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촛불 민주주의

Korea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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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촛불 민주주의
집필자 임미리
제목수정안 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최순실, 박근혜, 소울드레서, 안티MB카페,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헌법재판소, 국회
장소/공간 광화문광장, 청와대, 서울광장, 청계광장, 경복궁역,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신교동 로터리
사건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미선-효순이 사건),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건, 최순실 게이트
개념용어 촛불집회(candlelight vigil), 촛불문화제, 민중총궐기, 대통령 탄핵소추, 특검, 탄핵심판, 직접민주주의



1차 원고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1992년 인터넷 서비스망 하이텔의 유료화에 반대하여 열린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주한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미선·효순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2002년 11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렸을 때이다. 이때 열린 촛불집회는 과거의 폭력적 시위와는 다른 평화적 시위를 유지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으며, 이후 한국의 대표적 집회 및 시위 문화로 자리를 잡아갔다. 2002년 외에는 2004년 3월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열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5월 2일부터 2개월 간 지속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한국의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4월 말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 퇴진 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소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린 대통령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가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까지 이어진 운동으로 23차에 걸친 평화적이고 대규모적인 촛불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민직접행동의 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가 미르 ·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이어 최 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JTBC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만인 10월 25일 최 씨의 연설문 수정 사실을 일부 시인하는 내용의 1차 대국민 사과를 했고 10월 29일 국정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에 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의 전격 교체와 기습 개각을 단행하고 11월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담화 내용 등으로 더 큰 분노를 샀다.

대규모적인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 여론에 압박을 받은 여야가 2016년 11월 17일 이른바 최순실 특검법(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국정조사 실시에 합의했다. 이후 11월 30일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을 특별검사로 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특검팀이 공식 출범했다. 여기에 11월 17일 국정조사 계획안이 통과돼 2017년 1월 15일까지 총 60일간 국정조사가 진행됐으며 12월 6일 1차 청문회에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등 9개의 대기업 총수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기업 총수들이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것은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이었다.

12월 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을 제외한 299명이 참여해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 통과됐다. 총 129석의 새누리당 의원 중 상당수가 찬성표를 던진 결과였다. 이에 곧바로 박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고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 이관됐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진행하는 동안 122명의 특검팀은 삼성그룹과 국민연금이 연루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뇌물공여, 문화계 블랙리스트,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입시·학사 비리, 최 씨의 국정 이권개입, 청와대 비선진료 등 15개의 수사 대상에 대한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최 씨를 비롯해 안종범 전 국정조정수석과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청와대 인사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30명의 정부 인사들을 대거 구속·기소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상대로 2번의 시도 끝에 구속영장을 받아낸 것은 특검 수사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특검은 당초 90일간의 수사 기간에 연장조사 30일 등 최장 120일간 수사할 수 있도록 돼 있었으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연장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특검의 수사는 2월 28일 종료됐다. 이에 검찰은 3월 6일 검사 31명으로 구성된 2기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고 특검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 대한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렸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고 헌재에 접수한 지 92일 만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 선고 이틀째인 3월 12일 오후 7시 16분 청와대에서 나와 7시 37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로 복귀했다.

최순실 국정농담 의혹에서 시작돼 결국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낸 촛불집회는 1차·2차 시위 기간에는 하야론이 우세했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이 늦춰지자 3차·4차 때 퇴진론으로 바뀌었고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사임할 뜻이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자 5차·6차 시위 때부터 강제적인 퇴진인 탄핵론으로 바뀌었다. 2016년 10월 29일 5만명(경찰추산 1만2천명)에서 시작한 집회는 5차(11월 26일) 전국 190만명, 5차(12월3일) 전국 232만명로 헌정사 최대 시위기록을 계속해 경신했으며, 2017년 4월 29일 23차까지 누적인원은 전국 1,683만명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집회인원 집계방식에 문제가 제기되자 경찰은 추산인원을 비공개로 돌리기도 했다.

집회참가인원뿐 아니라 촛불집회가 23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집회·시위사에서 신기원이 될 만한 일도 많았다. 참가인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3차 집회(11월 12일) 때는 시민들이 4개 경로로 경복궁역까지 행진했다. 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의 행진만 금지하고 있고 “집회·시위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으나 그간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넘어서는 행진을 불허해왔다. 또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으며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참가한 12월 3일 6차 집회 때는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뒤부터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여론 속에 집회 참가자가 다소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31일 10차 집회에서는 누적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17년 1월 7일 세월호 침몰 사고 1000일을 기념한 11차 때에는 정원스님 분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 1월 14일 12차 집회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 맞아 체감온도 영하 1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4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7차 민중총궐기와 함께 열린 2월 25일 17차 집회에는 107만여 명이 참가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인용과 특검 연장 등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연속적으로 20차 집회가 열려 ‘촛불승리 축하콘서트’로 끝을 맺었다.

