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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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또 하나의 민족,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속칭 북한으로 통칭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1948년 9월 소련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젊은 지도자 김일성에 의해 수립되었다. 김일성은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 당시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해 1930년대 만주지역을 무대로 무장항일투쟁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소련의 영향 속에 공산주의에 투신한 그는 해방 이후 소련의 후원 속에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50년 소련의 승인을 얻어 한국전쟁을 일으키며 남한을 공격하였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이를 지휘하였다. 한국전쟁에서 결국 한반도의 적화통일에 실패한 그는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패전의 책임 등을 덮어 씌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이에 1960년대에는 북한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1960년대 권력을 공고히 한 이후 1972년 사회주의헌법 제정을 통해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른바 ‘주체사상’을 발표함으로써 북한만의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공산주의의 실현과 그 최정점에 있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에 매진하였다. 이로써 ‘수령’으로 불리기 시작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더 초월적인 것으로 키워 나간다.

자원이 풍부한 북한지역의 산업적 환경을 이용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북한을 중화학공업으로 키워나갔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까지는 북한의 산업 발전이 남한의 산업수준을 능가했다. 그러나 북한은 내부적인 경제정책의 실패와 더불어 광물 자원 가격 하락을 맞이해 큰 타격을 입는다. 설상가상 1973년의 석유 위기를 겪으며 북한의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 경제구조의 특성 상 생산력과 효율성의 한계로 인해 북한은 국제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기까지 하였다. 이에 1970년대 북한은 크게 성장이 둔화되었다. 경제적 자립과 경공업 중심의 발전 추진 등 다각도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여기에 고질적인 식량문제가 겹치면서 북한의 경제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1991년 공산진영이 몰락하면서 공산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블록 역시 무너지게 되었다. 따라서 내부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부의 지원과 원조로 해결해야만 했던 북한의 상황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94년 7월 김일성은 사망하였고, 그 뒤를 후계자인 아들 김정일이 이어받게 되었다.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써 수업을 받아온 끝에 아버지를 뒤 이어 새로운 북한의 지도자로 올라섰다. 하지만 김정은이 떠맡은 북한의 상황은 결코 긍정적이지 못했다. 1995년 발생한 대기근에 따른 경제상황은 1998년까지 북한 주민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또 자체적으로 추진했던 경제개혁들, 즉 신의주와 나진선봉 지역을 중심으로 개방을 시도했던 경제특구제와 화폐개혁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던 가운데 국제사회에서 가해지는 거센 제재는 북한의 각종 해외자산을 동결시켰고, 해외의 지원과 원조 역시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전통적인 우방국가였던 러시아와 중국 역시 더 이상은 북한에게 무조건적인 협조를 제공하는 혈맹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돌파구가 남한을 통해 마련되는 듯 했다. 2000년대 초반 김대중 정부와 함께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를 중심으로 시행된 햇볕 정책과 경제협력은 남북간의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로써 남북의 관계는 더 이상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상생이 가능한 관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김정일 정권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핵무기의 지속적인 개발은 국제 관계와 여론을 악화시켰다. 더불어 북한내 인권 유린 문제 또한 이를 증폭시켰다.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을 악의 축, 사악한 권력집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북한사회의 폐쇄성, 일당독재와 1인 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강압과 탄압, 언론의 자유가 없이 권력에 의사에 벗어나는 모든 존재들은 비인간적이고 비인권적인 방식으로 처단하는 방식 등 많은 부분에서 기인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시선들은 2011년 김정일의 사망으로 새롭게 지도자로 올라선 그 아들 김정은의 출현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특히 김정은은 서구에서 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 당초에는 그 이전의 북한 지도자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아버지 세대 실력자들과, 고모부 장성택 등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세력들을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제거하고 이를 공개함으로써 전 세계에 다시금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견제와 압박 속에서 끝내 핵미사일을 개발하였으며, 심지어 점차 사거리를 높여 발사 실험을 거듭하고 있어 그 우려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또 2017년 2월에는 자신의 이복형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시켜 버림으로써 다시금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때문에 향후 북한 사회의 개방을 이끌고 남북한의 공동번영과 화해 및 협력을 다시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은 더욱더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열본

