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조공제도(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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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나? 조공 외교의 진실
집필자 남정란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주원장, 이성계, 송시열
장소/공간 동아시아
개념용어 조공, 책봉, 소중화
물품/도구/유물 독립문



1차 원고

2017년 3월 미국의 국방장관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에 대해 ‘조공국가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조공과 책봉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국제질서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중국이 아직도 주변 국가들의 종주국이었던 전근대적인 외교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조공과 책봉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주변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린 듯한 인상을 준다. 조공책봉으로 형성된 중국을 둘러싼 국가간의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근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하였을까?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인가?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조공과 책봉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

조공과 책봉은 중국 고대 주나라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조공과 책봉이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조공책봉이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 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의 침략을 막으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에게 조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였으며 중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중국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게 그 몇배의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공과 책봉을 택했듯이 중국 역시 주변국의 중국 침략을 막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하사품이 중국의 재정을 압박하는 데 이르러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제한하고 주변국은 조공을 주장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19세기에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이 형식을 취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한편 조공책봉과는 별개로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이중적인 태도로 중국을 대하게 되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양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조공책봉으로 국교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욱이 명나라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때 지원병을 보내준 일도 있어 조선은 명나라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조선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불러온 만주족의 나라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을 한 후 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동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소중화사상’이라고 한다. 중국조차 문화적 후진국으로 본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은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음을 의미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수천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거나 중국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천년간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온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삼전도의 굴욕 부조, 청에게 항복하는 조선의 왕을 묘사한 조각’ 그림은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
조선시대 조공의 예로 명과 조선은 어떤 상황에서 사신을 보냈으며, 사신을 보낼 때 어느 정도 규모의 사신들이 출발하였으며, 어떤 물건을 예물로 가지고 갔으며, 어떤 하사품을 가지고 왔는지, 같이 갔던 사람들은 가서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경험을 하고 돌아왔으며, 이것은 이후 조선 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에 대해 서술한다면 조공을 단지 힘없는 속국이 강한 종주국에게 물건을 바쳐 독립,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수정 원고

2017년 3월 미국의 국방장관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에 대해 ‘조공국가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조공과 책봉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국제질서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중국이 아직도 주변 국가들의 종주국이었던 전근대적인 외교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조공과 책봉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주변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린 듯한 인상을 준다. 조공책봉으로 형성된 중국을 둘러싼 국가간의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근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하였을까?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인가?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조공과 책봉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

조공과 책봉은 중국 고대 주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조공과 책봉이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조공책봉이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명·청 시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책봉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외교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 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의 침략을 막으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에게 조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였으며 중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한 국제무역이었다. 중국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게 그 몇 배의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공과 책봉을 택했듯이 중국 역시 주변국의 중국 침략을 막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하사품이 중국의 재정을 압박하는 데 이르러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제한하고 주변국은 조공을 주장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하사품 외에도 공식적인 사절단을 따라 온 상인들에 의해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 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명나라와 조선 간의 조공 관계를 보면 명의 태조(주원장)은 3년에 1번 조공을 하면 된다고 하나 조선의 태조(이성계)는 1년에 3회 조공을 하겠다고 한다. 결국 조선은 2대 국왕 정종 때부터 하정사(새해를 축하하는 사절), 성절사(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 천추절사(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라는 이름으로 1년에 세차례 조공 사절단을 보내고, 후에는 동지사(동지에 보내는 사절)를 추가하여 1년에 4차례 조공을 하였다. 동지사는 12월에 떠나 다음해 3~4월에 돌아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하정사와 동지사를 합쳐서 보내기도 하였다.

