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손기정

Korea100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제목 역경을 이겨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동아일보사, 양정고등보통학교, 남승룡, 자발라, 하퍼, 타미라
장소/공간 베를린, 신의주, 만주 안동현, 도쿄, 경성,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
사건 베를린올림픽, 안의육상경기대회, 경영 마라톤대회, 메이지신궁대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장기말소사건
개념용어 소련, 일장기



1차 원고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 기록이 수립되었다. 이 기록의 주인공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은 가슴에 일장기를 단 일본 대표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한국인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점령 아래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손기정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반드시 1등을 하여 자신이 한국인임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손기정은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安義陸上競技大會) 5,000m 달리기 종목에서 청장년을 누르고 우승했을 때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생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마라톤을 시작했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여러 마라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손기정은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또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올림픽 선발 최종전에서는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은 3위와 4위에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나라가 없었던 한국인은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최종 선발전에서 한국 선수가 1위와 2위를 차지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20㎞를 뛰어 최종 평가를 하도록 하였다.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종 평가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손기정은 1936년 6월 4일 한국의 경성(지금의 서울)을 출발한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가 탄 열차는 승객이 아닌 군 장비를 수송하는 화물 열차였다. 열차는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손기정은 이 여정에 대해 “가도 가도 넓고 큰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 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선이나 경의선에서처럼 산이라고는 보려야 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열차의 규모도 컸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그 덕분에 열차가 30분씩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선 일본 간첩으로 오인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베를린 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조선인(한국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은 당시 세계 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가 물리친 우승 후보들은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선수들이었다.

은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서두르지 말라"라고 충고를 보내주어 스포츠맨십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함께 출전한 한국의 남승룡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손기정에게 반환점부터 어떻게 그렇게 스피드를 낼 수 있었는가 묻자, 그는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올림픽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손기정은 실제로는 일본인이 아니었는데 가슴에 일본 국기를 달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도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성을 말해준다. 이는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약 9개월이 지난 1937년 6월 3일자에야 이 처분에서 풀려났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터넷 다음백과
  • 황대진 기자, 조선일보 2015.07.14. (기사명 추가)

관련자료

  •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정찬모, 1996)
  • 대한유상경기연맹 기록(1945∼2002)
  • 베를린올림픽대회 관련 자료
  • 강형구(손기정 특별전시회 자료 수집가) 면담록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해방 이후 손기정이 한국 마라톤계에서의 업적은 없나? 2002년 사망했는데 1936년도 올림픽 내용만을 쓴 것이 아쉽다.
- 손기정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 부상품으로 받은 청동투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을 사진과 일장기 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 사진과 함께 설명하면 시각적 효과가 있어 의미가 있을 듯하다.



수정 원고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 기록이 수립되었다. 이 기록의 주인공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은 가슴에 일장기를 단 일본 대표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한국인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점령 아래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손기정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반드시 1등을 하여 자신이 한국인임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손기정은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安義陸上競技大會) 5,000m 달리기 종목에서 청장년을 누르고 우승했을 때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생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마라톤을 시작했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여러 마라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손기정은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또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올림픽 선발 최종전에서는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은 3위와 4위에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나라가 없었던 한국인은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최종 선발전에서 한국 선수가 1위와 2위를 차지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20㎞를 뛰어 최종 평가를 하도록 하였다.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종 평가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손기정은 1936년 6월 4일 한국의 경성(지금의 서울)을 출발한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가 탄 열차는 승객이 아닌 군 장비를 수송하는 화물 열차였다. 열차는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손기정은 이 여정에 대해 “가도 가도 넓고 큰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 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선이나 경의선에서처럼 산이라고는 보려야 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열차의 규모도 컸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그 덕분에 열차가 30분씩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선 일본 간첩으로 오인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베를린 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조선인(한국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은 당시 세계 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가 물리친 우승 후보들은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선수들이었다.

은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서두르지 말라"라고 충고를 보내주어 스포츠맨십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함께 출전한 한국의 남승룡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손기정에게 반환점부터 어떻게 그렇게 스피드를 낼 수 있었는가 묻자, 그는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올림픽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손기정은 실제로는 일본인이 아니었는데 가슴에 일본 국기를 달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도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성을 말해준다. 이는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약 9개월이 지난 1937년 6월 3일자에야 이 처분에서 풀려났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 당시 손기정은 우승 기념으로 고대 청동 투구를 받았다. 높이 21.5㎝의 이 투구는 기원전 6세기 쯤 고대 그리스 투사들이 마상 경기 때 사용했던 것으로 1875년 그리스 제우스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이 투구는 올림픽 당시에 손기정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고 그동안 독일 올림픽 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1986년에 그리스의 부라딘 신문사의 주선으로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 투구가 민족의 것이라고 판단하여 1994년에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했다. 현재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열본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 기록이 수립되었다. 이 기록의 주인공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은 가슴에 일장기를 단 일본 대표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한국인이었다. 당시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점령 아래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손기정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반드시 1등을 하여 자신이 한국인임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달리기로 일본인을 이긴 한국인들

손기정은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安義陸上競技大會) 5,000m 달리기 종목에서 청장년을 누르고 우승했을 때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생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마라톤을 시작했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여러 마라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손기정은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 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또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올림픽 선발 최종전에서는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은 3위와 4위에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나라가 없었던 한국인은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최종 선발전에서 한국 선수가 1위와 2위를 차지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20㎞를 뛰어 최종 평가를 하도록 하였다.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종 평가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고개 숙인 슬픈 우승자

손기정은 1936년 6월 4일 한국의 경성(지금의 서울)을 출발한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가 탄 열차는 승객이 아닌 군 장비를 수송하는 화물 열차였다. 열차는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3일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손기정은 이 여정에 대해 “가도 가도 넓고 큰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 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선이나 경의선에서처럼 산이라고는 보려 해도 볼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열차의 규모도 컸지만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열차가 30분씩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선 일본 간첩으로 오인 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베를린 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조선인(한국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은 당시 세계 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가 물리친 우승 후보들은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선수들이었다.

은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서두르지 말라"라고 충고를 보내주어 스포츠맨십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함께 출전한 한국의 남승룡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손기정에게 반환점부터 어떻게 그렇게 스피드를 낼 수 있었는가 묻자, 그는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올림픽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자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손기정은 실제로는 일본인이 아니었는데 가슴에 일본 국기를 달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도 한국인의 강인한 민족성을 말해준다. 이는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약 9개월이 지난 1937년 6월 3일자에야 이 처분에서 풀려났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 당시 손기정은 우승 기념으로 고대 청동 투구를 받았다. 높이 21.5㎝의 이 투구는 기원전 6세기 쯤 고대 그리스 투사들이 마상 경기 때 사용했던 것으로 1875년 그리스 제우스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이 투구는 올림픽 당시에 손기정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고 그동안 독일 올림픽 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1986년에 그리스의 부라딘 신문사의 주선으로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 투구가 민족의 것이라고 판단하여 1994년에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했다. 현재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