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조선시대 신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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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의 노비는 노예인가 농노인가
집필자 박선희
교열자 유안리
사건 서얼허통, 공노비 해방
기록물 경국대전 형전, 조선왕조실록
개념용어 양반, 중인, 상민, 천인, 외거노비, 솔거노비, 공노비, 사노비
물품/도구/유물 호패, 공명첩



1차 원고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양인은 자유민으로 국가에 조세와 역을 부담할 의무가 있는 대신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천인은 대부분 개인이나 관청에 소속된 노비였으며, 이들은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었다. 조선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양인과 천인을 바탕으로 하는 법적인 신분제도는 지배층인 양반과 중인, 피지배층인 상민과 천민의 4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양반은 원래 관직의 문반과 무반을 함께 부르는 명칭이었으나 점차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면서 조선의 지배 신분층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양반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를 했으며,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층으로 지방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각종 특권을 보장받았으며 국역을 면제받았다. 중인은 좁은 의미로는 역관, 의관 같은 기술관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을 뜻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직업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끼리 결혼하였다. 중인은 양반에 비해 차별받았으나, 전문 기술을 갖고 있거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일부를 이루었다. 양반의 후손이면서도 정식 부인의 소생이 아닌 서얼은 중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상민은 평민, 양민이라고도 불렸으며,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이 해당되었다. 상민은 생산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이들이 낸 세금으로 재정을 충당하였다. 이들은 법적으로 교육을 받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지만,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실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상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국가에 전세와 공납을 바치고 요역과 군역까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수공업자는 주로 관청에 등록되어 주요 물품을 생산하였고, 상인은 국가의 통제 아래 상업에 종사하였다.

최하층 신분인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으며,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 재주를 부리는 광대, 그리고 무당, 기생 등도 천민으로 여겨졌다.

노비는 왕실이나 국가 기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집에서 나와 따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의 경우 비교적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모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상민의 처지와 비슷한 면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양반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는 감소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유한 농민과 상인 등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이용하여 양반 행세를 하였으며, 공명첩을 구입하거나 납속, 족보 매매 등의 방법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양반층 내부에서도 분화가 일어났다. 양반 가운데 중앙 권력을 차지한 양반은 소수였고, 다수의 양반이 중앙에서 밀려나 관직에 오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또 일부 양반은 몰락하여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중인 계층에서도 변화가 이루어졌다. 서얼은 양반의 아들이면서도 주요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는데, 이러한 제한을 없애려는 운동을 벌여 정조 때에는 이덕무, 박제가 등이 규장각에 등용되기도 하였으며, 서얼에 대한 차별은 점차 사라져 갔다.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을 수행하였던 중인들은 축적한 재산과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노비층도 신분 상승을 꾀하였다. 노비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등의 방법으로 상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도망을 통해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조선 정부는 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상민이나 노비에게 양반의 지위를 팔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양반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신분제는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노비 가운데 재력만 있으면 노비 신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문호는 항상 열려 있었으며, 이 시기 정부에서는 ‘노비’라는 명칭 장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01년에는 중앙 관서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6만 6천의 공노비를 해방하였다. 노비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의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30% 정도였다. 조선의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증여, 상속할 수 있었으며, 주인이 마음대로 형벌할 수 있었고 심지어 관청의 허가를 받으면 죽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노비를 고대 유럽의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판단하고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견해가 있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중세 농노에 가까운 신분일까?

노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없지만, 농노는 제한적이나마 토지를 보유했다. 노예는 가족을 갖지 못했지만, 농노는 가족을 가졌다. 조선의 노비는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갖지 못했으나 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거 노비의 경우 토지를 소유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다른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외거 노비의 경우 주인의 호적 외에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크게 늘린 노비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공노비가 출산할 경우 80일의 휴가를 주고, 그 남편에게도 산후 보름 동안의 휴가를 준다는 규정이 있다. 또 세종실록에는 여종의 경우 산후 1백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을 시키지 않으며,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도 30일의 휴가를 주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잘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법적으로 노비의 처우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노비였으나 그 재주를 사랑한 주인이 글을 가르치고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 결국 재상에까지 오른 반석평, 공부를 하여 주위 선비들의 존경을 받고 제자들도 거느렸다는 박인수, 성균관 노비로 양반 자제들을 가르치는 유명 선생이 된 정학수 등 학문의 영역에서 활약한 노비들도 있었다.

이처럼 노비 중에는 노예와 같은 처지의 노비도 있고, 농민과 비슷한 처지의 노비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와 농노,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모습을 갖춘 신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제목을 보면 ‘조선의 노비’가 대상인데, 원고의 내용은 조선의 신분제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글로, 노비에 대한 설명, 그리고 노예와 농노에 대한 기준 및 이에 대한 분석의 내용은 뒷 부분에 상대적으로 적게 서술되었다. 조선의 노비를 설명하려면 조선의 신분제에 대한 설명을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의 신분제와 노비의 노예 농노 분석의 분량을 조정했으면 한다.

- 농민이 부담해야 할 전세, 공납, 요역, 군역을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에 대해 좀 더 현대적 표현으로 바꾸어 설명했으면 한다. 주인집에서 나와 따로 사는 외거노비처럼...

