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의궤
제목 | 의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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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황인희 |
제목수정안 | 의궤 |
교열자 | 유안리 |
인물/기관/단체 | 도감, 실록청, 찬수청, 의궤청, 세종, 의인왕후, 강화부, 의정부, 예조, 춘추관 |
장소/공간 |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외규장각 |
사건 | 임진왜란, 병인양요 |
개념용어 | 왕, 세자, 세자빈, 왕비, 책례, 국장, 빈전, 혼전, 부묘, 산릉, 존호, 능원, 실록, 선원보, 어진, 영정, 반차도, 복제, 장구, 의물, 이두, 차자, [[<국조오례의>]], 오례, <빈전혼전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 <을묘원행정리의궤> |
목차
1차 원고
의궤(儀軌)는 ‘의식의 궤범’을 줄인 말로 의식을 치르는 데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대한 전말과 경과,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추진하는 데 참고로 삼게 하기 위함이다.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세자의 혼례, 세자나 세자빈 · 왕비 등의 책봉 · 책례(冊禮), 국장(國葬) 및 빈전(殯殿) · 혼전(魂殿) · 부묘(祔廟) 등의 의식 절차, 산릉(山陵) · 묘소의 축조, 선대왕(先代王) · 왕비 등에 대해 존호를 올리는 일,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 · 개수, 실록이나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 · 영정(影幀)을 그리는 일 등이다.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또는 찬수청 등이 설치되어 행사를 전담 진행한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록(謄錄)이라 한다. 등록은 행사가 끝난 뒤 의궤를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만들기 위해 의궤청을 설치했다. 의궤청에서는 도감에서 작성한 등록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해 의궤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경위부터 행사의 준비 및 전체 진행 과정, 의례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가 끝난 후 공로자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의궤를 통해 행사 자체의 의식과 절차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 체계나 물자 · 인원의 국가 동원 능력을 알 수 있다. 또 의식 집행에 대한 논의 과정,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날짜별 진행 과정 등도 알 수 있다. 반차도 등 각종 자료 그림들은 당시의 복제(服制) · 장구(裝具) · 의물(儀物)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궤에는 이두(吏讀) · 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언어학적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국조오례의>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례에 관한 의식 · 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이 의궤를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이다. 이 의궤들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의궤는 대개 필사본으로 만들어 부수가 극히 제한되어 일반적으로는 아홉 부 내외로 만들었다. 한 부는 임금에게 보일 어람용(御覽用)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 예조 · 춘추관 · 강화부(江華府) ·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의궤의 성격에 따라서는 작성 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단 두 부만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어람용과 예조에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어람용은 각 부서에 배부되는 의궤와 양식과 장정이 달라서 의궤의 표지 · 장정만 보아도 어람용 의궤임을 알 수 있었다. 1795년 <을묘원행정리의궤> 이후부터는 활자본 의궤가 등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약 4천여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당시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빼앗아간 것들이다. 이때 340여 책 중을 가져갔는데 그 중 의궤만 189종에 이른다. 프랑스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는 한국 소장본과 같은 것도 있지만 한국에 없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
의궤는 조선이 예절과 문치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연구원 1차 검토
검토의견 | |
•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부터 약탈당했던 의궤 중 일부가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온 내용도 추가해야 한다. | |
• - 황인희 원고를 기본으로 삼고, 황정욱의 글 중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켰으면 한다 :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되어 있는 의궤는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5년제 영구 임대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없나? 청계천변에 타일로 제작해 놓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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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원고
의궤(儀軌)는 ‘의식의 궤범’을 줄인 말로 의식을 치르는 데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대한 전말과 경과,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추진하는 데 참고로 삼게 하기 위함이다.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세자의 혼례, 세자나 세자빈 · 왕비 등의 책봉 · 책례(冊禮), 국장(國葬) 및 빈전(殯殿) · 혼전(魂殿) · 부묘(祔廟) 등의 의식 절차, 산릉(山陵) · 묘소의 축조, 선대왕(先代王) · 왕비 등에 대해 존호를 올리는 일,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 · 개수, 실록이나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 · 영정(影幀)을 그리는 일 등이다.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또는 찬수청 등이 설치되어 행사를 전담 진행한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록(謄錄)이라 한다. 등록은 행사가 끝난 뒤 의궤를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만들기 위해 의궤청을 설치했다. 의궤청에서는 도감에서 작성한 등록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해 의궤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경위부터 행사의 준비 및 전체 진행 과정, 의례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가 끝난 후 공로자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의궤를 통해 행사 자체의 의식과 절차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 체계나 물자 · 인원의 국가 동원 능력을 알 수 있다. 또 의식 집행에 대한 논의 과정,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날짜별 진행 과정 등도 알 수 있다. 