명은 목숨을 잃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제주도와 서울, 전라도 등지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20명이 죽었고 최종 생존자는 16명이었다.

이들보다 앞선 1628년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Weltevree, 朴燕)가 표류해왔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면서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의 제작법 · 조종법을 지도하는 등 서양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 전해주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왔을 때 벨테브레는 직접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았다. 이후에도 그들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조선에서는 하멜 일행에 대해 벨테브레와 같은 효용 가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하멜 일행은 잡역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대부분 10대 후반의 소년들로 배에서 단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14년 동안 군역 · 감금 · 태형 · 유형 등 모진 풍상을 다 겪었고 지방관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경우 구걸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당시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 풍부한 경험과 관찰이 <하멜 표류기>의 근간이 되었다.

탈출 직전의 생존자 16명이 억류되었던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인근의 섬들을 다니면서 조수와 풍향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배에 대한 감시를 느슨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배가 잘 노출되도록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1666년 9월, 16명 중 8명만이 탈출을 시도했다.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하멜 표류기>는 1668년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세 군데에서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때 하멜은 미처 고국에 돌아가기 전이었다.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 회사에 요구하느라 바다비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책은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가 앞 다투어 번역하여 펴냈다. 책의 내용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난파와 표류에 관해 썼고, 2부에서는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지리 · 정치 · 군사 · 풍속 · 교육 등을 소개했다. 이 책은 서양 사회에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기록이며 현대 한국인에게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1980년 10월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난파 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 너비 6.6m의 하멜 기념비를 세웠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하멜표류기 책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해야 한다. 백과사전 수준의 하멜이 표류되는 과정, 한국에서의 억류생활 등 하멜에 대한 이야기보다 <하멜표류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하멜의 조선 탈출만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으며, 하멜이 조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기술되지 않고 있어 이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도입부분 서술: 하멜의 표류가 왜 한국의 중요사건으로 말할 수 있는지 설명할 것.

- 하멜이 한국에 표류한 1653년은 어느 임금 때인지 서술.

- 하멜표류기 내용 중 흥미있는 내용 하나 정도 소개.


수정 원고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 호가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표류해온 때는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 때인 1653년이었다. 심한 풍랑으로 배는 크게 부서지고 선원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중 8명이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돌아간 선원 중 헨드릭 하멜(Hamel,H.)은 조선에서 살았던 동안의 삶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이 <하멜 표류기>이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조선으로 오게 된 경위와 조선에서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1653년 1월 하멜 일행은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 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6월에 자바 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스페로 호크 호를 타고 타이완[臺灣]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신임 총독을 임지로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에 도착한 그들에게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7월 말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한 스페로 호크 호는 심한 풍랑으로 보름이 다 되도록 바다 위에서 헤매야 했다. 표류하던 그들이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제주도 남해안이었다.

정박하는 과정에도 심한 풍랑이 몰아쳐 스페로 호크 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그래서 선원 64명 가운데 28명은 목숨을 잃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제주도와 서울, 전라도 등지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20명이 죽었고 최종 생존자는 16명이었다.

이들보다 앞선 1628년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Weltevree, 朴燕)가 표류해왔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면서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의 제작법 · 조종법을 지도하는 등 서양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 전해주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왔을 때 벨테브레는 직접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았다. 이후에도 그들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조선에서는 하멜 일행에 대해 벨테브레와 같은 효용 가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하멜 일행은 잡역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대부분 10대 후반의 소년들로 배에서 단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14년 동안 군역 · 감금 · 태형 · 유형 등 모진 풍상을 다 겪었고 지방관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경우 구걸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당시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 풍부한 경험과 관찰이 <하멜 표류기>의 근간이 되었다.

탈출 직전의 생존자 16명이 억류되었던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인근의 섬들을 다니면서 조수와 풍향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배에 대한 감시를 느슨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배가 잘 노출되도록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1666년 9월, 16명 중 8명만이 탈출을 시도했다.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하멜은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 회사에 요구했는데 이때 표류의 증거로 써서 제출한 것이 '하멜 표류기'와 '조선왕국기'다.

