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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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김덕만, 진평왕, 마야부인, 화백회의, 동륜태자, 석가모니, 성조황고, 박혁거세, 김유신, 자장, 각간 알천, 상대등 비담, 염종
장소/공간 분황사, 당항성, 압량주, 영묘사, 옥문지, 여근곡, 부산, 월성
개념용어 신라, 골품제,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 인평, 백제, 고구려, 당나라, 첨성대, 황룡사 9층탑, 예지력, 신통력
물품/도구/유물 첨성대 등



1차 원고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에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도 있다. 636년 궁 서쪽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들이 모여들어 며칠 동안 계속 울어댔다. 선덕여왕은 각간 알천(閼川) 등에게 군사를 데리고 서쪽 교외에 있는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가 매복한 적병을 물리치라고 명했다. 실제로 부산(富山) 밑에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었고 그곳에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이에 대해 선덕여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적군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윤재운 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
  • 「신라 선덕왕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정용숙,『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 「‘선덕여왕지기삼사’조 설화의 연구」(강재철, 『동양학』2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1)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선덕여왕이 활동했던 시기의 한반도 지도 및 유적을 추가하고 신라시대의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각자료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여왕의 신통력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는 하나로 축소하고, 선덕여왕시대에 신라가 이룩하였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황룡사 9층석탑의 설립 배경과 염원을 적으면서, 황룡사 9층석탑은 호국의 상징를 가진 탑임을 서술할 것

- 천문 관측기구인 첨성대를 설립한 이유도 서술할 것
- 선덕여왕의 지기3사 중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의 징조를 알아차린 일화를 좀 돌려 설명할 수 없을까? 여근곡, 남근, 여근 등의 이야기를 외국 학생들에 설명할 수 있을는지.

- 선덕여왕의 치적 중 하나는 김춘추, 김유신 등을 중용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켜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김춘추를 다시 당나라로 보냈다. 이런 일련의 외교관계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지속적인 귀족들의 반발 속에서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국권을 유지시키려 했던 통치권자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도 서술했으면 한다.



수정 원고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에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점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교열본

골품제 때문에 왕이 된 여성

신라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은 한국 최초의 여왕이다. 이름은 김덕만(金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라 최고 의결 기관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의 신분 제도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신라의 신분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으로 나뉘었다. 그 중 ‘성골’은 부모 양쪽이 다 왕족인 순수 혈통을 말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 계열은, 자신들이 이전의 왕족과는 다른,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신성한 뼈’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신성한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순수 왕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골 중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에 여왕이 배출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는 선덕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석가모니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 명칭이다.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전국에 관원을 보내 흉년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또 이듬해에는 1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데 힘을 기울였다.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당나라에는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의 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638년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해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남양)을 습격하여 당나라로 가는 통로도 끊겼다.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산) 군주로 임명해 백제에 빼앗긴 성을 되찾게 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무렵 승려 자장(慈藏)의 권유로 호국 의지가 담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의 아홉 개 층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한다. 당나라로 유학 가 있던 자장은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신인(神人)이 알려줬다며 귀국 후 탑을 세울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의 뜻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명장 아비지(阿非知)까지 초청하는 등 탑을 세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개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 선덕여왕은 첨성대(瞻星臺)를 만들도록 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기구이다. 당시 천문을 관측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달력을 만들거나 기상을 관측하기 위함이다. 첨성대가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미루어 경주 첨성대가 전자의 기능을 담은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여왕으로서의 고난

선덕여왕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고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당나라의 태종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당나라 왕족 중 남자 한 명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도록 하겠다”라고 무례하게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왕실은 선덕여왕이 평범한 여자가 아닌, 예지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임을 강조해야 했다. 《삼국유사》에는 여왕의 지혜와 신통력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향기 없는 모란에 관한 일화이다. 어느 날 당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보내온 씨앗을 심어서 꽃이 피었지만 정말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개구리 울음소리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알아 장지를 스스로 정하여 지시했다고도 한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보내 난을 진압하던 중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시기에 즉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자장법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 불교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당나라의 무시를 무릅쓰고 젊은이들을 유학 보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당나라와의 선린 관계를 유지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