촛불시위는 처음에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서 주최하고 이후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등이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집회를 주최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집회 신고와 중앙무대 가설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회를 주관했을 뿐 집회 참가 시민들은 주최 측과 무관했으며 자발적인 참여 속에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깃발을 제작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 기존에 한국사회 저항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들의 깃발 외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구체적으로는 2008년 촛불의 주역이었던 ‘안티MB카페’, 사법시험존치를위한고시생모임, 금융사기피해자모임, 홈리스행동 등 구체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깃발, 평화재향군인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등 소속단체를 알리는 깃발, 딴지일보 애묘당, 새누리당표밭 강남주민들, 청와대민둥수석-전국탈모인연대, 신촌잉어회조개줍기소모임, 집에가고싶다-집가십, 범우주일꾼노동조합(스타) 등 세태를 반영하거나 정체성을 개성 있게 드러낸 깃발들이 집회 현장을 장식했다. 촛불집회와 그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 파면이 국민이 갖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확인한 일이었다면 이 같은 깃발은 촛불집회 참가자 각자가 집합적 군중을 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 주체였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본 글의 ‘기사 제목’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과 촛불 민주주의’로 정하였는데,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운동을 부각하기보다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과 실현이라는 관점으로 촛불민주주의를 소개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현재의 글은 촛불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글이라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스캔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첫째 분량이 지나치게 많으며, 둘째 한국의 민주화를 읽을 수 있는 주요 지점인 촛불민주주의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부터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박근혜 퇴진운동은 본 원고에서 제외하였으면 한다.

원고의 앞부분 <기본 정보> 중 특히 ‘인물/기관/단체’에서도 촛불민주주의를 이해하기보다 박근혜 퇴진운동에 초점을 맞춘 인물들이 나열되어 있어 이에 대한 조정도 필요할 것이다.

외국의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 촛불집회에 대해 보도된 적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이같은 내용도 본문에서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의 상당 부분이 현재 재판 중에 있는 박근혜-최순실 관련 탄핵 촛불집회에 대해 서술되어 있고 내용이 너무 자세해서 신문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촛불민주주의라는 주제보다 ‘한국의 정치 민주화’라는 내용으로 4·19 학생 의거를 위시하여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을 각 시대별 정치상황과 더불어 서술하고 그러한 서술 과정에서 촛불민주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정 원고

촛불집회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주요방식으로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촛불문화제’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집회·시위 문화를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식으로 수용되면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촛불집회는 1960년대 말 미국의 반전운동 과정에서 나타났으나 한국에서 문화제 성격으로 개최된 것은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는 옥외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문화행사 등은 예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촛불집회의 첫 번째 사례는 1992년 온라인 서비스인 코텔의 유료화에 반대하기 위해 온라인 사용자들이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11월에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두 여중생의 추모집회가 열리면서 평화적 시위문화를 이끌었다. 또 2004년 3월에는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열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촛불집회는 야간시위의 주요방식으로 정착하면서 2004년 말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항의시위와 2004년 말에서 2005년 2월까지의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가 촛불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다.

촛불집회가 장기화·대규모화하면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소위 광우병 파동과 관련해서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내용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의 모임에서 출발하여 100일 이상 계속되었고, 약 2개월간은 연일 수백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했으며 7월 이후에는 주말집회가 지속되었다. 집회가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요구는 4대강 운하 반대, 공기업민영화, 정권퇴진 등의 이슈로 확대되기도 했다.

한국의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4월 말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소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린 대통령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가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까지 이어진 운동으로 23차에 걸친 평화적이고 대규모적인 촛불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민직접행동의 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가 미르 ·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이어 최 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JTBC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만인 10월 25일 최 씨의 연설문 수정 사실을 일부 시인하는 내용의 1차 대국민 사과를 했고 10월 29일 국정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의 전격 교체와 기습 개각을 단행하고 11월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담화 내용 등으로 더 큰 분노를 샀다.