<하멜 표류기>는 1668년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세 군데에서 동시에 출간되었고 이후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가 앞 다투어 번역하여 펴냈다. 책의 내용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난파와 표류에 관해 썼고, 2부에서는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지리 · 정치 · 군사 · 풍속 · 교육 등을 소개했다. 조선 왕국기에는 하멜이 잘못 알고 있는 쓴 내용도 많다. 하지만 우리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17세기 조선의 사회 실상과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상 생활, 풍속, 관습 등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유럽 사회에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기록이며 현대 한국인에게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또 <하멜 표류기>는 17세기 국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에 표기된 발음을 통해 지금은 쓰이지 않고 글자로만 남아 있던 ‘ㅅㄷ’ 등 17세기 국어의 발음을 일부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10월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난파 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 너비 6.6m의 하멜 기념비를 세웠다.

교열본

표류하다 닿은 땅 제주도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 호가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표류해온 때는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 때인 1653년이었다. 심한 풍랑으로 배는 크게 부서지고 선원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중 8명이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돌아간 선원 중 헨드릭 하멜(Hamel,H.)은 조선에서 살았던 동안의 삶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이 <하멜 표류기>이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조선으로 오게 된 경위와 조선에서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1653년 1월 하멜 일행은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 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6월에 자바 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스페로 호크 호를 타고 타이완[臺灣]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신임 총독을 임지로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에 도착한 그들에게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7월 말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한 스페로 호크 호는 심한 풍랑으로 보름이 다 되도록 바다 위에서 헤매야 했다. 표류하던 그들이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제주도 남해안이었다.

정박하는 과정에도 심한 풍랑이 몰아쳐 스페로 호크 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그래서 선원 64명 가운데 28명은 목숨을 잃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제주도와 서울, 전라도 등지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20명이 죽었고 최종 생존자는 16명이었다.

조선인의 실생활을 산 하멜

이들보다 앞선 1628년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Weltevree, 朴燕)가 표류해왔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면서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의 제작법 · 조종법을 지도하는 등 서양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 전해주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왔을 때 벨테브레는 직접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았다. 이후에도 그들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조선에서는 하멜 일행에 대해 벨테브레와 같은 효용 가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하멜 일행은 잡역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대부분 10대 후반의 소년들로 배에서 단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14년 동안 군역 · 감금 · 태형 · 유형 등 모진 풍상을 다 겪었고 지방관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경우 구걸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당시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 풍부한 경험과 관찰이 <하멜 표류기>의 근간이 되었다.

탈출 직전의 생존자 16명이 억류되었던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인근의 섬들을 다니면서 조수와 풍향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탈출을 위한 자료가 되었다. 또 배에 대한 감시를 느슨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배가 잘 노출되도록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하멜이 알려준 조선의 여러 모습

1666년 9월, 16명 중 8명만이 탈출을 시도했다. 탄로 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하멜은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 회사에 요구했는데 이때 표류의 증거로 써서 제출한 것이 '하멜 표류기'와 '조선왕국기'다.

<하멜 표류기>는 1668년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세 군데에서 동시에 출간되었고 이후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가 앞 다투어 번역하여 펴냈다. 책의 내용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난파와 표류에 관해 썼고, 2부에서는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지리 · 정치 · 군사 · 풍속 · 교육 등을 소개했다. 조선 왕국기에는 하멜이 잘못 알고 있는 쓴 내용도 많다. 하지만 우리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17세기 조선의 사회 실상과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상 생활, 풍속, 관습 등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유럽 사회에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기록이며 현대 한국인에게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또 <하멜 표류기>는 17세기 국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에 표기된 발음을 통해 지금은 쓰이지 않고 글자로만 남아 있던 ‘ㅅㄷ’ 등 17세기 국어의 발음을 일부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10월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난파 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 너비 6.6m의 하멜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