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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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친 서희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소손녕, 성종, 이몽전, 중랑장 대도수, 낭장 유방
장소/공간 동경, 청천강, 봉산군, 서경창, 대동강, 안융진, 평양,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흥화진, 강동6주
사건 거란의 제1차 침입
개념용어 고려, 문신, 거란, 유수, 고구려, 화친론과 주전론, 신라, 송나라, 발해, 조빙, 성보



1차 원고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덕분에 그의 이름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잠식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을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 :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그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출처 및 관련자료

출처

  • 이근호 외,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청아출판사(출판연도 추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자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역옹패설(櫟翁稗說)』
  • 『보한집(補閑集)』
  • 『금남집(錦南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고려(高麗) 성종대(成宗代)의 정치적지배세력(政治的支配勢力)」(이기백, 『호남문화연구』6, 1974)
  • 「서희(徐熙)」(황원구, 『인물한국사』Ⅱ, 박우사, 1965)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서희는 우리에게 거란과의 외교담판으로 알려져 있다. 본 원고도 이 부분에 집중되어 서술되었다. 서희에 대한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예를 들어 정치, 외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 정책 및 외교에 대한 사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거란과의 담판 및 방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서희가 활동했던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지도와 함께 간략하게 설명해주면, 고려, 송, 거란간의 전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 서희가 말한 것인데, 고려의 수도는 개경인데, 서희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였나?


수정 원고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982년에는 송나라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단절되었던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나타냈다. 그의 가장 뚜렷한 업적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일이다.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잠식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 : 서경)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 :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그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양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구원 2차 검토

검토의견
글의 구성과 전개는 괜찮으나, 다양한 독자층을 고려하여 인용문 등을 좀 더 쉽게 윤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짐



교열본

적의 위협에서 속셈을 알아채다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982년에는 송나라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단절되었던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역량을 나타냈다. 그의 가장 뚜렷한 업적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을 말로 담판지어 물리친 일이다.

993년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東京, 지금의 랴오닝(遼陽)) 유수(留守)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다. 청천강 이북 지역인 봉산군(蓬山郡) 전투에서 승리한 소손녕은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지 않으면 소탕하겠다”라며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고려에 보냈다. “대조(大朝 :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라며 위협도 가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었다.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고려의 임금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으면 마땅히 죽일 것”이라며 계속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 고려의 대신들은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나뉘어 대책을 논했다. 성종은 거란에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는 쪽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경창(西京倉)에 보관되어 있었던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쌀은 대동강에 던지게 했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적군 거란에게는 내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 때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며 곡식 버리는 것을 말렸다. 거란이 봉산군을 쳤을 뿐 더 이상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속셈을 꿰뚫은 서희는 싸울 것을 주장하며 성종을 설득했다.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 땅을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에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쌀을 버리지 않게 했다.

거란의 장수를 말로 물리치다

그 무렵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했다. 그러자 고려의 대신과 만나기를 청했고 서희는 자진하여 소손녕을 만나러 갔다.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은 자신이 ‘대조의 귀인’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서희는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인데 이 자리는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라며 절하기를 거부하였다. 소손녕은 배례 문제로 서희를 세 차례나 물리쳤다. 그러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쪽과 서쪽에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

소손녕은 거란이 쳐들어온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거란이 가졌는데 고려가 옛 고구려 땅에 조금씩 파고들었다는 것과 고려는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는 것이다.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결국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므로 고려가 북진 정책을 취하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송나라와 함께 거란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과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손녕의 말에 반박하고 설득했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 : 서경)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나라에 들어가니 어찌 침해라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영토 안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여 간사한 짓을 하므로 길이 막히고 그곳을 지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 제후가 왕을 찾아가 알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요새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서희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함을 밝힌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와 거란의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여진족 평정 문제까지 들고 나온 것이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과 기개에 탄복하여 군사를 철수하였다.

그 후 994년부터 3년 동안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진(長興鎭) · 귀화진(歸化鎭) · 곽주(郭州) · 귀주(歸州) · 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향권을 압록강까지 넓혔다. 이런 일들은 서희와의 담판에 따른 거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