촛불집회가 23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집회·시위사에서 신기원이 될 만한 일도 많았다. 참가인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3차 집회(11월 12일) 때는 시민들이 4개 경로로 경복궁역까지 행진했다. 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의 행진만 금지하고 있고 “집회·시위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으나 그간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넘어서는 행진을 불허해왔다. 또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으며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참가한 12월 3일 6차 집회 때는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뒤부터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여론 속에 집회 참가자가 다소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31일 10차 집회에서는 누적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17년 1월 7일 세월호 침몰 사고 1000일을 기념한 11차 때에는 정원스님 분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 1월 14일 12차 집회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 맞아 체감온도 영하 1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4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7차 민중총궐기와 함께 열린 2월 25일 17차 집회에는 107만여 명이 참가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인용과 특검 연장 등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연속적으로 20차 집회가 열려 ‘촛불승리 축하콘서트’로 끝을 맺었다.

2016년 촛불집회는 처음에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서 주최하고 이후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등이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집회를 주최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집회 신고와 중앙무대 가설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회를 주관했을 뿐 집회 참가 시민들은 주최 측과 무관했으며 자발적인 참여 속에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깃발을 제작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 기존에 한국사회 저항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들의 깃발 외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최초의 사례가 코텔 유료화 반대집회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인터넷 세대의 대두와 맥을 같이 한다.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을 통해 작동하던 PC통신 시절 소수의 사용자들이 1992년 촛불집회를 주도했다면 김대중 정부 시절 초고속인터넷망의 보급으로 사용자층이 확대되면서 2002년에는 여중생 추모시위는 중학생들이 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2008년 미국소 수입반대시위는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삼국카페’로 불린 소울드레서, 쌍코, 화장발과 안티MB카페 등 다양한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초기 집회를 주도했다.

연인원 1천만명이 넘는 규모로 전개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관련한 촛불집회는 SNS((Social Network Services)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 사용자들은 실시간으로 집회상황을 공유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으며 집회과정상의 문제점들이 SNS를 통해 공유되면서 해결책을 집단적으로 모색하기도 했다.

촛불집회는 기존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일반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비폭력시위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비폭력 대 폭력의 논쟁이 매번의 집회 때마다 이어졌지만 주부들이 유모차를 끌고나오고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수가 많아지면서 비폭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수 시민들이 폭력적이라 지칭한 내용들이 사실은 경찰의 불법적인 집회 방해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행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평화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찬사를 얻었지만 논란도 적지 않았다. 촛불집회로 표현된 ‘광장정치’의 승리는 거꾸로 정당정치의 실패로 해석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로 수용되기도 했다. 이에 민심을 수렴하는 창구가 광장정치보다는 제도권 대의정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촛불집회의 요구와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는 대안정당의 건설이 제안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평가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음에 틀림없다. 촛불집회는 참가자 각자가 집합적 군중을 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 주체였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또한 촛불집회를 통해 해방감을 맛본 국민들은 이후 기존 체제의 모든 억압적 구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촛불집회는 단편적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시민의식의 성장에 따른 복합적 사회현상으로 주권자적 지위를 확인하는 일이었으며 국민의 역사적 체험이 전면화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교열본

위법을 피하기 위한 시위 방식

촛불집회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주요방식으로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촛불문화제’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집회·시위 문화를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식으로 수용되면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촛불집회는 1960년대 말 미국의 반전운동 과정에서 나타났으나 한국에서 문화제 성격으로 개최된 것은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이유가 가장 크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서는 해가 진 이후에는 옥외집회나 시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문화행사 등은 예외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촛불집회의 첫 번째 사례는 1992년 온라인 서비스인 코텔의 유료화에 반대하기 위해 온라인 사용자들이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11월에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두 여중생의 추모집회가 열리면서 평화적 시위문화를 이끌었다. 또 2004년 3월에는 노무현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열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촛불집회는 야간시위의 주요방식으로 정착하면서 2004년 말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항의시위와 2004년 말에서 2005년 2월까지의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가 촛불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다.

직접민주주의로서의 촛불집회

촛불집회가 장기화·대규모화하면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소위 광우병 파동과 관련해서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내용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의 모임에서 출발한 집회가 100일 이상 계속되었다. 중반부터 2개월간은 연일 수백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했으며 7월 이후에는 주말집회로 이어졌다. 집회가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요구는 4대강 운하 반대, 공기업민영화, 정권퇴진 등의 이슈로 확대되기도 했다.

