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전통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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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 전통 교육
집필자 황인희 / 정재윤
제목수정안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 / 전통 시대부터 축적된 교육에 대한 의지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태학, 경당, 화랑도, 국학, 국자감, 사학,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서당, 서원
기록물 『세종실록지리지』
물품/도구/유물 시권(試券)



1차 원고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 시대의 교육에는 유교와 불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지배 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되었으며 그들에게 학문적ㆍ인성적 소양을 길러 주고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용맹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을 주요 교육 목표로 삼았다.

최초의 학교는 372년에 고구려에 설립된 태학이었다. 태학은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 기관으로, 귀족 등 지배 계급의 자제들을 위한 관리 양성 기관이었다. 태학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교육 제도가 있었다. 화랑도 교육은 어려운 여건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중흥시킬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통일 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정치나 교육은 유교의 이념을 따랐다. 제4대 광종 때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배 질서의 확립을 꾀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과거 제도의 실시이다. 이는 관직 진출의 문호를 모든 지배 계층에 개방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여러 형태로 형식은 바뀌었지만 과거 제도는 관리 등용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고려의 교육 제도는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학으로는 중앙의 국자감과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학으로는 십이도(十二徒)와 서당이 있었다. 국립 종합대학교에 해당하는 국자감은 992년 개경에 설립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 경전을 주로 가르쳤고 입학 자격은 계급과 신분에 따라 규정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자감의 교육 목적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관리 양성인 동시에 유학의 연구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향교(鄕校)는 지방에 설립된 중등 정도의 관학 교육 기관이었다. 1127년 3월, 각 주와 현에다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敎導)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린 것을 향학의 시초로 보고 있다. 향교에는 공자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교육을 실시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지방의 향교와 같은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학당이 있었다. 교육 정도는 향교와 유사하였으나 학당은 문묘가 없는, 교육만 담당한 기관이었다.

사학인 십이도는 관학인 국자감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교육 기관이었다. 1053년 최충(崔冲)이 국자감을 비롯한 관학의 부진을 개탄하여 자기 집에 서당을 설치, 이웃 아동들을 교육한 데서 비롯하였다. 교과목은 국자감의 범주에 따라 삼사·오경 및 제술을 주로 하였고 나아가서 실천 윤리를 앞세웠다.

조선시대의 교육 이념은 성리학적 도학 정신이 중추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 교육이 아닌,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실시되었다. 그 주된 대상은 양반 계급으로서, 관직 진출이나 개인적 수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 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전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주었다. 또 유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문 체계는 교육 사상 및 정신 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는 성균관과 향교, 서원과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는 공자와 제현(諸賢)을 모신 문묘와 유생 교육의 장소인 명륜당이 주요 건물로 자리잡았다.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춰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과거에 1차 합격한 생원 · 진사 이상이 입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에서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으로, 문묘인 대성전과 명륜당 등의 구조를 갖추었다. 향교에서는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 교육,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서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이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졌다.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소년들을 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었다.

서원은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시작되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 백운동서원은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농토와 노비 및 서적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공부하는 장소로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여 전국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한국의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에 대한 설명은 잘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별 전통교육기관이 한국의 교육에 미친 영향과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체계화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글에서 “한국에서 국가에~ 삼국시대부터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좀 더 명확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자칫 한국 공교육의 시작이 삼국시대부터로 읽힐 수 있다.
- 화랑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면. 화랑도는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이 다양한 신분을 포함한 낭도를 이끄는 조직이었다. 화랑과 낭도는 원광의 세속5계를 받들며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화랑도는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조선의 교육기관 중 초등 교육기관은 서당, 중등 교육기관은 서울의 경우 사부학당, 지방의 경우 향교, 고등 교육기관은 성균관임. 사부학당이 빠졌으니 확인하고 보완할 것.
- 서원이 사림에 의한 사립교육기관임을 제시하여 당시 관립학교와 차별성을 가졌음을 서술할 것.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을 제사하고,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
- 전통시대의 교육은 남성 지배층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조선시대 여성교육의 특징과 내용, 양반 등 지배층 이외의 중인의 교육기관 및 내용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

- 교육 후 과거를 통해 과거급제자에게 내린 홍패, 장원급제에게 내린 어사화 등 장원급제자 축하 행사(?)에 대해 서술하는 것도 흥미로울 듯.


수정 원고

한국에서 국가에 의한 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 시대의 교육에는 유교와 불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지배 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되었으며 그들에게 학문적ㆍ인성적 소양을 길러 주고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용맹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을 주요 교육 목표로 삼았다.