  • 제목: 또 하나의 민족,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일성 절대독재체제 확립

속칭 북한으로 통칭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1948년 9월 소련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젊은 지도자 김일성에 의해 수립되었다. 김일성은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 당시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해 1930년대 만주지역을 무대로 무장항일투쟁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소련의 영향 속에 공산주의에 투신한 그는 해방 이후 소련의 후원 속에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김일성은 1950년 소련의 승인을 얻어 한국전쟁을 일으키며 남한을 공격하였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이를 지휘하였다. 한국전쟁에서 결국 한반도의 적화통일에 실패한 그는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패전의 책임 등을 덮어 씌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이에 1960년대에는 북한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락하는 경제 상황

1960년대 권력을 공고히 한 이후 1972년 사회주의헌법 제정을 통해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른바 ‘주체사상’을 발표함으로써 북한만의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공산주의의 실현과 그 최정점에 있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에 매진하였다. 이로써 ‘수령’으로 불리기 시작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더 초월적인 것으로 키워 나간다.

자원이 풍부한 북한지역의 산업적 환경을 이용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키운 북한의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1960년대 후반까지는 북한의 산업 발전이 남한의 산업수준을 능가했다. 그러나 북한은 내부적인 경제정책의 실패와 더불어 국제적 광물 자원 가격 하락에 맞닥뜨려 큰 타격을 입는다. 설상가상으로 1973년의 석유 위기를 겪으며 북한의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 경제구조의 특성상 생산력과 효율성의 한계로 인해 북한은 국제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기까지 하였다. 이에 1970년대 북한의 성장은 크게 둔화되었다. 경제적 자립과 경공업 중심의 발전 추진 등 다각도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여기에 고질적인 식량문제가 겹치면서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이 떠안은 열악한 경제 환경

1991년 공산진영이 몰락하면서 공산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블록 역시 무너지게 되었다. 따라서 내부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부의 지원과 원조로 해결해야만 했던 북한의 상황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였고, 그 뒤를 후계자인 아들 김정일이 이어받게 되었다.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서 수업을 받아온 끝에 아버지를 뒤이어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로 올라섰다. 하지만 김정일이 떠맡은 북한의 상황은 결코 긍정적이지 못했다. 1995년 발생한 대기근에 따른 경제상황은 1998년까지 북한 주민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또 자체적으로 추진했던 경제개혁들, 즉 신의주와 나진선봉 지역을 중심으로 개방을 시도했던 경제특구제와 화폐개혁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하던 가운데 국제사회에서 가해지는 거센 제재는 북한의 각종 해외자산을 동결시켰고, 해외의 지원과 원조 역시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전통적인 우방국가였던 러시아와 중국 역시 더 이상은 북한에게 무조건적인 협조를 제공하는 혈맹이 되지 못했다.

김정일의 돌파구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돌파구가 남한을 통해 마련되는 듯 했다. 2000년대 초반 김대중 정부와 함께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를 중심으로 시행된 햇볕 정책과 경제협력은 남북간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로써 남북의 관계는 더 이상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상생이 가능한 관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김정일 정권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핵무기의 지속적인 개발은 국제 관계와 여론을 악화시켰다. 더불어 북한 내 인권 유린 문제 또한 이를 증폭시켰다.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을 사악한 권력집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북한사회의 폐쇄성, 일당독재와 1인 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강압과 탄압, 언론의 자유가 없이 권력자의 의사에 벗어나는 국민들을 제거하는 비인간적이고 비인권적인 처단 방식 등 많은 부분에 기인한 현상이었다.

김정은이 계승한 핵무기개발 정책

이러한 시선들은 2011년 김정일의 사망으로 새롭게 지도자로 올라선 그 아들 김정은의 출현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특히 김정은은 서구에서 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 당초에는 그 이전의 북한 지도자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아버지 세대 실력자들과, 고모부 장성택 등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세력들을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제거하고 이를 공개함으로써 전 세계에 다시금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견제와 압박 속에서 끝내 핵미사일을 개발하였으며, 심지어 점차 사거리를 높여 발사 실험을 거듭하고 있어 그 우려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또 2017년 2월에는 자신의 이복형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시켜 버림으로써 다시금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향후 북한 사회의 개방을 이끌고 남북한의 공동번영과 화해 및 협력을 다시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은 더욱더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