- 조선 후기에 들어와 양반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는 감소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유한 농민과 상인 등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이용하여 양반 행세를 하였으며, 공명첩을 구입하거나 납속, 족보 매매 등의 방법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 조선 후기에 들어와 양반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는 감소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유한 농민과 상인 등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이용하여 양반 행세를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발행하였던 공명첩을 구입하거나 납속, 족보 매매 등의 방법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수정 원고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양인은 자유민으로 국가에 조세와 역을 부담할 의무가 있는 대신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천인은 대부분 개인이나 관청에 소속된 노비였으며, 이들은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었다. 조선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양인과 천인을 바탕으로 하는 법적인 신분제도는 지배층인 양반과 중인, 피지배층인 상민과 천민의 4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양반은 조선의 지배 신분층으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를 했으며,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층으로 지방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각종 특권을 보장받았으며 국역을 면제받았다.

중인은 좁은 의미로는 역관, 의관 같은 기술관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을 뜻하였다. 이들은 양반에 비해 차별받았으나, 전문 기술을 갖고 있거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일부를 이루었다. 양반의 후손이면서도 정식 부인의 소생이 아닌 서얼은 중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상민은 평민, 양민이라고도 불렸으며, 생산을 담당하고 세금을 내는 계층으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이 해당되었다. 이들은 법적으로 교육을 받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지만, 실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상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국가에 토지세인 전세를 내고 마을 단위로 부과되는 특산물인 공납을 바쳐야 했으며,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군복무의 의무까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수공업자는 주로 관청에 등록되어 주요 물품을 생산하였고, 상인은 국가의 통제 아래 상업에 종사하였다.

최하층 신분인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으며,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 재주를 부리는 광대, 그리고 무당, 기생 등도 천민으로 여겨졌다.

노비는 왕실이나 국가 기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집에서 나와 따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의 경우 비교적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모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상민의 처지와 비슷한 면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유한 농민과 상인 등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재산을 이용하여 양반 행세를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발행하였던 공명첩을 구입하거나 납속, 족보 매매 등의 방법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양반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는 감소하였다.

양반 가운데 중앙 권력을 차지한 양반은 소수였고, 다수의 양반은 향촌에서 세력을 겨우 유지하였으며, 일부 양반은 몰락하여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점차 사라져 갔고,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을 수행하였던 중인들은 축적한 재산과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노비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도망을 통해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조선 정부는 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상민이나 노비에게 양반의 지위를 팔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양반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신분제는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노비 가운데 재력만 있으면 노비 신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문호는 항상 열려 있었으며, 이 시기 정부에서는 ‘노비’라는 명칭 장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01년에는 중앙 관서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6만 6천의 공노비를 해방하였다. 노비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의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30% 정도였다. 조선의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증여, 상속할 수 있었으며, 주인이 마음대로 형벌할 수 있었고 심지어 관청의 허가를 받으면 죽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노비를 고대 유럽의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판단하고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견해가 있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중세 농노에 가까운 신분일까?

노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없지만, 농노는 제한적이나마 토지를 보유했다. 노예는 가족을 갖지 못했지만, 농노는 가족을 가졌다. 조선의 노비는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갖지 못했으나 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거 노비의 경우 실제로 토지와 가옥을 소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모은 재산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세조 때의 기록에 따르면 국가는 노비 주인이 노비의 재산을 함부로 침탈하지 못하도록 했다. 외거 노비의 경우 주인의 호적 외에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공노비가 출산할 경우 80일의 휴가를 주고, 그 남편에게도 산후 보름 동안의 휴가를 준다는 규정이 있다. 또 세종실록에는 여종의 경우 산후 1백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을 시키지 않으며,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도 30일의 휴가를 주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잘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법적으로 노비의 처우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노비의 법적, 사회적 지위는 일반 양인에 비해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며,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적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노비 중에는 양인과 비슷하거나 양인보다 훨씬 나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존재했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노비들도 분명 존재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크게 늘린 노비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종 때 불정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는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는데, 어전회의에서 불정이 축적한 부에 대해 거론하면서도 그가 노비 출신이라는 점을 문제 삼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업을 통해 큰돈을 버는 노비들이 조선 초기부터 적지 않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 때에는 쌀 100가마니를 내서 국경까지 직접 운반하는 노비에게 신분을 상승시켜 준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노비들이 신청하는 바람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2개월 만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만큼 부유한 노비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학문의 영역에서 활약한 노비들도 있었다. 반석평은 노비였는데, 그의 재주를 사랑한 주인이 글을 가르치고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 결국 재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박인수는 일반적인 노비의 길을 거부하고 공부에 전념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로부터 유학을 배웠다. 주위의 선비들도 그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하여 존경하였으며, 제자들도 거느렸다. 정학수는 성균관의 노비였는데, 성균과 유생들의 어깨너머로 학문을 익혔고,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어 양반 자제들을 가르치는 유명한 선생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의 노비는 노비 중에는 노예와 같은 처지의 노비도 있고, 농민과 비슷한 처지의 노비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와 농노,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모습을 갖춘 신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열본

조선 전기 신분은 네 계층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는 신분이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양인은 자유민으로 국가에 조세와 역을 부담할 의무가 있는 대신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천인은 대부분 개인이나 관청에 소속된 노비였으며, 이들은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었다. 조선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양인과 천인을 바탕으로 하는 법적인 신분제도는 지배층인 양반과 중인, 피지배층인 상민과 천민이라는 네 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양반은 조선의 지배 신분층으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를 했으며,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층으로 지방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각종 특권을 보장받았으며 국역을 면제받았다.

