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장영실
제목 | 독창적인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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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세종, 이천, 김조 |
장소/공간 | 동래현, 경복궁, 천추전, 흠경각 |
개념용어 | 조선, 관노, 양인, 상의원별좌, 세종실록, 천문 관측 의기, 간의, 혼천의, 대간의, 소간의,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자격루, 대호군, 옥루, 시(時) · 경(更) · 점(點), 갑인자 |
목차
1차 원고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이다.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옥루(玉漏)는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설치하였다. 옥루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가진 물시계였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1438년에 만들어진 옥루는 장영실이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개발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세종실록> 1437년 4월 15일자 기사에는 옥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천추전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흠경각’이라 하고, 종이를 붙여서 산 모양을 만들어 높이는 일곱 자 가량인데, 집 가운데 놓고 안에는 기륜(機輪 : 바퀴)을 만들어서 옥루수(玉漏水)를 이용하여 치게 하였다. 오색 구름은 해를 둘러 나들고, 옥녀(玉女)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며, 사신 무사(司辰武士)는 스스로 서로 돌아보고, 4신과 12신은 돌고 향하고 일어나고 엎드린다. 산 사면에는 사철의 풍경을 진열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였다. ……”
이외에도 장영실은 조선 시대의 활판 인쇄 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6)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
• - 세종이 장영실에게 천문기기를 연구하도록 한 이유를 설명할 것, 물시계, 간의, 혼천의, 해시계 등을 만든 이유를 당시 농사와 백성들의 삶과 연결하여 설명할 것 - 자격루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독자들이 그 모습이 상상하면서 흥미로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격루와 옥루의 모습 중 하나만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를 고루라면 자격루가 더 유명하니 자격루를 설명하는 것이 어떨까요? 물시계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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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세종이 천문 기기를 만들도록 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반도 기후 상황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파종과 추수의 시기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려 한 것이다. 당시는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과정에 적합한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시계가 없었던 시대에는 해 그림자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흐린 날에도 시간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였다.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이다.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었다.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8년 장영실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독창적인 천상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기계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농사일에 따른 절기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물시계였다.
옥루의 구조는 대단히 복잡했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하였다.
교열본
관노를 등용한 세종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세종에게 부름을 받기 전까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는 세종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가서 천문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장영실의 업적은 그가 물시계 등을 연구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천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었고 1423년에는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궁궐 안 세종 임금 가까이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세종이 천문 기기를 만들도록 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반도 기후 상황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파종과 추수의 시기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려 한 것이다. 당시는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과정에 적합한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시계가 없었던 시대에는 해 그림자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해나 별을 볼 수 없는 흐린 날에는 시간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였다.
과학으로 완성한 자격루와 옥루
관리로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장영실은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만든 공로로 좀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는 경복궁 등에 설치할 천문 관측 의기(儀器)를 만들기 위해 이천(李蕆)과 함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하였다. 이후 기본 관측 기계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 소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등을 만들었다.
장영실이 만든 가장 훌륭한 과학 기기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이다. 1434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었다.
장영실과 이천(李蕆) · 김조(金銚) 등이 함께 만든 자격루는 시(時) · 경(更) · 점(點)에 따라 자동으로 종과 북 · 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8년 장영실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참고하여 독창적인 천상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기계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농사일에 따른 절기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물시계였다.
옥루의 구조는 대단히 복잡했다. 풀을 먹인 종이로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탄환만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 속에 있고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게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의 아래에는 시각을 맡은 네 명의 옥녀(玉女)와 방위를 맡은 네 신이 매 시각 제자리를 한 바퀴씩 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서 각각 종 · 북 · 징을 치는 세 사람의 무사(武士)도 있다.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이라는 전각을 지어놓고 그 안에 옥루를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