한국의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4월 말까지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관련해서이다. 소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린 대통령 측근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항의가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까지 이어졌다. 23차에 걸친 평화적이고 대규모적인 촛불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민직접행동의 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

2016년 9월에서 10월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 씨가 미르 ·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했다는 의혹에 이어 최 씨의 태블릿PC를 입수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JTBC의 보도가 나온 지 하루만인 10월 25일 최 씨의 연설문 수정 사실을 일부 시인하는 내용의 1차 대국민 사과를 했고 10월 29일 국정농단 의혹을 규탄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의 전격 교체와 기습 개각을 단행하고 11월 4일 2차 대국민 사과를 내놓았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담화 내용 등으로 더 큰 분노를 샀다.

집회 시위의 새 장을 열다

촛불집회가 23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집회·시위 역사에서 신기원이 될 만한 일도 많았다. 참가인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3차 집회(11월 12일) 때는 시민들이 4개 경로로 경복궁역까지 행진했다. 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의 행진만 금지하고 있고 “집회·시위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음에도 그동안 경찰은 광화문광장을 넘어서는 행진을 불허해왔다.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했다.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참가한 12월 3일 6차 집회 때는 드디어 법으로 보장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할 수 있었다.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고 난 뒤부터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여론 속에 집회 참가자가 다소 줄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6년 12월 31일 10차 집회에서는 누적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17년 1월 7일 세월호 침몰 사고 1000일을 기념한 11차 때에는 정원스님이 분신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 1월 14일 12차 집회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 맞아 체감온도 영하 1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4만여 명이 참가했으며 7차 민중총궐기와 함께 열린 2월 25일 17차 집회에는 107만여 명이 참가해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인용과 특검 연장 등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진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연속적으로 20차 집회가 열렸고, ‘촛불승리 축하콘서트’로 끝을 맺었다.

인터넷 세대의 개성을 펼치다

2016년 촛불집회는 처음에는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서 주최하고 이후 백남기 투쟁본부, 4.16 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 등이 함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집회를 주최했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집회 신고와 중앙무대 가설 등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회를 주관했을 뿐 집회 참가 시민들은 주최 측과 무관했으며 자발적인 참여 속에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깃발을 제작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등 기존에 한국사회 저항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들의 깃발 외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최초의 사례인 코텔 유료화 반대집회로 알 수 있듯이 인터넷 세대의 대두와 맥을 같이 한다. 1992년 촛불집회는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을 통해 작동하던 PC통신 시절 소수의 사용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 초고속인터넷망의 보급으로 사용자 층이 확대되면서 2002년 여중생 추모시위는 중학생들도 주요 참가자가 되었다. 또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는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삼국카페’로 불린 소울드레서, 쌍코, 화장발과 안티MB카페 등 다양한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초기 집회를 주도했다.

연인원 1천만명이 넘는 규모로 전개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관련한 촛불집회는 SNS((Social Network Services)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 사용자들은 실시간으로 집회상황을 공유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으며 집회과정상의 문제점들이 SNS를 통해 공유되면서 해결책을 집단적으로 모색하기도 했다.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신감을 키우다

촛불집회는 기존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일반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비폭력시위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비폭력 대 폭력의 논쟁이 매번 집회 때마다 이어졌지만 주부들이 유모차를 끌고 나오고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수가 많아지면서 비폭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다수 시민들이 폭력적이라 지칭한 내용들이 사실은 경찰의 불법적인 집회 방해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행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평화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찬사를 얻었지만 논란도 적지 않았다. 촛불집회로 표현된 ‘광장정치’의 승리는 거꾸로 정당정치의 실패로 해석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에 민심을 수렴하는 창구가 광장정치보다는 제도권 대의정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촛불집회의 요구와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는 대안정당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평가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음에 틀림없다. 촛불집회는 참가자 각자가 집합적 군중을 넘어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 주체였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또한 촛불집회를 통해 해방감을 맛본 국민들은 이후 기존 체제의 모든 억압적 구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촛불집회는 단편적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시민의식의 성장에 따른 복합적 사회현상으로 주권자적 지위를 확인하는 일이었으며 국민의 역사적 체험이 전면화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관련자료
    • 「시사매거진 2580」, 『촛불민심빅데이터』. 제 1014회. 12년 11월. MBC.
    • 이병천, 『촛불이 민주주의다』, 해피스토리, 2008.
    • 이정덕, 『21세기 한국의 문화혁명』, 살림, 2004.
    • "촛불집회", 『두산백과』online.
    • 조대엽, "촛불집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