중인은 좁은 의미로는 역관, 의관 같은 기술관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을 뜻하였다. 이들은 양반에 비해 차별받았으나, 전문 기술을 갖고 있거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양반의 후손이면서도 정실의 소생이 아닌 서얼은 중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상민은 평민, 양민이라고도 하며, 생산을 담당하고 세금을 내는 계층으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이 해당되었다. 이들은 법적으로 교육을 받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지만, 실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국가에 토지세인 전세를 내고 마을 단위로 부과되는 특산물인 공납을 바쳐야 했으며,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군복무의 의무까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수공업자는 주로 관청에 등록되어 주요 물품을 생산하였고, 상인은 국가의 통제 아래 상업에 종사하였다.

최하층 신분인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다.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 재주를 부리는 광대, 무당과 기생 등도 천민에 속했다.

노비는 왕실이나 국가 기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집에서 나와 따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의 경우 비교적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모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는 상민의 처지와 비슷한 면도 있었다.

신분 간의 계층 이동

조선 후기에 들어와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유한 농민과 상인 등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양반 행세를 하였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발행하였던 공명첩을 구입하거나 납속, 족보 매매 등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그 결과 양반은 급격하게 늘어난 반면, 상민과 노비는 감소하였다. 양반 중에서도 중앙 권력을 차지한 양반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양반은 향촌에서 세력을 겨우 유지하였으며, 일부 양반은 몰락하여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점차 사라져 갔고,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을 수행하였던 중인들은 축적한 재산과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노비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다른 지역으로 도주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조선 정부는 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상민이나 노비에게 양반의 지위를 팔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양반의 수가 크게 늘고 신분제는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노비 가운데 재력만 있으면 노비 신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문호가 항상 열려 있었다. 이 시기 정부에서는 ‘노비’라는 명칭 장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결국 1801년에는 중앙 관서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6만 6천의 공노비를 해방하였다. 노비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노비의 지위

조선의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30% 정도였다. 조선의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 증여, 상속할 수 있었다. 주인이 마음대로 형벌할 수 있었고 심지어 관청의 허가를 받으면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노비를 고대 유럽의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판단하고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기도 한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중세 농노에 가까운 신분일까?

노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없지만, 농노는 제한적이나마 토지를 보유했다. 노예는 가족을 갖기 어려웠지만, 농노는 가정을 이루어 생활할 수 있었다. 조선의 노비에게는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권이 없었으나 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거 노비의 경우 실제로 토지와 가옥을 소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모은 재산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다.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외거 노비의 경우 주인의 호적 외에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세조 때는 노비 주인이 노비의 재산을 함부로 침탈하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정했다는 기록도 있다.

경국대전에는 공노비가 출산할 경우 80일의 휴가를 주고, 그 남편에게도 산후 보름 동안의 휴가를 준다는 규정이 있다. 또 세종실록에는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산후 1백일 안에는 사역을 시키지 않으며,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잘 시행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노비의 법적인 처우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신분을 바꾼 노비들

노비의 법적, 사회적 지위는 일반 양인에 비해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며,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적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노비 중에는 양인과 비슷하거나 양인보다 훨씬 나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존재했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노비들도 분명 존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크게 늘리거나 신분을 향상시킨 노비의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태종 때 불정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는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는데, 어전회의에서 불정이 축적한 부에 대해 거론하면서도 그가 노비 출신이라는 점은 문제 삼지 않았다. 이를 보면 상업을 통해 큰돈을 버는 노비들이 조선 초기부터 적지 않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 때에는 쌀 100가마니를 내고 국경까지 직접 운반하는 노비에게 신분을 상승시켜 준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노비들이 신청하는 바람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2개월 만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만큼 부유한 노비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학문의 영역에서 활약한 노비들도 있었다. 반석평은 노비였는데, 그의 재주를 사랑한 주인이 글을 가르치고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 결국 재상에까지 올랐다. 박인수는 일반적인 노비의 길을 거부하고 공부에 전념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로부터 유학을 배웠다. 주변 선비들도 그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하여 존경하였으며, 제자들도 거느렸다. 정학수는 성균관의 노비였는데, 성균과 유생들의 어깨너머로 학문을 익혔고,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어 많은 양반 자제들을 제자로 둔 유명한 선생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의 노비 중에는 노예와 같은 처지의 노비도 있고, 농민과 비슷한 처지의 노비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노예와 농노, 어느 하나로만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모습을 갖춘 신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국대전』
    • 『조선왕조실록』
    • 김종성, 『조선 노비들-천하지만 특별한』, 역사의 아침,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