사절단의 규모는 보통 250명 정도였는데, 500명이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황제와 왕에게 보내는 조공품과 하사품 외에 조공을 계기로 이루어지는 사무역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았다. 조선에서는 주로 종이, 붓, 화문석, 인삼을 수출했고, 명나라로부터는 비단, 약재, 서적을 들여왔다. 또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서도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

한편 조공책봉과는 별개로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이중적인 태도로 중국을 대하게 되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양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조공책봉으로 국교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욱이 명나라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때 지원병을 보내준 일도 있어 조선은 명나라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조선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불러온 만주족의 나라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을 한 후 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동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소중화사상’이라고 한다. 중국조차 문화적 후진국으로 본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은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 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음을 의미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수천 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거나 중국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천 년간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온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교열본

2017년 3월 미국 국방장관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에 대해 ‘조공국가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조공과 책봉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국제질서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은 중국이 아직도 스스로를 주변 국가들의 종주국으로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외교관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조공과 책봉-외교적 형식

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

이런 관계는 중국 고대 주나라 때에 귀족들에 대해서 시작되었다.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조공과 책봉이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 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명·청 시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책봉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조공과 책봉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주위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린 듯한 인상을 준다. 조공 책봉으로 형성된 중국을 둘러싼 국가간의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근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하였을까?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인가?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조공과 책봉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국제 무역이었던 조공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 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의 침략을 막으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에게 조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였으며 중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한 국제무역이기도 했다. 중국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게 그 몇 배의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로 조공과 책봉을 택했듯이 중국 역시 주변국의 중국 침략을 막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다. 심지어 과도한 하사품이 중국의 재정을 압박하자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제한하고 주변국은 오히려 조공을 주장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하사품 외에도 공식적인 사절단을 따라 온 상인들을 통해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이는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 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공식적으로 주고 받는 조공품과 하사품 외에 이를 계기로 이루어지는 사무역 비중도 높았다. 또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서도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

소중화사상

중국에서 명이 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이중적인 태도로 중국을 대하게 되었다. 그 동안 조선과 명나라는 양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조공 책봉으로 국교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욱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지원병을 보내준 일도 있어 조선은 명나라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조선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불러온 만주족의 나라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을 한 후 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동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월감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소중화사상’이라고 한다. 중국조차 문화적 후진국으로 본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은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 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음을 의미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수천 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거나 중국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천 년간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온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2차 교열본

조공과 책봉-외교적 형식

조공(朝貢)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冊封)’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

이런 관계는 중국 고대 주나라 때에 귀족들에 대해서 시작되었다.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까지 조공과 책봉이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 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명·청 시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책봉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조공과 책봉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중국 주위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린 듯한 인상을 준다. 조공 책봉으로 형성된 중국을 둘러싼 국가간의 미묘한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근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하였을까?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렇다고 유럽의 국가들을 중국의 속국으로 볼 것인가?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조공과 책봉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면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국제 무역이었던 조공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 책봉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의 침략을 막으려는 외교정책이었다. 중국에게 조공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였으며 중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한 국제무역이기도 했다. 중국을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게 그 몇 배의 하사품을 내려주곤 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이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로 조공과 책봉을 택했듯이 중국 역시 주변국의 중국 침략을 막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다. 심지어 과도한 하사품이 중국의 재정을 압박하자 중국이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제한하고 주변국은 오히려 조공을 주장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하사품 외에도 공식적인 사절단을 따라 온 상인들을 통해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이는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 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공식적으로 주고 받는 조공품과 하사품 외에 이를 계기로 이루어지는 사무역 비중도 높았다. 또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서도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

소중화사상

중국에서 명이 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이중적인 태도로 중국을 대하게 되었다. 그 동안 조선과 명나라는 양국이 건국되는 초기부터 조공 책봉으로 국교를 맺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욱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지원병을 보내준 일도 있어 조선은 명나라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는 조선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불러온 만주족의 나라였다. 조선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등 두 번의 큰 전쟁에서 패배하며 청나라에 항복을 한 후 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동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이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월감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이라고 한다. 중국조차 문화적 후진국으로 본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은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 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음을 의미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수천 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거나 중국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천 년간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온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박중현, 『청소년을 위한 동아시아사』, 두리미디어, 2012.
    • 전국역사교사모임, 『역사선생님이 들려주는 친절한 동아시아사』, 북멘토, 2017.
    • 송승철, "조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