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안중근

Korea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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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총살한 안중근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이토 히로부미, 고종, 삼흥학교, 돈의학교, 황병길, 동의회, 단지회, 이완용, 을사5적, 코코프체프, 관동도독부, 마나베, 미즈노
장소/공간 하얼빈, 진남포,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 랴오둥 반도, 뤼순 항
사건 을사늑약, 헤이그 밀사 사건, 국채보상운동, 한일신협약, 러일 전쟁,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정미7조약
개념용어 대한제국, 통감



1차 원고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안중근의 거사는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주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의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터넷 다음백과

관련자료

  • 『심산유고(心山遺稿)』
  •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숭모회, 1970)
  •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안중근자필본, 1910)
  •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 「안중근공판기록」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가계에 대해 서술할 것

- 안중근의 묘지는 아직도 뤼순감옥 근처에 있으며, 이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과 한국으로의 이장에 관한 한국인의 과제도 서술할 것
- 안중근의 유서와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를 서술하면서 안중근과 당시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도 서술할 것

- 좀 더 적극적으로 한국인이 생각하는 안중근에 대해 설명할 것


수정 원고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안중근의 거사는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주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의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라며 분노했다. 또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교열본

하얼빈 역에 울린 총성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을사늑약을 맺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황제를 퇴위시킨 침략의 원흉이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므로 안중근의 거사는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주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어린 시절 응칠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 해인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으로 참여하였던 안중근은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황병길(黃丙吉) 등 열두 명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5적 중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의 암살하기로 피로써 맹세하였다. 열두 명의 회원은 각자 왼손 약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단지, 斷指]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3년 이내에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하였다.

일본은 1904년에 있었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둥[遼東] 반도와 뤼순[旅順] 항을 차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리품으로 얻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1909년 10월 12일 도쿄를 떠났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 동아시아 세력 확장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를 예정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약 25분 동안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쏘았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군중 앞에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친 뒤 현장에서 의연한 태도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당했다. 세 발의 총탄을 맞은 이토는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30분 만에 사망하였다.

일본인도 존경한 안중근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국인 안응칠이고 나이는 31세”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다.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논리 정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밝혀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정권 강탈과 무고한 한국인 학살, 황제 폐위, 명성왕후 시해, 군대 해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등 열다섯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 재판부가 “청나라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 아니냐”라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수많은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토가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려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참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변론하였다.

동양 평화를 당부하고 순국하다

1910년 2월 14일 열린 언도 공판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가는 것)하지 말라.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또 3월 26일 오전 열 시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 평화를 위해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라며 분노했다. 또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 터 부근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8년 남북 정부가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위치조차 찾지 못했다. 그는 옥중에서 서론만 쓴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