최초의 학교는 372년에 고구려에 설립된 태학이었다. 태학은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 기관으로, 귀족 등 지배 계급의 자제들을 위한 관리 양성 기관이었다. 태학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교육 제도가 있었다. 화랑도 교육은 어려운 여건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중흥시킬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통일 신라를 계승한 고려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정치나 교육은 유교의 이념을 따랐다. 제4대 광종 때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배 질서의 확립을 꾀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과거 제도의 실시이다. 이는 관직 진출의 문호를 모든 지배 계층에 개방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여러 형태로 형식은 바뀌었지만 과거 제도는 관리 등용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고려의 교육 제도는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학으로는 중앙의 국자감과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학으로는 십이도(十二徒)와 서당이 있었다. 국립 종합대학교에 해당하는 국자감은 992년 개경에 설립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 경전을 주로 가르쳤고 입학 자격은 계급과 신분에 따라 규정하였다. 이로 미루어 국자감의 교육 목적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관리 양성인 동시에 유학의 연구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향교(鄕校)는 지방에 설립된 중등 정도의 관학 교육 기관이었다. 1127년 3월, 각 주와 현에다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敎導)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린 것을 향학의 시초로 보고 있다. 향교에는 공자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묘와 교육을 실시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지방의 향교와 같은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학당이 있었다. 교육 정도는 향교와 유사하였으나 학당은 문묘가 없는, 교육만 담당한 기관이었다.

사학인 십이도는 관학인 국자감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교육 기관이었다. 1053년 최충(崔冲)이 국자감을 비롯한 관학의 부진을 개탄하여 자기 집에 서당을 설치, 이웃 아동들을 교육한 데서 비롯하였다. 교과목은 국자감의 범주에 따라 삼사 · 오경 및 제술을 주로 하였고 나아가서 실천 윤리를 앞세웠다.

조선시대의 교육 이념은 성리학적 도학 정신이 중추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 교육이 아닌,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실시되었다. 그 주된 대상은 양반 계급으로서, 관직 진출이나 개인적 수양을 위한 교육에 치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 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전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주었다. 또 유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문 체계는 교육 사상 및 정신 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는 성균관과 사부학당, 향교, 서원과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는 공자와 제현(諸賢)을 모신 문묘와 유생 교육의 장소인 명륜당이 주요 건물로 자리잡았다.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춰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과거에 1차 합격한 생원 · 진사 이상이 입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부학당은 중등 교육을 담당했던 관립 교육 기관이었다. 처음 서울을 동·서·남·북의 4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사부학당이라 불리다가 중앙에도 학교가 세워져 오부학당이라 하였다.

향교는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에서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의 제도는 성균관의 축소판으로, 문묘인 대성전과 명륜당 등의 구조를 갖추었다. 향교에서는 성현에 대한 향례와 유생 교육, 지방민의 교화 등을 담당하였다.

서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한 사립학교이다.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서당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졌다. 선비와 평민의 자제로서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8, 9세에서부터 15, 16세에 이르는 소년들을 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었다.

서원은 사림에 의한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 각 지역에 설립된 서원은 학문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기관이었다. 또 학문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선현(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유학자)의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시작되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 백운동서원은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농토와 노비 및 서적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며, 지방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문을 공부하는 장소로서 많은 공헌을 했다.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여 전국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2차 수정 원고

한국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중시해 왔다. 한국의 교육은 성공적인 경제적 성취의 근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에서 교육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 OECD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나타난 한국 학생들의 우수한 결과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좁은 국토와 보유한 천연자원이 없었던 한국이 이와 같은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은 교육에 있었다는 데에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교육에 대한 한국의 높은 관심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372년 고구려는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웠으며, 이후 지방에도 경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유교와 무예를 가르쳤다. 신라는 화랑도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였고, 7세기경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국학을 세워 유교를 교육하고 관리를 양성하였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에 한국인들이 책을 사랑하고 밤낮으로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에도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높았음을 읽을 수 있다.

고려는 관리 양성을 위하여 중앙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을 설치하였는데 국자감에는 유학부와 기술학부가 있어 기술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방에는 항교를 세워 지방 향리의 자제들이나 서민들이 교육을 받았다. 국가가 설립한 교육기관 외에도 개인이 유교적 지식의 습득과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학도 존재하였다. 사학은 최충이 설립한 9재 학당에 이어 11개의 사학이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사학 12도라 불렸다.

고려의 학교 교육을 계승한 조선에서는 유교적 이념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고려 말에 만들어진 성균관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최고의 학부로 정착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수도 한양에 사부학당이 설치되었고 지방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중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특히 향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지방에 있는 모든 고을 329개소에 설치되어 유교적 소양에 대한 교육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외에도 초등 교육기관으로 서당이 있었다. 서당은 문자해득과 유교적 기초 소양에 대한 학습을 담당하였다. 서당은 중앙정부의 규제없이 학문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개설하여 교육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당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지방의 유력자들이 훈장을 초빙하여 경비를 부담하고 숙식을 함께 해결하거나, 훈장이 자신의 집에서 서당을 열기도 하였고, 양반 계층에서 별도로 조직된 서당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서당이 없는 지역에서는 서원에서 한문 초급과정을 가르쳐 서원 부설의 서당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유교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교육을 진흥하였던 조선의 환경 속에서 서당은 지방민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개설되어 운영되어왔으며 19세기 근대적 교육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서당은 가장 보편적인 초등 교육기관으로 조선이 멸망한 직후인 1911년 기준 전국에 1만 6540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서당 및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의 교육․학문을 담당했던 서원이 있다. 서원은 국가가 설립한 향교와 달리 개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는데, 향교와 성균관이 관리를 선발하는 국가시험(과거科擧)에만 치중한 것에 대한 반발로 선비들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16세기 중앙 정치에 진출한 선비들이 정치적 갈등을 겪고 낙향한 이후에, 재기를 위한 일종의 은둔처의 역할도 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공부를 하는 곳과 존현(尊賢)의 제사를 지내는 곳, 두 가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설치된 향교에서 공자를 비롯한 4성(안회, 증자, 자사, 맹자)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향교의 규모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존현의 수가 증감되기도 하였다. 서원의 경우 서원이 설치된 지역의 주요 엘리트 또는 학덕이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사를 지냈으므로 서원마다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달랐으며 이는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였다.