반차도 등 각종 자료 그림들은 당시의 복제(服制) · 장구(裝具) · 의물(儀物)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궤에는 이두(吏讀) · 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언어학적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국조오례의>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례에 관한 의식 · 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이 의궤를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이다. 이 의궤들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의궤는 대개 필사본으로 만들어 부수가 극히 제한되어 일반적으로는 아홉 부 내외로 만들었다. 한 부는 임금에게 보일 어람용(御覽用)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 예조 · 춘추관 · 강화부(江華府) ·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의궤의 성격에 따라서는 작성 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단 두 부만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어람용과 예조에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어람용은 각 부서에 배부되는 의궤와 양식과 장정이 달라서 의궤의 표지 · 장정만 보아도 어람용 의궤임을 알 수 있었다. 1795년 <을묘원행정리의궤> 이후부터는 활자본 의궤가 등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약 4천여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당시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빼앗아간 것들이다. 이때 340여 책 중을 가져갔는데 그 중 의궤만 189종에 이른다. 프랑스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는 한국 소장본과 같은 것도 있지만 한국에 없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중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되어 있던 의궤는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임대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의궤는 조선이 예절과 문치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 |
•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 등에 관한 설명이 독자에게는 어려울 수 있음. 복잡한 한자어를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게 된 의궤의 가치에 관한 보충설명이 필요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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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본
행사를 치루는 기준, 의궤
의궤(儀軌)는 ‘의식의 궤범’을 줄인 말로 의식을 치르는 데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대한 전말과 경과,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추진하는 데 참고로 삼게 하기 위함이다.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세자의 혼례, 세자나 세자빈 · 왕비 등의 책봉 · 책례(冊禮), 국장(國葬) 및 빈전(殯殿) · 혼전(魂殿) · 부묘(祔廟) 등의 의식 절차, 산릉(山陵) · 묘소의 축조, 선대왕(先代王) · 왕비 등에 대해 존호를 올리는 일,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 · 개수, 실록이나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 · 영정(影幀)을 그리는 일 등이다.
이러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으로 도감이나 실록청 또는 찬수청 등이 설치되어 행사를 전담 진행한다. 각 도감에서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록(謄錄)이라 한다. 등록은 행사가 끝난 뒤 의궤를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행사가 끝나면 의궤를 만들기 위해 의궤청을 설치했다. 의궤청에서는 도감에서 작성한 등록에, 필요한 사항을 더 추가해 의궤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의궤에는 행사를 거행하게 된 경위부터 행사의 준비 및 전체 진행 과정, 의례의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 인원, 행사가 끝난 후 공로자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후대의 연구 자료가 되는 의궤
의궤를 통해 행사 자체의 의식과 절차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 체계나 물자 · 인원의 국가 동원 능력을 알 수 있다. 또 의식 집행에 대한 논의 과정,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날짜별 진행 과정 등도 알 수 있다. 반차도 등 각종 자료 그림들은 당시의 복제(服制) · 장구(裝具) · 의물(儀物)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궤에는 이두(吏讀) · 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어 언어학적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국조오례의>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례에 관한 의식 · 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이 의궤를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00년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이다. 이 의궤들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의궤는 대개 필사본으로 만들어 부수가 극히 제한되어 일반적으로는 아홉 부 내외로 만들었다. 한 부는 임금에게 보일 어람용(御覽用)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 예조 · 춘추관 · 강화부(江華府) ·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각각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의궤의 성격에 따라서는 작성 부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단 두 부만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어람용과 예조에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어람용은 각 부서에 배부되는 의궤와 양식과 장정이 달라서 의궤의 표지 · 장정만 보아도 어람용 의궤임을 알 수 있었다. 1795년 <을묘원행정리의궤> 이후부터는 활자본 의궤가 등장하였다.
예절과 문화 역사의 결과물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약 4천여 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또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당시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빼앗아간 것들이다. 이때 340여 책 중을 가져갔는데 그 중 의궤만 189종에 이른다. 프랑스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는 한국에 없는 책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중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의궤는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임대되었으며,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81종 167책도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의궤는 조선이 예절과 문치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조선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 관련자료
- 박병선 편, 『조선조의 의궤(儀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 박병선,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태학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