한국은 고대 시대부터 유교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 엘리트 또는 지배계층으로 활동하기 쉬운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국가를 운영한 조선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학문 증진이 촉구되면서 엘리트 또는 지배계층이 되기 위해서 보다 강력한 교육열을 갖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이 지향하는 바와 내용은 변화하였으나,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의 교육문화는 전통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국의 교육은 오늘날 경제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로 기능하였으며, 동시에 한국 문화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해 오고 있다.

교열본

한국을 이끌어온 교육의 역사

한국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중시해 왔다. 한국의 교육은 성공적인 경제적 성취의 근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에서 교육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 OECD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나타난 한국 학생들의 우수한 결과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좁은 국토와 보유한 천연자원이 없었던 한국이 이와 같은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은 교육에 있었다는 데에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교육에 대한 한국의 높은 관심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372년 고구려는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웠으며, 이후 지방에도 경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유교와 무예를 가르쳤다. 신라는 화랑도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였고, 7세기경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국학을 세워 유교를 교육하고 관리를 양성하였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에 한국인들이 책을 사랑하고 밤낮으로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에도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관리 양성을 위하여 중앙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국자감에는 유학부와 기술학부가 있어 기술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방에는 항교를 세워 지방 향리의 자제들이나 서민들이 교육을 받았다. 국가가 설립한 교육기관 외에도 개인이 유교적 지식의 습득과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학도 존재하였다. 사학은 최충이 세운 9재 학당에 이어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어 사학 12도라 불렸다.

조선의 체계적 교육 기관

고려의 학교 교육을 계승한 조선에서는 유교적 이념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고려 말에 만들어진 성균관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최고의 학부로 정착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수도 한양에 사부학당이 설치되었고 지방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중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향교는 지방에 있는 모든 고을 329개소에 설치되어 전국적으로 유교에 관한 소양 교육을 실시하는 기반이 되었다.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외에도 초등 교육기관으로 서당이 있었다. 서당은 문자해득과 기초 유학에 관한 학습을 담당하였다. 서당은 중앙정부의 규제 없이 학문적 바탕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개설하여 교육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서당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지방의 유력자들이 경비를 부담하고 숙식을 함께 해결하는 가정교사로 훈장을 초빙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훈장이 자신의 집에서 서당을 열기도 하였고, 양반 계층에서 별도로 조직한 서당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서당이 없는 지역에서는 서원에서 한문 초급과정을 가르쳐 서원 부설 서당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소양 교육을 장려하였던 조선의 환경 속에서 서당은 지방민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운영되어 왔으며 19세기 근대적 교육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서당은 가장 보편적인 초등 교육기관으로 조선이 멸망한 직후인 1911년 기준으로 전국에 1만 6540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향교와 서원의 두 가지 역할

서당 및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의 교육․학문을 담당했던 서원이 있다. 국가가 설립한 향교와 달리 서원은 개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향교와 성균관이 관리를 선발하는 국가시험(과거科擧)에만 치중한 것에 대한 반발로 선비들은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서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중앙 정치에 진출한 선비들이 정치적 갈등을 겪고 낙향한 후에는 재기를 위한 일종의 은둔처 역할도 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공부를 하는 곳과 존현(尊賢)의 제사를 지내는 곳, 두 가지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설치된 향교에서 공자를 비롯한 4성(안회, 증자, 자사, 맹자)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향교의 규모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존현의 수가 증감되기도 하였다. 서원의 경우 서원이 설치된 지역의 주요 엘리트 또는 학덕이 높은 사람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으므로 서원마다 제사 대상이 달랐으며 이는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였다.

한국은 고대 시대부터 유교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지도자 또는 지배계층으로 활동하기 쉬운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국가를 운영한 조선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학문 증진이 촉구되면서 상위 계층이 되기 위해서 보다 강력한 교육열을 갖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이 지향하는 바와 내용은 변화하였으나,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의 교육문화는 전통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국의 교육은 오늘날 경제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로 기능하였으며, 동시에 한국 문화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차용준, 『전통문화의 이해, 제6권: 전통교육․예술문화편』, 전주대학교출판부, 2000
    • 최완기, 『한국의 전통교육』, 이화여대출판부, 2005
    • 최준식, 『세계인과 함께 보는 한국 문화 교과서』, 소나무, 2011
    • 전국역사교사모임, 『외국인을 위한 한국사』, 휴머니스트, 2014
  •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